6년 된 컴퓨터 바꾸면 혈세 낭비? “그걸로 기사 써봐라”
[비평] 정치혐오 조장하는 언론의 국회 ‘컴퓨터 교체’ 기사… “왜 행정부 컴퓨터는 아무 말 안 하나”
국민은 언론을 통해 정치를 본다. 20~40%에 달하는 대한민국의 ‘정치혐오층’도 언론 보도를 보며 정치혐오를 키운다. 25일 SNS와 포털 등에서 화제를 모은 동아일보의 기사 ‘멀쩡한 컴퓨터 3000대 몽땅 바꾸는 국회’는 전형적인 정치혐오 조장 기사다.
정
치혐오층이 정치를 싫어하는 이유는 “국회의원들이 일은 안 하고 맨날 싸우기만 한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는 자연스레 “하는 것도
없으면서 돈만 쓴다”는 비난으로 이어진다. 동아일보의 단독기사 ‘멀쩡한 컴퓨터 3000대 몽땅 바꾸는 국회’는 이런 정치혐오층의
인식을 굳혀주는 보도다.
동아일보는 이 기사에서 20대 국회가 개원하면서 의원실 컴퓨터를 새로 교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국회 사무처는 20대 의원 300명의 모든 사무실을 새로 도배하고 의원실마다 컴퓨터 10대, 프린터 5대,
노트북 1대, 책상 3세트(책상, 의자, 서랍)를 교체해 줄 예정”이라며 “국민의 혈세를 들여 20대 국회 시작을 통 크게
자축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 |
▲ 5월25일자 동아일보 2면 |
동아일보 보도 이후 여러 언론에서 국회가 ‘멀쩡한 컴퓨터’를 교체한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YTN은 “의원실의 멀쩡한 컴퓨터 3천 대를 모두 교체한다고 해서 논란”이라며 “국회가 큰돈을 들여 일괄적으로 의원실 물품을 모두 교체하는 건 혈세 낭비”라고 밝혔다. KBS는 “계속 쓸 수 있는 것을 사용 연한이 넘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바꾸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언
론은 국회가 컴퓨터를 교체한다는 기사에 ‘멀쩡한’ ‘계속 쓸 수 있는 것’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이런 수식어는 국회가 세금을
낭비한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동아일보 기사에도 “2010년 컴퓨터를 보안용으로 일괄 교체한 뒤 6년이 지나 모두 교체 대상이
됐고 프린터 등도 오래돼서 바꿀 때가 됐다”는 국회 측의 해명이 나온다. 기자는 보급된 지 6년 됐고 사용연한까지 지난 컴퓨터를
일일이 사용해보고 ‘멀쩡하다’ ‘아직 쓸만하다’는 수식어를 붙였을까.
국회 보좌관 A씨는 “나도 컴퓨터 바꾸러 온
업체 사람한테 ‘이거 세금 낭비 아니냐, 왜 다 바꾸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별로 좋은 걸로 바꾸는 것도 아니고 연한이 오래
되서 고장 나면 수리비가 더 나올 거다’라고 했다”며 “한 달에 몇 번씩 컴퓨터 수리기사를 부르는지는 알고 이런 기사를 쓰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A씨는 또한 “나만 해도 컴퓨터를 쓰다 하드교체를 두 번 했고 갑자기 자료가 날아 갈까봐 외장하드를 쓴다”며 “일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모르겠다. 국회에 있는 사람들은 다 세금낭비 못해서 안달 난 줄 아나보다”라고 토로했다.
보좌관 B씨는 “컴퓨터가 하도 안 돼서 개인 컴퓨터를 가지고 와서 사용하는 보좌진들이 많다. 이런 기사 쓰는 기자들은 이 컴퓨터 가져다가 기사 써봤으면 좋겠다”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
국
회사무처는 25일 보도자료를 내고 “그간 입법 및 상임위 등 의정활동 과정에서 컴퓨터 속도가 느리고 고장이 잦다는 사용자
불편사항이 지속적으로 제기됨에 따라, 국회사무처는 의정활동의 효율적·체계적 지원 강화를 위하여 행정자치부 고시 2015-39호
“행정업무용 다기능 사무기기 표준규격”에 따른 듀얼PC를 구매하였다“고 밝혔다. 컴퓨터 교체가 행정자치부 고시에 따른 것이었다는
뜻이다.
