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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 /기타 칼럼 기고

<더 테러 라이브>, 언론이 노동자를 호명하는 방식



더 테러 라이브 (2013)

The Terror Live 
8.4
감독
김병우
출연
하정우, 이경영, 전혜진, 이다윗, 김소진
정보
스릴러 | 한국 | 98 분 | 2013-07-31


최근 개봉한 영화 <더 테러 라이브>는 ‘노동자’를 바라보는 언론의 시각을 잘 묘사한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 윤영화(하정우 역) 앵커는 마포대교를 폭파한 ‘건설노동자 박노규’를 ‘테러범’이라 부른다. 시간이 지나자 그는 ‘박노규’를 ‘근로자’라고 부른다. 폭탄테러가 이어지는 와중에, ‘박노규’의 처지에 공감하던 윤영화는 마침내 그를 ‘노동자’라고 호명한다. 그가 ‘박노규’를 노동자라고 부르는 순간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이었다.

윤영화는 ‘한국 언론’의 상징이다. 기회주의자에 출세를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그의 모습은 사회비판자가 아니라 권력으로 기능하는 한국 언론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있다. 윤영화보다 더 간악한 인물은 그의 상관인 보도국장 차대은이다. 차대은은 인질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대신 청와대의 입장을 그대로 읽으라고 강요한다. 목숨 걸고 싸우는 노동자들의 현실보다 국가기관의 해명, 자본의 입장만 대변하는 한국 언론의 모습이 아닌가. 아마 윤영화도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는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차대은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윤영화는 마포대교를 폭파한 ‘건설노동자’를 ‘테러범’이라 불렀다. 하지만 ‘테러범’이라는 호칭이 이렇게 극단적인 경우에만 노동자들에게 붙는 것은 아니다. 한국 언론은 일상적으로 노동자를 테러범 취급한다.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언론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죽창과 쇠파이프를 들고 도심을 어지럽히고 거리를 점거하는 테러리스트의 모습이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2004년 10월 3일자 조선일보 기사다. 조선일보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알카에다의 활동과 연계되어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이주노조 합법화를 위해 활동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사진을 실었다.

윤영화가 테러 그 자체보다 ‘박노규’와 건설노동자들의 억울한 사연에 주목하면서 테러범은 근로자로 바뀐다. 근로(勤勞者)는 열심히 일했다는 뜻이며, 근로기준법 제14조에 나온 정의에 따르면 근로자는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자”를 뜻한다.

근로자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째, 근로자라는 단어에는 지배계급의 관점이 담겨 있다. “열심히 일했으니 오늘은 좀 쉬게 해주자”는 식이다. 근로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열심히 일했는지’를 평가하는 지배계급에 의해 주어진다. 산업화를 위해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던 박정희 정권이 ‘근로자’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두 번째 의미는 ‘근로자’라는 말이 서로 층위가 다른 계급들을 뭉뚱그려 호명하는 단어라는 점이다. 노무과장이나 경영 지원실장, 좀 더 나가면 전무나 상무‧이사 같은 경영진, 심지어 사장도 월급 사장이라면 근로자에 해당할 수 있다. 언론이 박근혜 정부의 세법 개정안을 비판하며 ‘근로자의 주머니를 턴다’고 말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윤영화는 “대통령 사과 한 번 해결되는 게 그게 그렇게 어렵냐”고 말하며 근로자의 처지에 공감한다. “사람이 열심히 일하다 죽었는데, 지배세력인 대통령이 사과 한 번 못하느냐”는 분노다. 사과만 하면 끝나는데, 사과만 하면…

윤영화는 곧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진실을 깨닫는다. 청와대는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윤영화를 희생시키려 하고, 검찰과 경찰은 장단에 맞춰 춤을 춘다. 사과 한 번 하지 않던 대통령은 테러범과 싸워서 승리한 것처럼 떠들어댄다. 대통령이 사과 한 번 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박노규’의 테러의 배후에는 한국사회의 지배질서가 있었다. 이 진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윤영화는 ‘박노규’를 ‘노동자’라고 부른다.

노동자라는 말에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 대립과 모순이라는 계급의식이 담겨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노동자는 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주체다. 보수언론이 노동자라는 말을 피하는 이유다. 그들은 이 사회가 바뀌길 원하지 않으며 사회변화의 주인공이 평범한 노동자들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윤영화는 마지막 순간 ‘박노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죽음의 위기를 겪으며 이 사회의 본질을 직시한 윤영화는 왜 ‘박노규’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을까. 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바라보지 않고 그를 테러범이라, 근로자라 호명한 언론에 대한 자기고백이 아니었을까. 또 다른 장면을 떠올려보자. 극악무도한 것처럼 보이던 ‘박노규’가 심경의 변화를 보였던 순간이 있다. 흔들리는 마포대교를 떠나지 않고 위험에 처한 시민들의 소식을 전하던 이지수 기자, 그가 진심으로 호소했을 때 ‘박노규’는 처음으로 흔들렸다.

노동자에게 “미안하다”고 자기 고백하는 윤영화의 마지막 모습과, 노동자가 죽어나갔던 마포대교 바로 그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뉴스를 전하던 이지수의 모습에 한국 언론이 나아가야할 모습이 있다. 한국 언론은 노동자를 노동자라고 불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