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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인문, 사회과학

단재 신채호, 사회진화론적 자강론자에서 급진적 민족주의자로

 


단재 신채호 평전

저자
김삼웅 지음
출판사
시대의창 | 2011-10-2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정치평론가 김상웅의 『단재 신채호 평전』. 망국 시대에 모든 것...
가격비교

2학년 때 썼던 서평과제.

단재 신채호, 사회진화론적 자강론자에서 급진적 민족주의자로

많은 사람들이 가치관의 변화와 혼란을 겪는다. 이러한 변화와 혼란에는 개인적인 내적 요인도 강한 영향을 미치지만 이에 못지않게 시대 상황이라는 외적 요인도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정치적 급변기나 혼란기, 혹은 국제관계가 급격히 변화하는 격동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경우 외적 요인에 의해 자신들의 가치관의 변화와 혼란이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서구 열강과 일본이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고 사대자소의 국제질서가 서구 국제질서로 변화하던 시기에 생존과 변화를 동시에 모색해야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이 겪었던 가치관의 변화와 혼란이 바로 대표적인 예이다. 정치 현실과 국제관계의 변동으로 가치관의 변화를 경험했던 조선의 지식인들 중 단재 신채호에 주목하고자 한다.

단재 신채호는 서른한 살이 되던 1910년 조선 땅을 떠나 해외로 망명하기로 결심한다. 신채호가 신민회 동지들과 해외 망명을 결정한 것은 1910년 초에 들어서면서 시작된 일제의 거침없는 한일합방 추진으로 더 이상 국내에서의 항일 투쟁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1904년 6월 한일협정서 체결로 조선의 재정권과 외교권을 박탈하고 1905년 7월 가쓰라-테프트 밀약과 8월 제2차 영일동맹, 9월 러시아와의 포츠머스 조약 체결로 조선 지배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획득하고 마침내 1905년 11월 초 을사늑약의 체결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면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또한 1907년 7월 24일에는 법률 제정, 중요한 행정상 처분, 고등 관리의 임용은 조선총독부통감의 동의를 받아야하며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대한민국 정부의 관리로 임명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한일신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일제는 신문지법과 보안법을 제정하여 신문에 대한 사전 검열과 집회, 결사를 제한하는 등 반일언론 및 여론에 대한 통제를 시작하였고 1907년 7월 31일 조선군 군대를 해산하였다. 즉 일제는 조선 식민지화의 작업을 진행시켜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에 대한 저항들이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모두 실패였다. 을사늑약에 항거 의병을 일으켰던 최익현, 임병찬은 전라도 순창에서 피체되어 일본 쓰시마 섬으로 유배되었고(1906년 6월 12일) 을사늑약의 원흉 을사오적을 제거하려는 나철을 비롯한 5적 암살단의 시도는 무산되었다.(1907년 3월 23일) 또한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 황제의 헤이그 특사는 평화회의에의 참석을 거부당했으며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 황제는 강제 퇴위 당했다. 또한 통감부는 의병활동을 막기 위해 총포와 화약 단속법을 제정하고(9월 6일) 이에 맞서 13도창의군이 결성되고(12월 6일) 1908년 1월 13도창의군이 서울 진공작전을 전개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어 일제는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이라 불리는 의병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벌였고 그 결과 의병들은 대부분 학살되거나 국경선 밖으로 밀려났다.

일제는 1909년 한일합방에 소극적이던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한 이후 조선 식민지화를 넘어선 한일합방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10년 6월에는 사법권과 경찰권을 강탈하였으며 항일구국언론의 필봉이던 대한매일신보 역시 일제의 탄압을 견디다 못해 1910년 4월 친일파의 손에 넘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1910년 8월 22일 조선통감 데라우치와 이완용 간의 한일합병 조약이 조인되고 8월 29일 순종에 의해 조약이 선포됨으로써 조선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이처럼 1910년에 조선의 국권이 완전히 상실된 경술국치 전반의 한일합방의 상황에서 신채호는 더 이상 국내에서의 실력 양성 운동과 자강운동으로는 주권 회복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해외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통해 일제와 싸우겠다고 결심한다. 즉 1910년 단재 신채호의 해외 망명은 그 당시 한일합방으로 인한 주권 상실이라는 국제관계 상황에 의한 정치적 선택이었다.

