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9일, 한국에서는 설날의 아침, 오사카에서는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오늘 일정은 아쉽지만 별 다를 것이 없다. 아침 일찍 체크아웃을 하고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 가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일.
카톡과 문자를 확인해 보니 한국 가는 아시아나항공 출발시간이 오전 9시에서 10시로 한 시간 지연됐다. 한국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그렇다는데 일본 날씨가 너무 좋아서 한국에 눈이 온 줄 꿈에도 몰랐다.


4박 5일간 정들었던 숙소를 일찍 빠져나와 난카이난바역으로 향했다. 너무 아침 일찍 나왔는지 난카이난바역 출구가 아직 열려 있지 않았는데 당황하지 않고 청소하는 분께 물어보니 북쪽 출구는 열려 있다고 했다,

무사히 난카이난바역으로 입성, 전날 미리 예매해 놓은 난카이 특급 열차를 타고 오사카 간사이 공항으로 향했다.
누군가 일본 여행을 마치며 가장 아쉬웠던 순간에 대해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기차 타고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더라. 다른 세상에 실컷 재밌게 놀다가 이제 곧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자각하는 순간.
왜 이런 ‘현실 자각 타임’은 그냥 ‘여행’이 아니라 ‘일본 여행’의 아쉬운 순간인 것일까? 놔두고 가기엔 너무나 싱그러운 풍경도, 남겨두고 온 찰나의 순간들이야 다른 나라에도 있겠지만 일본만큼 공항 가는 길 아쉬움을 맘껏 즐길 여행지는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유럽에서도 중국에서도 혹시 열차가 지연되는지, 제 시간에 도착하는지 계속 시간을 체크했던 것 같다. 카이로공항으로 가는 길에는 아예 열차가 멈춰버려 초조했던 기억도 있다. 승무원들이 찾아와 ‘외국인이면 돈 더내라’고 해서 흥이 다 깨졌던 적도 있다.
하지만 일본에선 유독 그런 걱정이 없다. 단순히 기술적 문제는 아니다. 일본어를 못하는 건 매한가지니 말도 안 통하는 나라라서 생기는 두려움도 아니다. 일본어 한 마디 못하는 나 같은 길치(이렇게 요약하니 최악)도 어떻게든 한국행 비행기에 태워 보내 줄 것 같은 든든함. 위기에 처한 여행객 등쳐먹을 사기꾼은 없을 거라는 안심. 급한 마음에 무언가를 놓쳐도 알아서 챙겨줄 것 같은 친절함,
그래서일지 일본은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마음 놓고 아쉬워할 수 있는 여행지다.

숙소 근처에 ‘히후미’(히타츠-후타츠-미츠라는 뜻)라는 유명한 야끼니꾸 가게가 있었는데 웨이팅 한 번 해볼 걸 그랬을까? 못 마신 나마비루 한잔이, 시간이 없어 들어가지 못한 아기자기한 골목길이 아쉽다. 일본어 몇 글자만 알았더라면, 메뉴판 몇 자라도 읽을 수 있었더라면 더 맛있는 걸 먹지 않았을까.
여행을 자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한동안 나에게 일본은 선택지에 없었다. 워낙 가까워서 그랬을 테다. 며칠 휴가라도 생기면 ‘가까운 일본은 언제든 갈 수 있으니까’라는 생각에 일부러 일본을 지웠다.
그러다 2023년 겨울 도쿄, 작년 5월 교토에 이어 올해 오사카까지,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여러차례 일본을 방문하며 깨닫는다.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란 없다. 한국에서 1시간 거리든 20시간 거리든 여행의 설레임은 평등하다.
이(異)세계에서 무엇을 발견할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다. 먹다 망하는 거리 '도톤보리'에도 전국시대의 흥망성쇠가 담겨 있었고, 발굴을 금지한 폐쇄된 무덤에서도 일본인의 심상을 발굴할 수 있었다. 화무십일홍을 일깨운 황량한 고대의 도읍지에도, 근본 없이 복원한 화려한 관광지에도 사라진 시간은 남아 있다.
일본보다 음식이 맛있는 나라는 있어도 ‘편의점 털이’의 낯선 기쁨을 선사할 수 있는 곳은 일본밖에 없을 것이다. 발에 채이듯 익숙한 자판기를 하나하나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곳도 일본밖에 없지 않을까?







욕조와 분리되어 있는 변기를 보면서, 고립을 자처하는 듯한 지하철 의자를 보며, 질서정연하게 정리된 캐리어 무덤을 보며, ‘이렇게 다르다니’라고 미소 지을 수 있는 곳은 일본밖에 없지 않을까?



거리를 가로지르는 기차를 보며 추억 속에 자리 잡은 우리나라에서의 옛 풍경을 떠올린다. 호텔에서 콜택시를 요청하면 사람이 직접 나와 택시 부르는 광경을 보며(이럴거면 내가 부르지..) 카카오택시가 없던 시절을 회상해 본다. 유적지 앞의 자봉 할아버지들을 보면서는 아마도 일본을 따라가게 될 우리의 미래를 생각한다.



‘완벽한 타인’들이 주는 가장 확실한 위로, 가장 가까운 이세계에서 느낄 익숙한 낯섦.
나라에서 1대1 데이트(?)를 함께한 일본인 청년 마사는 가이드를 마치기 전 나에게 ‘다음 여행지는 어디가 될 것 같냐’고 물었다. 나는 "글쎄, 아마 일본일 지도?"라고 답했다. 일본인 기분 좋으라고 던졌던 그 말, 어쩌면 사실이 될지도?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직전, 공항에서 편의점 털이 음식 중 제일 좋아하는 ‘타마고산도(에그 샌드위치)’를 마침내 획득했다. 늘 다 팔렸거나 다른 데 눈이 팔려 까먹었던 타마고산도를 흡입하며 짧았던 오사카 여행을 마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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