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27일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됐을 때 ‘잠시 일본 여행이라도 다녀올까’라는 생각이 든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사카를 선택한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인의 자유 여행지 1위, 한국인의 N차 방문 여행지 1위.
“오사카와 구이다오레, 교토와 키다오레”(오사카는 먹다 망하고 교토는 입다 망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입을 즐겁게 해주는 맛집의 도시.
테마파크 유니버설과 거대한 가이큐간 수족관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오감이 즐거운 도시
하지만 나처럼 도시 역사의 근본을 중시하고 박물관과 유적지 감상을 지상 과제로 여기는 사람에게 오사카는 사람에 치이기 쉬운, 지나치게 웃음이 많은(너무 싸패 같나?) 여행지다. 아니면 교토로 가는 길목, ‘오사카 간사이 공항’의 소재지라거나..
그런데 일본행 비행기를 요리조리 검색하던 중 문득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엔 늘 역사가 있다. 문화가 발달한 곳에 오래된 이야기가 없을 리 없다. 그래서 4박 5일의 짧은 여정이지만 오사카에서 역사를 찾으러 가보기로 했다. 일본 역사의 중요한 거점으로서 오사카의 색다른 매력을 발견해 보기로 한 것이다.
4일의 연휴를 순수하게 즐기고 싶은 마음에 1월 25일 아침 7시 15분 비행기 표를 낼름 끊었다. 구글신께서 준비성 없는 인간에게 징벌을 내린 것인지 며칠 전부터 ‘인천공항 난리 났다! 끝났다!’ 같은 류의 콘텐츠를 마구 나의 알고리즘에 노출시키기 시작했다.
3시간 전에 도착해도 비행기를 놓칠 수 있다는 온갖 기사, 경험담을 보니 조금 불안해졌다. 출발 전날 짐을 싸며 생각해 보니 3시간 전에 도착하려면 새벽 4시...리무진도 공항철도도 없는 꼭두새벽. 덩달아 마음이 급해져 새벽 3시에 일어나서 5만 5천 원 택시비를 헌납하고 4시 전에 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전혀 문제없이 1시간 만에 체크인 완료하고 쾌적하게 탑승구로 진입했다. 이런 썅...인천공항 호들갑 콘텐츠는 구글신이 아니라 택시회사의 바이럴 마케팅이었을까?
새벽 3시 기상 이슈로 몸과 마음이 모두 피곤했기에 2시간 비행 내내 기절했다. 눈을 떠보니 오사카 간사이 공항. 기내식도 없었던 터라 너무 배고파서 도착하자마자 샌드위치 하나 흡입한 채 목적지인 오사카시의 중심지인 난바역으로 향했다.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서 난바역에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난카이 라피트’라는 특급열차를 타는 것이다. 일본 여행 때마다 사용하던 ‘클룩’이라는 앱을 통해 표를 미리 예매해 놔서 편하게 난바역까지 갈 수 있었다.(편도 약 11,000원) 난바역까지 가는 데 40분도 안 걸린다.
어디로 가야할 지 헷갈릴 정도의 수많은 출구, 수없이 늘어선 지하 상점, 코를 찌르는 음식 냄새,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번화하지만 놀랍게도 번잡스럽진 않은 거리의 풍경. 일본에 도착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일본에 도착했다면? 첫 끼는 라멘이다. 숙소로 체크인을 하러 가는 길에 이치란라멘과 함께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라멘 프렌차이즈집 '잇푸도'에 줄을 섰다. 검색해서 간 건 아니고 그냥 내려서 걷다가 우연히 줄 서 있는 일본인들을 발견하고 방앗간 발견한 참새마냥 뒤에 줄을 섰다.
약 10여 분의 웨이팅 후 잇푸도의 시그니처인 돈코츠라멘 ‘시로마루 클래식’(당연히 추가 토핑 있는 것으로)과 교자를 하나 흡입했다. 역시 익숙하지만 맛있는 맛. 일본 라멘 하나 때려줘야 비로소 내가 일본에 왔다는 실감이 든다. 맛보다는 라멘집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다.
일본 라멘집이나 우동집에서 면은 물론 국물까지 다 먹어 치우는 것을 ‘간쇼쿠’라고 한다. 이탈리아에서 파스타 소스에 빵 을 찍어 긁어 먹는 행동이 ‘진짜 맛있다’는 뜻인 것처럼 ,일본에선 국물 설거지야말로 아주 맛있게 잘 먹었다는 뜻이라고 한다. 가게주인도 ‘간쇼큐’를 매우 큰 기쁨으로 여긴다고.