한일합방 이전까지 신채호는 서구의 사회진화론을 수용한 자강론자였다. 신채호는 당시 개화 성향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개화사상가인 엄복, 강유위, 양계초 등이 주도한 변법자강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변법자강운동은 영국의 다윈이 주장한 자연도태, 생존경쟁에 기초한 우승열패, 약육강식설을 사회 전반까지 적용한 사회다윈주의와 스펜서, 헉슬리의 사회진화론,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주장한 자연권, 사회계약론, 국민주권사상 등의 영향을 받은 사회사상이었다. 신채호는 이러한 변법자강론을 받아들여 전통 유학자에서 사회진화론적 계몽주의가로 변모한다. 당시 신채호가 가졌던 생각은 한마디로 “약자가 강자를 지배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사회의 법칙이므로 우리 역시 부국강병을 이루어 스스로 강해지고(自强) 이를 통해 국가의 독립과 주권을 확보해야한다. 국가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전 국민을 개화할 수 있도록 계몽해야한다.”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신채호는 이러한 자신의 가치관을 실현하기 위한 많은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신채호는 1898년 성균관에 들어갈 때부터 독립협회에 참여하였다. 독립협회는 민중계몽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로 토론회, 연설회 등의 민중계몽운동을 펼치고 근대적인 자주민권사상과 자주의식을 높이고 개화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독립신문』을 편찬했다. 신채호는 특히 독립협회의 활동인 민중대회 만민공동회에 참여하고 만민공동회가「헌의6조」를 가결하고 정부에 이의 실천을 요구하는 투쟁 당시 연설을 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조선이 일본에게 진 외채를 갚고 이를 통해 나라의 주권을 지키자는 목적으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여러 차례 『대한매일신보』에 국채보상운동과 관한 논설을 쓰고 스스로 성금을 내기도 했다. 그는 애국계몽운동의 방법으로 시행되던 학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기호홍학회에 참여한 것이다. 기호홍학회는 민족자강을 위한 교육계몽운동을 목적으로 설립된 애국계몽단체였다.

신채호는 언론가로서도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황성신문』 논설가로서 애국계몽을 위한 글을 계속 썼으며 황성신문 활동기간동안 자기혁신을 꾀한다는 의미로 단발을 결행하고 향리에서는 한자무용론을 주장할 만큼 신교육, 신사상에 열중하였다. 『황성신문』 폐간 이후에는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약하였다. 이 기간 동안 송건호에 의하면 신채호는 열강이 경쟁하는 한반도의 국제적 환경 속에서 자립, 자강의 독립국가 건설의 방도를 모색하였으며 많은 그의 논설과 논문 속에서 그는 독립국가 건설의 방도를 외경력과 자강이라고 주장했다. 즉 힘이 지배하는 강자생존의 국제질서 속에서 구국, 애국의 방책은 오로지 자강책, 다시 말해 근대적 국가주권의 확립과 부국강병의 국력 배경이었던 것이다. 또한 신채호는 1908년 1월부터 휴간중이던 순국문 잡지 『가정잡지』를 속간하여 여성들을 계몽하고자 하였으며 국력배양을 위한 교육, 산업의 발달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계몽운동단체 대한협회의 기관지 『대한협회월보』의 필진으로 참여하여 애국사상과 국권회복을 주창하는 논설을 실었다.

