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과거 글/미디어스 칼럼

‘정권 유지’라 쓰고 ‘국익’이라 읽는다.

국정원 요원들을 다룬 드라마 <7급 공무원>이 인기를 끌고 있다. 정보기관 요원들의 삶과 사랑을 그린 드라마 <아이리스2>도 곧 방영될 예정이다. 7급 공무원과 아이리스2 이전에도, 국가정보기관 요원들의 삶을 다룬 드라마와 영화는 많았다. 그곳에서 정보기관 요원들은 임무에는 냉철하지만 인간다운 매력을 풍기는, 하지만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멋진 요원들로 묘사된다.

나 알바 아니야, 정직원이야!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 눈앞에 있는 정보기관 요원들의 모습은 어떨까? 제 작년 초를 떠올려보자. 한국 무기를 구입하겠다며 방문한 인도네시아 외교사절단의 호텔방에 한국 국가정보원 직원들이 숨어들어 노트북을 훔쳐보다 호텔직원에게 걸렸다. 그리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여야를 가리지 않고 국정원의 허접한 일처리(?)와 무리한 임무수행을 질타했다.

최근 국정원이 다시 정치권과 언론의 중심에 있다. 국정원이 북한 간첩이라도 소탕한 걸까? 아니면 북한의 핵개발에 관한 주요한 정보라도 입수한 걸까? 아니다. 문제는 인터넷이다. 민주당이 대선을 전후로 국정원 여직원이 집권여당에 동조하고 야당 후보를 비방하는 글을 올렸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런 적 없다고 잡아뗐으나 수사를 통해 사실이 드러나자 국정원은 인터넷 상의 종북주의자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한겨레>의 보도를 통해 국정원 직원이 진보성향의 인터넷커뮤니티 ‘오늘의 유머’에 야당후보를 비판하는 내용의 글을 무더기로 올렸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자 국정원은 “대북심리전 활동을 위해 글을 올렸다.”고 말을 바꿨다.

 

이 사건을 접하고 맨 처음에 든 생각은 “아니, 국가정보기관이 정치적 중립성을 어기고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여론 선동을 하다니!”라는 분노가 아니었다. “그렇게 할 일이 없나.”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당이 최초로 의혹을 제기하며 국정원 직원의 집을 에워쌌던 날, 북한이 미사일을 쐈다. 바로 하루 전날에도 국정원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 정황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정부는 북한이 미사일을 쏘지 않을 것이라 공식 발표했다. 두 가지 사건이 대비되면서 국정원의 무능함은 더욱 빛났다. 트위터에는 “인터넷에서 ‘너 알바지?’라고 물으면 기분 나빠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알바가 아니라 정직원이었구나.”라는 자조 섞인 유머가 떠돌았다.

종(從)북 vs 종(從)명박

이 사건이 황당하게 느껴지는 본질적인 이유는 자신들의 정치적인 활동을 국가안보, 국익으로 포장하는 국정원의 가증스러움 때문이다. 국정원은 종북주의자들에게 인터넷과 여론이 조작당하지 않도록 대북심리전을 펼친 것이라 주장했다. 국정원 직원은 김정일과 김정은, 북한 정권을 비판하는 글을 많이 올렸다고 한다. 북한에 관련된 글이니 국정원에 이에 대해 개입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치자. 북한에 관한, 사실과 다른 정보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자 국정원이 이에 대응한 거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국정원 직원 김씨가 4대강 사업이나 무상보육 철회, 제주해군기지 철회 등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두둔하고, 이명박 대통령의 해외 순방을 치켜세우는 등 이명박 정권을 옹호하는 글을 많이 작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야당 인사를 비판하고 박근혜 후보를 띄우는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를 칭송하고 박근혜를 치켜세우는 게 종북주의에 대응하는 것과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그리고 이게 왜 ‘대북심리전’일까? 이명박 정부에 반대하고 박근혜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국가의 적이고, 한국의 적인 북한과 똑같은 놈들이라는 걸까?