나는 늘 하던 대로 잇푸도 난바역점 주인에게 큰 기쁨을 준 뒤 숙소로 향했다. 숙소 체크인이 2시부터 가능한 터라(이것도 원래 4시였는데 당겨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2시간 정도 시간이 붕 떴다.
그래서 짐을 바리바리 든 채로 인근의 구로몬시장 구경에 나섰다. ‘검은 문’이라는 뜻의 구로몬시장은 오사카의 부엌이라 불리는 유명한 시장이다.
구로몬시장은 생각만큼 크지 않아서 한 바퀴 구경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길거리 음식 주워먹으려고 일부러 라멘집에서 한 그릇만 먹었는데(물론 교자까지 '간쇼쿠'), 솔까말 조금 비쌌다. 우리나라로 치면 붕어빵이나 닭꼬치 같은 한 입 거리 간식들인데 웬만하면 다 3,000~4,000엔이 기본이다. 500엔 짜리 간식도 발견했는데 평균치보다 너무 싸니까 오히려 먹기가 싫어졌다.(뭔 심보야...)
슬슬 핸드폰 배터리도 떨어져서 구로몬시장 근처의 구로몬공원(이라기보단 놀이터) 바로 옆에 있는 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일본에는 스타벅스 같은 프랜차이즈 카페가 아니면 ‘카페’라고 써 있어도 대부분 식사가 가능한 사실상의 음식점인 경우가 많다. 한국 카페랑 다른 분위기에 당황하지 말고 커피만 시켜도 된다. 잠시 쉬면서 오사카에서의 첫 라떼를 음미했다.
충전을 마치고 체크인을 하러 숙소로 향했다. 셀프 체크인-체크아웃을 해야 하는 아파트식 숙소였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좋았다. 난바역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곳인데 가까이에 니폰바시역도 있고 해서 접근성은 떨어지지 않았다. 번화가랑 살짝 떨어져 있어서 조용하고 좋았다.
숙소에서 재충전을 마치고 오늘의 메인 여행지 도톤보리로 향한다. 얏빠리 오사카데스네! 숙소를 나서자마자 작은 다리부터 보인다. “도쿄에는 마을이 880개, 오사카엔 다리가 880개, 교토엔 절이 880개”라는 말이 사실인가 부다.
10여 분을 걸어 오사카 최대 번화가, 도톤보리에 도착했다. 화려한 간판들, 수많은 사람들의 호객 소리, 한국어와 영어 일본어가 번갈아 나오는 육성 방송까지, 굳이 지도를 보지 않아도 이곳이 도톤보리라는 걸 알 수 있다.
오사카 최대 번화가로 알려진 도톤보리에는 사실 센코쿠시대(전국시대)부터 이어진 긴 역사가 담겨있다. 오사카의 성장과 발전을 논하면서 빼먹을 수 없는 인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 시작이다.
최대한 간략히 설명하자면 히데요시는 일본 전역을 통일하고 자신의 새 거점을 오사카로 삼는다. 이어 오사카를 일본 최대의 경제도시로 만드는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히데요시 말년엔 오사카 거리의 70% 이상이 상공업자들이 살던 거리로 변모할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오사카에 새로 유입된 상인들이 도시를 확대해 나갔고, 습지까지 매립하면서 센바, 시마노우치 일대를 상업의 중심지로 가꿔 나간다. 동시에 센바를 에워싸고 흐르는 여러 강들이 교역과 상업을 위한 공간으로 재정비되기 시작한다. 즉 오사카의 역사는 하천 정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는 뜻이다.
이후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중에 사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히데요시 후계자들의 내전이 벌어지면서 오사카 개발은 자연스럽게 멈춰선다. 내전이 끝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새로 천하를 통일하고, 그의 외손자인 마쓰다이라 다다아키라가 오사카 번주로 임명된다.
다다아키라는 오사카를 계속 부흥시키기 위해 하천 정비를 다시 시작했다. 이때 완성된 운하가 바로 내 앞에 펼쳐진 도톤보리 운하다. 원래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에서 오사카 도시 개발을 위해 열일했던 상인 ‘나리야스 도톤’을 기리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톤보리에 와 보니 이곳이 왜 ‘구이다오레(먹다 망하는) 거리’인 줄 알겠다. 길거리 음식이 천지에 갈렸는데 홀려서 이것저것 사 먹다 보면 금방 몇십만 원은 쓰겠다 싶었다. 나도 와규 비프 구이라는 걸 하나 사먹어 보았다. 하나에 2,000엔 짜리.
도톤보리 시장 거리를 먹다 망하는 거리로 만드는 요인은 ‘날 좀 봐줘’라고 외치는 수많은 간판들이다.