『대한매일신보』에서 주필로 활약하던 4년여 간 신채호는 조선사에 관한 많은 글을 썼다. 그는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을 국난을 극복한 한국의 자강주의적 영웅 3인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전기를 저술함으로써 민중들로 하여금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국가독립에 대한 의지와 자강을 통해 국난을 극복해야한다는 메시지를 주고자 하였다. 『이태리 건국 삼걸전』등의 해외 역사 서적을 번역한 것도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심을 배양하고자 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이처럼 신채호는 1910년 한일합방 이전까지 사회진화론을 주창하는 자강론자였다. 신채호가 생각하기에 당시 조선이 처해있던 국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강하여 국가의 주권을 회복해야한다. 여기서 자강이란 교육을 진흥하고 산업을 발전시켜 서구 제국주의 열강과 일본의 침탈에 수탈당하지 않을 정도의 부국강병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강을 위해서는 전 국민에게 자강의 필요성과 서구 근대의 민권사상을 퍼트리는 민중계몽운동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한다.

이러한 신채호의 당시 생각은 “을사늑약”에 대한 신채호의 평가에 잘 드러나 있다. 신채호가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1905년 12월 28일『대한매일신보』논설 시일야우방성대곡(是日也又放聲大哭)은 아래와 같다.

한.일의 새로운 조약이 체결되던 날에 한국 서울 안팎의 일반 시민들은 큰 소리로 통곡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민영환.조병세 두 충정공이 순국하는 날에 남녀 노유가 일제히 통곡하여 천지가 죽은 것처럼 비통해하였고, 또한 주일 공사가 철수하여 돌아온 날에 이 나라의 관립, 사립 학도 4백여 명이 정차장에 쫓아 나와서 전별할 때에 다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으니, (......중략) 대체로 오늘날 나라의 형편이 이와 같이 되었으니, 대한의 백성들은 삼한 갑족의 좋은 가문이 많은 것도 노예가 되기는 마찬가지요. 일품에 해당하는 대신의 훌륭한 자격도 붙들려가기를 당하는 것은 한 가지요, 드높은 담장의 훌륭한 집도 남의 사는 집이 될 것이요, 상권도 남의 상권이요, 공업도 남의 공업이요, 화물 수송권도 다른 사람의 것이니, 대한의 백성들은 어떠한 자산 활동을 할 것인가? 앞으로 하와이의 이민과 같이 미국 영토에 붙어살까, 블라디보스토크의 유민과 같이 러시아 땅에 예속할까. 천지간에 나라 없는 백성은 어디에 살든지 노예는 고사하고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오. 백 번을 생각하여도 한국 동포를 죽음에서 구하는 방법은 학문 이외에 다른 방책은 없으니,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바로 오늘부터 외국의 학문에도 힘써 보시오. 골패. 화투가 왠일이오. 신문을 보고, 독서하시오. 저 기생과 축첩에 혹하여 빠지지 말고,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시오. 관직을 사냥하려 굴을 뚫지 말고, 염치와 도리를 차려 보시오. 밭을 구하려 관사에 방문하지 말고 남아의 사업을 경영하여 보시오. 재산으로 자손에게 물려주지 말고 학업으로 자손을 길러 보시오. 산림에 은거하여 이름을 낚지 말고, 재상을 그만둔 편안함을 기르지 마시오. 포로의 치욕을 당하게 생겼소.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아서 말없이 눈을 감는 것이 소용없소. 운동과 연설이 긴요한 것이오. 심성을 이야기하고, 이기를 논하는 것이 소용없소. 농업과 공업, 상업이 절실하게 급한 것이오. 대체로 인생의 학문이 열려 나가면 지혜가 발달하고 사업이 왕성하게 일어나 하늘에서 받은 자유권을 회복할 기회가 있을 것이오. 타인의 종살이에서 벗어날 방침이 있을 것이니, 나쁜 운수가 가고 좋은 운이 돌아오고 고통이 다하면 감미로운 것이오며, 오늘의 슬퍼서 흐느끼는 모양이 변하여 다음날 기뻐 웃으며 즐겨 하는 모양이 되기도 필연적인 이치니, 대한의 제군들은 생각하여 근면하도록 하시오.