대선 직전 <한겨레>는 전직 국가정보원 관계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국가정보원이 2011년부터 4대강 사업 등 국정홍보와 ‘좌파와의 사상전’을 내세워 심리정보국 산하에 안보 1, 2, 3팀을 설치해 ’인터넷 댓글 사업’을 전개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국정원 엘리트 70명 ‘댓글알바…자괴감 느껴”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65765.html) 이 인터뷰에서 전직 국가정보원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 들어 4대강을 비롯한 치적홍보에 열을 올렸는데, 국정원에서도 처음에는 이런 정권홍보를 위해 조직이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치적 홍보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홍보 활동을) 확장하게 되면서 야당 인사에 대한 비판 또는 이명박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 기사에 반박 댓글을 다는 쪽으로 확장된 것이다”고 전했다.

이 인터뷰는 ‘국정원이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 건 나쁘다’는 식으로 전개되었지만, 사실 치적 홍보 역시 ‘정치적 활동’에 가깝다. 특정 정권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안보 관련 사항도 아닌 정부정책을 홍보하는데 왜 국가정보원이 동원되어야 하는 걸까? 그리고 홍보처를 통해 정책홍보를 하면 되지 왜 국가정보원을 동원해 여론전을 하는 걸까? 이들은 특정 정권, 특정 정치세력의 이익과 국익을, 특정 정치세력의 정권유지와 국가안보를 혼동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정권의 이익 및 안정과 국익, 국가안보를 동일시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 아니다. 2010년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 사건을 UN 안보리에 회부했을 때의 일이다. 참여연대가 천안함 사건 관련 정부 발표문에 대한 의문점을 UN안보리에 서한으로 발송했다. 청와대와 보수언론은 참여연대를 난타하며 어느 나라 국민이냐고 물었다. 그 때 어김없이 국익논리가 등장했다. 한국 정부의 발표에 반박을 제기하는 주장을 한 것이 국익을 해친다는 것이다. 정부발표에 의혹이 있다는 말을 하는 게 국익을 해친다고? 국익을 해치는 게 아니라 ‘이명박 정부’가 욕을 먹는 것이 아닌가?

국방부가 나꼼수 등 정부 비방 팟캐스트를 듣는 군인들의 스마트폰을 조사하고, 삭제 조치한 일도 있었다. 군인들이 지키는 건 국가이지 특정 정권이 아니다. 나꼼수 듣는다고 종북이면, 나꼼수를 못 듣게 한 국방부는 종(從)명박이다.

‘정권 유지’라 쓰고 ‘국익’이라 읽는다.

이명박 정부만 이렇게 해괴한 국익 논리를 내세운 건 아니다. 노무현 정부 때 벌어진 황우석 사태를 떠올려보자. 황우석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보도한 (PD수첩을 비롯한) 언론은 정치권은 물론 온갖 ‘국민’들의 물리적, 정신적 협박에 시달렸다.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 정치인들은 황우석을 비난하는 건 국익을 해치는 것이라 주장했다. 유시민은 "언론의 자유가 판을 쳐서 악취가 난다"는 말까지 했다. 국익이 침해되는 게 아니라 황우석을 밀어주고 줄기세포 사업을 추진한 정부의 공이 사라지기 때문에 정당한 의혹제기를 막은 게 아닌가? 만약 황우석에 대한 의심이 전혀 제기되지 않다가 나중에 황우석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국은 개망신을 당했을 것이고 세계인들의 안주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도대체 누가 국익을 침해한 걸까?

이번 사건을 통해 드러난 국정원의 모습도 유사하다. 정권 유지를 위해 봉사하면서 이를 국익과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다. 정권 유지라 쓰고 국익이라 읽는다. 경찰이나 검찰 등 다른 국가기관이라고 다를까? 보수우파들은 언제나 그들이 하는 일에 국익, 국가안보를 내세운다. 하지만 그들이 내세우는 국익은 누구를 위한 국익이며, 그들이 내세우는 국가안보는 누구를 지키기 위한 것일까. 국정원은 ‘대북심리전’을 한답시고 정권을 비판하는 네티즌들을 상대로 여론전을 펼쳤다.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적’으로 생각하는 국정원은 아마 그런 네티즌들은 국민도 아니고, 지켜야 할 대상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그들이 내세우는 국가안보가 많은 사람들을 지켜줄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