언론이 말하지 않은 맥락도 있다. 동아일보는 해당 기사에서 의원실 마다 기존의 19인치 일체형 컴퓨터를
철거하고 성능이 좋아진 24인치 일체형 컴퓨터를 새로 설치했다고 밝혔다. 또한 이 일체형 컴퓨터는 174만원이며, 프린터 등
물품 교체비까지 합치면 50억 원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국회 사무처에 따르면 일체형 컴퓨터를 구매한 이유는
“최근 국회 등 국가기관에 대한 외부 해킹시도가 빈번한 상황에서 국회사무처는 외부의 사이버 침해공격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다. 국회 사무처는 보도자료를 통해 “업무용 PC와 인터넷용 PC를 하나의 본체에 구현하여 예전보다 보안성이 강화된
‘듀얼PC’를 조달청을 통해 구매하여 의원실에 제공했다”고 밝혔다.
![]() |
▲ 5월25일자 KBS 뉴스라인 갈무리 |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채 기사를 읽은 독자들은
국회가 ‘멀쩡한’ ‘아직 쓸 수 있는’ 컴퓨터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포털이나 SNS에는 “국회가 혈세 낭비한다”
“국민 혈세를 자기들 돈 마냥 펑펑 쓰고 있네” “19대 보다는 나아질 줄 알았는데”라는 반응을 보였다.
언론은 이런 기사를 쓸 때마다 ‘국민정서’를 근거로 제시한다. 동아일보는 기사에서 “국민의 눈높이와 맞지 않다”고 했다. 송찬욱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는 26일 ‘기자의눈’ 코너에서 “국회는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다. 단지 교체 시기가 됐다는 이유로 혈세 수십억 원을 들여 멀쩡한 컴퓨터와 책상을 싹 바꾸는 걸 납득할 국민이 몇 명이나 될지 궁금하다”고 밝혔다.
많
은 국민이 국회의원을 ‘일도 제대로 안 하면서 싸움만 하는 놈들’이라고 생각하고, “국회의원들 월급도 확 줄이고 싹 다
잘라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국민정서’에 따라 의원 정수를 확 줄여버리거나 국회의원직을 무보수로 바꾸고
국회의원에 지원하는 비용도 확 줄여버리면 어떻게 될까.
의회 기능이 약화 되고 행정부 감시가 잘 작동하지 않을수록 웃는 건 행정부다. ‘국민이 납득하지 못할 것’이라며 컴퓨터 교체도 못하게 해서 의원실 보좌진들이 업무에 지장을 받으면 누가 제일 좋아할까.
보
좌관 B씨는 “국회가 컴퓨터를 사용한 6년 동안 정부 부처는 컴퓨터 몇 개나 바꿨는지 한 번 취재해보라고 하고 싶다”고 전했다.
보좌관 A씨는 “다른 정부부처는 국회가 사용하는 컴퓨터보다 훨씬 더 좋은 걸로 한다고 알고 있다. 왜 행정부 컴퓨터는 아무 말도 안
하나”라고 지적했다.
언론이 해야할 일은 국회나 정부가 돈을 ‘얼마나 쓰느냐’에 집중해 ‘세금 낭비’ 딱지를 붙일
것이 아니라 돈 쓰는 만큼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그 효과는 어떠한지 등을 검증하는 것이다. 동아일보는 컴퓨터 교체를 두고
“국회가 견제 사각지대에 놓인 현실을 보여 준 것”이라며 “국회를 감시할 수 있는 독립된 기관이 필요하다”는 전문가의 말을
전했다. 감시도, 똑바로 해야 한다.
'나의 글 > 기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근혜의 착각, 재의요구할 순 있지만 폐기권한 없다" (0) | 2016.05.29 |
---|---|
박근혜 정부 헌법정신 들어 국회법 거부하다 (0) | 2016.05.29 |
벌써 대권? 반기문 대망론은 아직 친박의 꿈일 뿐 (0) | 2016.05.25 |
‘상시 청문회’가 ‘행정부 마비’가 아닌 3가지 이유 (0) | 2016.05.25 |
‘폐족’에서 ‘패권주의’까지, ‘친노’ 15년 굴곡의 역사 (0) | 2016.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