먼저 신채호는 논설에서 을사늑약으로 인해 조선의 국권이 침탈당했으며 이러한 국가위기 속에서 모든 국민들은 불행한 삶을 겪게 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을사늑약으로 인해 닥친 국난 극복을 위한 방안으로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신채호가 이야기하는 면학(勉學)이란 논설에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듯이 “외국 학문에 힘쓸 것”, “신문 읽기와 독서”, “자기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 “운동과 연설”, “농업, 공업, 상업” 등이다. 이러한 인생의 학문이 열려 나가면 사업이 왕성하게 일어나고 천부인권인 자유권을 회복할 것이며 주권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신채호는 을사늑약을 자강하지 못한 조선이 자강을 이룬 일본에 의해 국권이 침탈당한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자강”해야 하며, 이러한 사실을 일반 민중들에게 계몽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채호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 즉 “자강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여야한다”는 주장은 조선이 완전히 망한 1910년 한일합방 이후로 변화한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민족해방을 이루려는 급진적 민족주의자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신채호가 “급진적” 민족주의자인 이유는 그가 민족해방을 이루기 위한 방법론으로 철저한 “무장투쟁”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신채호가 무장투쟁만이 민족해방의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는 사실은 그가 북경에 체류하던 시기 탈고한 중편소설『꿈하늘夢天』에 잘 드러나 있다. 『꿈하늘夢天』에는 국적을 가두는 일곱 가지 지옥과 망국노를 가두는 열두 가지 지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데, 제5장에서 외교를 통해서 독립을 얻어야한다는 외교론을 “댕댕이지옥”이라고, 독립전쟁이 아닌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을 쟁취해야한다는 준비론을 “어둠지옥”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은 당시 신채호의 무장투쟁론과 더불어 독립운동의 노선으로 논쟁의 대상이 되어오던 주장들이었다. 즉 신채호는 자신이 주장하는 무장투쟁론을 제외한 외교론과 준비론은 독립운동을 쟁취하기 위한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신채호의 생각은 그가 작성한 선언서들에도 잘 드러나 있다. 1912년 2월 만주 동삼성의 대한독립의군부가 중심이 되어 발표한「대한독립선언서」, 일명「무오독립선언서」에 무장투쟁론에 관한 내용이 나와 신채호가 선언서 작성에 깊이 관여하였을 것이란 추측이 제기되고 있다. 선언서의 맨 마지막 부분에는 해외 망명 지도자급 인사 대부분이 참여하여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전취하자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일제 식민지 시대 대표적인 항일선언문으로 꼽히는「조선혁명선언서」에도 무장투쟁의 중요성이 역설되어 있다.「조선혁명선언서」는 1920년대 초반 일제에 대한 폭렬투쟁을 이끌고 있던 의열단의 단장 김원봉이 무장투쟁에 관한 선전활동을 위한 선언서를 무장투쟁노선의 선배격인 신채호에게 부탁하면서 만들어졌다. 「조선혁명선언서」는 1장에서 일본을 조선의 주권과 생존을 박탈해간 강도로 규정하고 이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이 정당한 수단임을 천명하였다. 또한 2장에서는 무장투쟁론으로 대표되는 일본에 대한 강경한 독립운동을 쇠락하게 만드는 자치론자, 내정독립론자, 참정권론자, 문화주의론자들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3장에서는 임시정부로 대표되는 외교론, 실력양성론, 준비론 등의 독립운동 방법론에 대해 민중의 의기를 없애는 일들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4장에서는 자신이 앞에서 비판한 것 말고 민중해방을 위해서는 민중이 직접 폭력적 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는 ‘민중직접혁명론’을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1910년 조선을 떠난 신채호는 계몽운동을 중심으로 한 자강을 통한 주권회복에서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급진적 민족주로의 급격한 가치관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급격한 가치관의 변화는 1910년 한일합방이라는 조선의 현실에 기인한 바가 크다.

