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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문학 외

중국 농민들의 믿음과 가치관, 대지(the good earth)

 


대지

저자
펄 S.벅 지음
출판사
문예출판사 | 2003-05-0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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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지>(그리고 소설 <대지>)의 주인공은 농민 왕룽이다. <대지>는 가난한 농민 왕룽이 부유한 농민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왕룽의 ‘성장’, 혹은 계급/신분 상승을 통해 소설과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첫 째, 왕룽의 신분 상승을 통해 <대지>는 19세기 초 중국의 가난한 농민이 겪는 현실, 그리고 부유한 농민이 겪는 현실 둘 모두를 보여줄 수 있다. 둘 째, 왕룽의 신분상승에 영향을 미친 시대적인 변화를 보여줄 수 있다.

 

왕룽이 대표하고 있는 중국 농민은 어떤 존재인가? 그는 19세기 초를 살아가던 중국의 전형적인 농민이다. 대대로 물려받은 농토를 통해 열심히 일하지만 좀처럼 가난을 벗어나기 힘든 것이 현실인 빈농이다. 결혼하는 날 몸을 씻으려고 물을 쓰는데도 아버지에게 아껴 쓰라는 충고를 받을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강요받는 빈농이다.

 

영화 속에 묘사된 왕룽과 그의 아버지, 아내 올란과 그들을 둘러싼 농촌 공동체의 모습은 당대 중국 농민들이 어떤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농민은 ‘보수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이들이다. 자연의 흐름에 맞춰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해가 뜨면 일어나 해가 지기 전까지 열심히 일하고, 해가 지면 자야 한다. 풍작이 들면 자연-신의 은혜에 감사하며 넉넉하게 살 수 있지만 흉작이 들면 꼼짝 없이 굶어야 한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소설 <대지>에는 이러한 농민의 사고방식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왕룽이 기근 때문에 남쪽으로 피난 가던 도중, 남쪽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배고픈 농민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우리가 가난한 건 자본가와 부자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왕룽은 우리가 가난한 이유는 ‘비가 오지 않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자본가와 부자는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냐고 묻는다.

 

결혼이나 출산도 모두 ‘먹고 사는’ 문제, ‘일’과 연관되어 사고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농민이다. 예쁜 부인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왕룽에게 그의 아버지는 예쁜 게 무슨 쓸모가 있냐며 호통을 친다. 하루하루를 먹고 살기 힘든 농민들에게 예쁜 안주인은 사치다. 일 잘하는 여인이 최고의 신붓감이다. 부잣집 종 출신인 올란은 이런 의미에서 최고의 아내다. 왕룽이 처음 올란을 만났던 날 왕룽은 복숭아를 먹고 씨를 땅에 버린다. 그러자 올란은 얼른 달려가 씨를 주워온다. 이 씨앗이 나무로 자라날 것이라면서 말이다. 씨앗 하나도 그냥 버리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농민적인 생활에 빠삭하다. 결혼 날 친척과 친구들을 모아놓고 열린 잔치에서도 올란은 뛰어난 요리 실력을 발휘한다. 친척과 친구들은 좋은 아내를 얻었다고 칭찬하고, 왕룽도 내심 자랑스러워한다. 농민에게 결혼은 같이 일할 사람을 데려오는 문제이며, 따라서 최고의 아내는 일을 잘하는 여자이다.

 

출산 역시 ‘일’과 관련되어 축복할 만한 일로 여겨진다. 올란이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자 왕룽은 물론 온 가족과 친구들이 축복해준다. 그 이유는 아이가 곧 ‘노동력’이기 때문이다, 딸보다 아들을 더 반기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딸은 시집가면 남이지만(노동력을 뺏기는 것)이지만, 아들은 새로운 노동력(아내/며느리)을 데려올 수 있다.

 

왕룽은 농민으로서의 사고방식과 정체성을 고수하며 땅을 사들이는 데 집착하고, 이런 노력과 시대적 상황이 겹치면서 그는 부유한 농민으로 성장한다. 그는 부농이 되자 이전과는 다른 생활을 한다. 아내에게 부자의 안주인다운 옷차림을 갖추라고 말하고, 자식들로 하여금 고등 교육을 받도록 한다. 첩을 두기도 한다. 직접 농사를 짓는 대신 머슴을 부려 거대한 농토를 경작하게 한다.

