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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인문, 사회과학

장준하 : 민족주의자의 길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저자
박경수 지음
출판사
돌베개 | 2003-08-05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이 책은 일제시대에 20대의 젊은 나이로 광복군에 참여했고,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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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때 썼던 레포트

1. 들어가며

개인의 행동이 ‘정치적’ 결정이라 불릴 수 있을까? 흔히 우리는 정치를 집단의 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얼핏 개인의 행동이 정치성을 띨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할 지 모른다. 그러나 개인 행동의 정치성 여부를 따지기 위해선 ‘현상’보다 ‘기억’에 주목해야 한다. 윤복희도 미니스커트를 입었고 프라하의 봄 때 체코의 여인들도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현상’은 똑같다. 그러나 두 사건은 다르게 ‘기억’된다. 이 기억의 차이에서 개인 행동의 정치성 여부가 결정된다. 나는 구체적 인물을 통해 개인 행동이 어떻게 정치적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지 살펴보고자 한다. 바로 죽음과도 타협하지 않았다고 평가 받는 순수주의자, 장준하를 통해서다.

2. 본론

장준하, 그의 ‘정치적’ 결정

장준하가 동경에 유학생으로 있을 때, 2차 세계대전을 벌이던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조선인 학생들까지 징집(徵集)하기 시작한다. 그 당시 장준하는 징집을 거부할 만한 상황이 되지 못했다. 목사였던 장준하의 아버지가 일본의 신사 참배 요구를 거부했기 때문에 장준하의 집안은 일본군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장준하가 징집을 거부할 경우 조선에 있는 장준하의 가족이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장준하는 일단 일본의 징집을 받아들이고, 나중에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1944년 장준하는 김준엽을 비롯한 조선인 4명과 함께 일본군을 탈출한다. 장준하의 최종 목적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重慶)이었는 데, 그가 일본군 배치를 받은 쉬조우(徐州)와는 약 6천리가 떨어진 곳이었다. 장준하는 우선 일본군과 대적 중인 모택동 팔로 부대가 머무는 곳을 1차 목적지로 설정하고 길을 떠나는 데 중간에 중국 장개석 군 휘하 유격부대인 한치융 부대를 만나 그곳에서 활동하게 된다. 그러던 중 한치융 부대가 같은 중국군의 습격을 받게 되자 장준하는 그곳을 빠져 나와 임시정부로 향한다. 장준하는 12월 모든 것이 얼어버리는 추위를 겪으며, 너무 높아 제비도 넘지 못한다는 파촉령(巴蜀嶺)을 넘어 탈출 6개월 만에 충칭에 도달하게 된다. 그곳에서 광복군 생활을 하면서 장준하는 종교적 신념과 민족의 현실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게 된다. 광복군의 식량 사정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밭에 심어놓은 고구마를 훔쳐먹어야만 했는데, 기독교 집안에 살아온 그의 종교적 신념과 비참한 민족의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살아남아야 한다는 두 가지 생각 사이에서 갈등을 겪은 것이다. 고구마를 훔칠 때 장준하는 “내가 잠시 장준하가 아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민족의 현실 앞에 종교적 신념을 뛰어넘게 된 것이다.

또한 장준하는 연합군의 한반도 침투와 연계된 광복군 첩보활동 활동에 자원한다. 경인지구에 침투하게 될 첩보부대는 일본군에게 발각될 경우 게릴라전 활동을 해야 될 만큼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비록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는 바람에 이 임무는 이루어지지 못하지만, 그는 민족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준하는 민족을 위해 6천리 험한 길을 헤치고, 자신의 종교적 신념마저도 초월했으며 목숨마저 던지려고 했다. 1940년대 중반 장준하는 개인적인 이유로 광복군 활동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광복군 활동은 중대한 ‘정치적’ 결정이었다.

장준하의 광복군 활동이 왜 정치적 결정인가?