1910년 한일합방 이전까지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존재했다. 국가로서 조선이 존재했기 때문에 “주권”을 회복할 가능성도 있었으며 이를 위해 계몽을 통해 전 국민이 자각하여 국가의 힘을 기르자는 주장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이란 국가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회복할 주권도, 이러한 주권을 가져야할 국가 자체가 없어져버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더 이상 “국가” 개념으로 자주독립을 주장할 수 없어진다. 신채호가 국가독립을 주장할 경우 그 국가는 조선을 합병한 “일본”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인들의 자주 독립을 위해서는 이제 “국권 회복”이 아니라 “민족해방”을 주장해야하는 것이다. 더불어 한일합방의 상황에서 엄청나리만큼 심해진 일제의 탄압 때문에 신채호는 계몽운동보다 직접적 무장투쟁을 선택하게 되었다. 계몽운동의 필수요건인 학회 활동, 언론 활동, 사회운동 자체가 일제의 탄압 하에 사실상 불가능해짐에 따라 신채호가 생각하기에 더 이상 무장투쟁의 방법 밖에 선택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또한 한일합방은 신채호에게 사회진화론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자강론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사회 진화론적 자강론은 자강한 나라, 즉 일본의 자강하지 못한 나라, 조선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해주는 역할을 한다. 1910년의 한일합방 역시 자강론에 의하면 강도 일본의 침략적 행위가 아니라 “약육강식의 국제질서에서의 당연한 결과”가 되어버린다. 자강론을 주장하던 이들 중 신채호처럼 민족주의자의 길을 걷지 않은 지식인들이 일본의 침략을 당연시하며 친일, 혹은 대일온건론자로 돌아선 이유 역시 이러한 자강론이 지닌 논리적 한계점 때문이다.

신채호의 변화한 가치관은 임시정부에서 다른 독립운동에 관한 가치관들과 충돌한다. 임시정부 수립 이후 임정 지도부 사이에서는 여러 가지 독립운동의 방법론이 제기되었다. 먼저 초기 내무총장, 국무총리를 겸임하던 안창호가 주장하던 준비론이있다. 준비론자들은 독립전쟁의 시기를 먼 장래로 설정하고 지금은 민심 통일과 지덕 준비, 국민개조에 중점을 둬야한다고 주장했으며 이 준비론은 실력양성론으로 이어졌다.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조선의 위임통치를 청원하기도 했던 이승만은 외교론을 주장했다. 외교론은 현재 국제연합이 조직되어있고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의 원리에 따라 약소국이 독립할 수 있으니 위임통치를 포함한 외교를 통해 독립을 이루자는 주장이다. 반면 이들과는 달리 이동휘, 박용만은 군대 모집과 군사학교 설립을 바탕으로 일본과 전쟁을 벌이자는 무장투쟁론을 주장했다. 신채호 역시 무장투쟁론의 입장이었다. 이러한 임정 지도부의 입장 차이는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대립하는 양상으로까지 진행되었는데, 창조파는 외교론, 실력양성론을 내세우는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자는 입장이었고 개조파는 이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이승만, 안창호 등 임정 지도부들이 대부분 이에 동조하였다.

보다 구체적으로 1919년 8월 28일 제6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총리제를 대통령제로 하여 이승만을 추대하자는 주장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는 모습에서 신채호의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급진적 민족주의 성향이 잘 드러나 있다. 먼저 신채호가 이승만의 임시정부 대통령 추대를 반대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위임통치를 주장함으로써 민족의 자주독립을 방해하고 아직 생기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버린 매국 행위를 저질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체제가 구축될 경우 임정의 지도 노선이 외교론과 실력양성론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 때문이었다. 신채호는 임시정부 지도부가 현실에 안주하면서 3.1 봉기로 무장투쟁을 통해 일제를 추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에 안타까웠으며 이 때문에 이승만의 임시정부 대통령 추대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후 그는 임시정부와 결별하고『신대한』을 창간하여 임시정부의 외교론과 실력양성론을 비판하는 언론투쟁을 전개한다.