진위는 알 수 없지만 과거 상업도시 오사카의 상징이던 ‘노렌’이 간판으로 진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렌은 일본의 가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입구를 뜻하는 '늘어선 긴 천'을 뜻한다. 음식을 먹고 나온 손님들이 노렌에 손을 닦고 가는 일이 많아 과거에는 노렌이 더러울수록 오래된 맛집으로 여기고 선호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무사와 고위 관료, 귀족들이 많이 살던 간토 지방(에도)에서는 노렌에 글자를 크게 써넣었다. 반면 상인, 농민, 하층 계급, 즉 글자를 못 읽는 사람들이 많이 살던 오사카(간사이 지방)에서는 글자 대신 노렌에 그림이나 문양을 크게 그려넣었다고 한다.
이렇게 무엇을 파는지 직관적으로 크게 새겨놓은 도톤보리의 간판들이야말로 오사카식 ‘노렌’ 전통이 발전한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당신이 신분이 어떻든, 당신이 글자를 알든 모르든 이곳에서는 맛있는 음식을 누릴 수 있다는 오사카의 자부심이다. (단, 먹고 망할 각오만 되어 있다면..)
도톤보리강을 가로지르는 애비스 다리쪽으로 향하니 드디어 오사카의 상징, 글리코상이 보였다. 오사카에 안 와본 사람도 글리코상은 안다. 오사카에 왔어도 이거 안 보면 오사카에 왔다고 자랑할 수 없다. 1935년에 설치된 이후 단연 독보적인 오사카의 상징물이다.
이 간판을 세운 건 ‘에자키 글리코’라는 과자 회사다. 창업주 에자키 리이치가 굴에서 추출한 글리코겐 성분을 카라멜에 넣은 과자를 발명했는데, 이 과자의 킥이 글리코겐이었기에 과자 이름은 '글리코'가 되었다. 에자키 옹은 ‘일류 과자 회사’라는 차별화 전략을 취하기 위해 당시 과자 업체로선 흔치 않게 백화점을 대상으로 한 영업을 시작했고, 오사카 미쓰비시 백화점에 입점하는데 성공한다. 그 뒤로 글리코는 오사카를 대표하는 과자 회사가 되었다.
정신 없이 도톤보리 관광을 마치고 배가 고파 저녁 먹을 식당을 찾으러 나섰다. 라멘으로 스타트를 끊었다면 첫 날 저녁은 마땅히 우동이어여 한다. 자고로 ‘소바는 간토, 우동은 간사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동 집을 찾아 헤메던 중 도톤보리 한가운데서 할머니들이 줄 서 있는 우동집을 발견했다. ‘이마이’라는 우동집이었는데, 삐까뻔쩍한 도톤보리 일대와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외관에 현지인 할머니들의 웨이팅? 이건 못 참는다.
20여분 정도 웨이팅 중이었는데 종업원이 와서 타다미방도 괜찮냐고 물었다. 오히려 좋아. 메뉴판 탐방을 마치고 주변 할머니들이 먹고 있던 냄비우동 하나랑 간사이 우동의 대표 격인 ‘키츠네 우동’을 하나씩 시켰다.
같은 우동이라도 간토 우동과 간사이 우동은 서로 다른 음식이라고 봐야 한다. 간토는 진한 간장 베이스인 반면 간사이는 옅은 간장 베이스로 국물의 깔끔함과 정갈함이 핵심이다. 내가 주문한 ‘키츠네우동’이 대표적인데, ‘키츠네’란 일본어로 여우를 의미한다. 여우털처럼 옅은 갈색빛 국물이 특징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쌀 농사가 어려웠던 간토 지방에는 메밀로 만드는 소바가 발달했다. 반면 밀 농사가 잘 이루어지던 오사카 간사이 지방에선 밀가루로 만든 우동이 발달했다. 오코노미야키, 타코야키 등 오사카에서 밀가루 베이스 음식이 유명한 이유도 같은 이유다.
키츠네 우동의 국물은 정갈하기 그지 없었고 냄비우동도 담백해서 너무 맛있었다. 역시 믿고 먹는 일본 할머니 맛집! (소화가 잘 된다는 뜻이죠?) 일본에서의 첫 나마비루(생맥주)도 한 잔 곁들이며 즐거운 저녁을 마쳤다.
라멘으로 시작해 우동으로 끝나는 보람찬 하루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귀환했다. 숙소 가는 길에 제1차 편의점 털이 실시, 극장판 스파이패밀리와 함께하는 하이볼 파티로 마무리.
내일은 오사카시의 남쪽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무덤을 찾아 떠난다.
▶다음 편 : <세계 3대 무덤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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