 

그가 부농, 부유한 대지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열심히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대적 상황이 큰 변수로 작용했다. 왕룽과 그의 가족들이 남방으로 피난을 갔을 때 그곳에서는 혁명이 발생했다. 신해혁명이다. 공화주의자들이 봉건적인 중국 왕조를 타도하기 위해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이자 ‘자본주의’ 혁명이었다. 이 혁명이 ‘자본주의’ 혁명이었다는 점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군인의 말을 통해 추론해 볼 수 있다. 혁명이 일어나고 혼란이 벌어진 와중에 피난 왔던 농민들이 부잣집을 약탈한다. 그러나 혁명군은 약탈한 농민들을 불러 그 자리에서 총살한다. 몇 명을 총살한 후 혁명군의 한 군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공화주의자이지, 도둑이 아니다!” 사유재산을 소중히 여겨야 하며, 남의 재산을 갈취하는 행위는 도둑질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총살을 무릅쓴 것이다. 자본주의 질서의 가장 중요한 원칙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알려주는 가장 강력한 조치가 아니었을까?

 

운이 좋았던 올란은 보석을 훔치고도 총살당하지 않았고, 그녀가 훔친 보석을 기반으로 왕룽 가(家)는 부유한 대지주로 급격히 성장한다. 혁명 시기 운이 좋았던 덕에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룽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메뚜기 떼가 왕룽의 땅을 덮친 것이다. 한 해 농사를 모조리 망쳐버릴 대 위기였다. 그러나 변화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왕룽은 위기를 극복한다. 농 기술에 대해 공부한 그의 첫째 아들이 메뚜기 떼에 맞서 싸울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자연의 위협에 그냥 주저앉거나 신에게 가호를 빌고만 있지 않았다. 힘을 합쳐 메뚜기 떼를 물리쳤고, 첫째 아들이 배워 온 선진 ‘기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싸움 과정에서 왕룽은 ‘농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한다.

 

왕룽이 빈농에서 부농으로 신분상승을 이루긴 했지만, 그에겐 변하지 않는 신념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땅에 대한 믿음이다. 부잣집이 땅을 판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바로 땅을 사들이고, 돈을 버는 족족 땅을 넓혀간다. 가뭄이 닥치고 기근이 와도, 남방으로 피난을 갈지언정 땅을 팔지는 않는다. 올란이 보석을 훔쳐왔을 때도 그는 보석을 팔아 땅을 사야겠다고 말한다. “농사꾼에게 보석이 무슨 필요가 있어?” 필요한 것은 땅이다. 왕룽이 생각하기에 땅은 정직하다. 노력한 만큼 대가를 준다. 인간이 어디로 가든, 땅은 그 자리에 있다. 농민이 믿을 수 있는 것은 대지(大地) 뿐이다. 같은 의미에서 영화 <대지>의 마지막 장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왕룽은 올란이 죽고 나서 자식들에게 “나에게 대지는 너희들의 어머니뿐이다.”라고 말한다. 왕룽이 어디에 있든(첩을 두건 가난한 농민이든 부유한 대지주이든) 항상 같은 자리에서 자신을 지지해 준 이는 올란 뿐이었다는 의미심장한 말이다.

 

이런 땅에 대한 신념은 자본주의가 발달한 서구인들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신념일지 모른다. 서구인들에게 땅은 ‘공장을 세워할 장소’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고층 건물을 세워서 이윤을 창출해야 할, 더 많은 성장과 부를 위한 자본이다. 석유 같은 돈 되는 자원이 나오는 땅만이 가치가 있다. 그러나 중국인들에게, 특히 농민들에게 땅은 단순한 자원이나 자본이 아니다. 농민들이 믿고 따르는 대상이다.

 

<대지>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초, 서구 열강들은 중국을 침략하고, 이권을 나눠먹고 있었다. 동시에 중국 내에서 농민들은 압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피폐한 현실에서 농민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땅’ 뿐이었을지 모른다.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주는 정직한 땅 말이다. 인간이 어떻게 변하든 그 자리에 묵묵히 변하지 않고 자리하는 땅 말이다. 중국에 갔던 서구인 펄 벅이 중국을 주제로 한 소설을 쓰면서 유난히 ‘땅(대지)’에 주목한 이유는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는 ‘대지’야말로 서구인들과는 다른 중국인들만이 가진, 중국의 평범한 농민들만이 가진 고유한 가치관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