신채호가 임시정부에서의 이승만의 추대를 반대하고 더 나아가 임시정부와 결별하는 모습은 을사늑약 당시의 신채호의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시일야우방성대곡(是日也又放聲大哭)에 의하면 신채호는 을사늑약 이후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고 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해 학문에 힘쓰고 교육을 진흥하고 산업을 발달시켜야한다고 주장한다. 즉 임시정부의 준비론, 실력양성론의 주장과 그의 생각이 일치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1910년 한일합방 전까지 임시정부 때의 실력양성론자들인 안창호 등의 신민회 회원들과 함께 민중의 계몽과 실력양성을 위한 활동들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계몽과 실력양성이 아닌 무장투쟁만이 자주독립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생각 변화로 인해 무장투쟁이 아닌 외교론, 실력양성론 중심으로 임시정부 노선이 굳어지는 계기가 될 이승만의 대통령 추대에 강력히 반대하였던 것이다.

신채호는 당대를 살았던 다른 지식인들에 비해 많은 가치관의 변화를 겪었다. 정통유학자에서 사회진화론을 수용하는 개화. 자강론자로 변화했고 한일합방 이후에는 무장투쟁을 강조하는 급진적 민족주의자로, 또 후에는 민중의 직접적 폭력투쟁을 주장하는 아나키스트로 변모한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 중에서도 신채호에게 있어, 또 당대 지식인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가장 유의미한 변화는 “자강론자에서 민족주의자”로서의 변화였다.

먼저 비록 그가 아나키즘의 수용으로 국수주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할지라도 가치관에 있어 큰 변화는 없었다. 아나키즘을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고 정해진 권력이 없는 상태의 무정부주의로 수용했다기보다 민족해방의 수단으로서 이용한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투쟁대상이 날로 강해지는 상황에서 무장투쟁, 그 중에서도 몇몇 지도자들에 의한 무장투쟁이 아닌 민중 전체의 무장투쟁이 더욱 절실해지는 상황에서 폭력혁명사상인 아나키즘을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무장투쟁의 주장을 더욱 견고히 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지배계급에 대한 저항과 혁명을 주장하는 아나키즘을 이용해 당시 지배계급인 일제에 대한 혁명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신채호는 아나키즘을 이용해 급진적 민족주의의 무장투쟁 방식을 정당화하고자 한 근본적인 “민족주의자”였다.

전통유학자에서 자강론자로서의 신채호의 변모는 신채호 일생에 있어서는 중요한 변화이지만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겪었다는 점에서 독특한 현상은 아니었다. 반면에 자강론자에서 급진적 민족주의자로서의 변모는 신채호를 비롯한 몇 몇 지식인들에게서만 나타난 독특한 변화였다. 대부분의 자강론자들은 자신의 논리를 발전시켜 무장투쟁 대신 여전히 계몽운동을 강조하는 준비론, 실력양성론으로 발전했고 그들 중 일부는 결국 일제와 타협하여 친일파가 되거나 자치론자, 내정독립론자 등 일제의 지배를 수용하게 되었다. 신채호의 자강론자에서 민족주의자로서의 변모는 대부분의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변화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단재 신채호 평전』의 저자 김삼웅 역시 이러한 신채호의 독특성에 근거하여 신채호를 더 나은 자주독립의 길을 위해 끈임 없이 고심하여 자신의 가치관을 바꾼 순결한 민족주의자로 평가하고 있다.

신채호가 자신의 가치관을 변화한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이 목표한 바인 “자주독립”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자신이 믿고 있는 이념과 가치관에 경도되어 시대가 바뀌고 자신이 믿고 있는 이념과 가치관이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루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현재 한국이 처한 국제현실은 당시 조선이 처했던 국제현실 못지않게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이러한 변환기에서 많은 지식인들은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신채호가 택했던 가치관의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