1940년대 중반 장준하의 광복군 활동을 ‘정치적’ 결정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정치의 갈등적 측면과 관련된다. 정치적이라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장준하의 정치적 결정을 분석할 때 20세기 초 독일의 공법학자인 칼 쉬미트(1888-1985)의 해석을 이용하고자 한다. 쉬미트는 정치의 핵심적 기능이 我方(아방: 友)과 他方(타방: 敵)을 구별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또한 쉬미트는 정치가 我方 체제의 존속을 위해 他方과 갈등하고 대립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我方)’라고 하는 집합체는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와 ‘적’을 구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정체성의 확립이다. 내가 어느 집단, 범주에 속하는 지에 대해 알아야만 ‘우리’와 ‘적’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장준하는 우선 자신의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으로 가려 했다는 것은 자신이 식민지 조국의 일원임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그는 자신이 조선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민족주의는 일본군 탈출 과정과 광복군 활동을 통해 더욱 성장한다. 장준하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그가 파촉령을 넘으면서 했던 생각은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기독교를 믿고 있던 그는 비참한 민족의 현실을 위해서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장준하가 장준하가 아니길’ 기도했다. 살아남기 위해 고구마를 훔치던 그 순간, 장준하는 ‘종교적 신념을 지닌 개인 장준하’가 아니라 ‘민족을 위해 존재하는 장준하’였다. 그의 삶은 장준하 개인으로서의 삶이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광복군 활동은 ‘우리 민족’을 위해 ‘적 일본’과 맞선 정치적 결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 결정이 장준하 개인사에 미친 영향은?

장준하의 정치적 결정은 한 마디로 장준하가 민족주의자의 길을 걸어갈 것을 결정했음을 의미한다. 20대에 민족주의를 뼈 속으로 체험한 그는 그 이후 철저한 민족주의자가 된다. 1961년 2월 27일, 장준하는 제2공화국 정부 아래 실시된 국토건설 사업의 총책임자 역할인 국토건설본부 기획부장을 맡는다. 이 사업을 주도하면서 장준하는 학생 2000명을 국토건설본부 위원으로 임명하고 이들에게 국토개발운동의 임무를 맡긴다. 이는 4.19의 주체였던 학생들에게 국토건설이라는 임무를 맡김으로써 학생혁명을 지식인혁명으로 승화하고, 이를 국가발전의 초석으로 삼으려는 계획이었다. 장준하는 “이제 우리 민족이 살 길은 경제발전”뿐이라며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민족을 위한 경제발전을 이룩하자”고 주장했다. 민족의 경제발전 말고도 그는 ‘민족의 진정한 독립’을 주장했다. 해방 후 신탁통치로 좌우가 대립하고 결국 신탁통치로 인해 민족의 독립이 무산되자 그는 절망하고, 이 절망은 당시 ‘사상계’에 잘 드러나있다. 또한 그는 박정희 정권 때 일본, 미국에게 경제원조를 받기 위해 이루어진 한일 수교와 월남전 파병에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이유는 “그것이 대한민국을 일본과 미국에 정치경제적으로 종속되게 만들어 우리 민족의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한국전쟁 기간 도중 어머니와 딸을 공산주의자들에게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들과의 ‘통일’을 주장한다. 이는 통일이 민족의 번영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민족이 처한 현실 앞에서 반공주의라는 자신의 가치관마저 바꾼 것이다. 이처럼 광복군 활동을 통해 민족주의자의 길을 걷게 된 장준하의 개인사는 민족주의자로서의 장준하의 삶의 모습을 끈임없이 보여준다.

정치적 결정에 대한 평가

한평생 자신보다 민족을 더 우선시한 그의 삶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물론 개인의 영락을 중요시하는 지금 “민족을 위해 개인을 버려라” 라고 주장하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주권 침탈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민족을 위해 일본군에서 탈출하고 광복군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장준하의 정치적 결정은 그 어떠한 다른 정치적 결정보다 중요하고 또 존경 받아 마땅한 것이다. 오로지 민족의 독립을 위해 6천리 길을 걷고, 민족의 제단 앞에 기꺼이 자신을 바치려 했던 장준하의 정치적 결정은 오늘날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3. 나오며

장준하는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되는 가? ‘민족주의자’로 기억된다. 그가 민족을 위해 일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한, 그의 삶은 개인 장준하로서의 삶 그 이상이다. ‘적’에 맞서서 ‘우리’를 지키려 했던 그는 철저하게 ‘정치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