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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 /단상

우리 안의 이명박, 우리 밖의 이명박

2004년 나는 분노에 휩싸여 촛불을 들었다. 그게 나의 최초의 정치참여였다. 그리고 3년 뒤 대학에 입학했을 때 나의 분노는 절망으로 바뀌었다. 어떤 정치활동을 할까 고민하는 내 앞에 펼쳐진 학점과 스펙 쌓기 그리고 토익. 친구들은 죽어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짓을 하면서 '이게 철든 거라'고 스스로를 사회와 동일시하고 있었다. 억지로 하면서 쿨한 척 온갖 냉소주의를 뿜어대고 있었다. 그래서 그 때 생각했다. "아, 20대는 죽었다!"

그러던 와중 닥친 이명박 대통령 당선과 "88만원 세대론"은 나를 "20대 개새끼론"의 주창자로 만들었다. "촛불집회를 봐, 초딩과 중딩도 고딩도, 아저씨들도 아줌마들도 아가씨들도 있는데 대학생은 없어!" "이명박을 뽑았는데, 대운하는 안하겠죠? 라고 말하는 병신들." 그러던 중 나는 하나의 글을 통해 나를 지배하는 "20대 개새끼론"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바로 20대 개새끼론보다 한발 더 나아간 "20대 포기론"이다. (http://press.cnu.ac.kr/news/news/view/id=5512)

우파가 수구꼴통을 보고 느끼는 혐오감이란, 좌파가 진보꼴통을 보고 느끼는 역겨움이란 이 글을 읽고 느낀 나의 감정과 비슷할 것이다. 이 글은 386이 무엇인가 이루어냈다는 자뻑으로 가득 차 있다. 20대는 개새끼들이다. 정치참여 안한다. 집회 참여도 안하고 데모도 안한다. 80년대 안그랬잖아! 에휴, 이제 늦었어. 난 니네 포기하련다.

386의 자뻑은 '80년대 향수병'과도 같은 맥락에 있다. 김용민에 의하면, 이명박 정부에 분노하는 이들은 "80년대 대학생들이 2009년에 부활해 있었다면."이라며 통분을 터트렸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80년대 향수병의 전형이다. 80년대 대학생들이 2009년에 부활해있었다면? 정신없이 토익공부했겠지, 뭐. 똑같이.

그 위대하고도 정치참여 정신을 가지고, 진정한 대학생이던 80년대의 그 대학생들이 지금 당신들이다. 386이라 불리는 그 위대한 이름은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계기로 무려 여의도 정치에 들어섰다. 그래서 그들이 한 짓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발동. 그것의 선두에 바로 386이 있었다. 80년대 운동하던 이들이 정치권력을 잡아 김대중. 노무현과 함께 시장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밀어붙였다.

책임은 분명히 하자. 대학생들이 "왜" 정치에 참여안하고, 토익 공부나 하고 취업에 신경쓰고, 학점에 목숨걸게 되었을까? 이 자기계발의 주체를 누가 양산해냈는가? 재야에서 여의도로 진입하여, 앞장서서 대학생들을 무한 경쟁으로 밀어넣은 자들이 누군데? 김용민은 지금 아주 심각한 자뻑에 빠져 있다. 우리 땐 데모 엄청해서, 결국 87년 민주주의 이뤄냈어. 우리 스스로를 희생해서 정치를 위해 한 목숨 걸었다고!

386들이 싸운 대상은 바로 바깥의 적이었다. 독재세력. 우리를 탄압하는, 여의도에 죽치는 저 대머리와 군부 똘마니들. 국민 대다수. '인민'은 우리를 저 괴롭히는 독재자들을 몰아내야 한다. 그래서 화염병 던지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었다. 마찬가지로 386의 자뻑에 빠져 있는 우석훈도 "88만원 세대"에서 이렇게 말한다. 20대여, 바리케이드를 들고 짱돌을 들어라! 그렇다면 과연 누구에게, 이명박에게? 그래서 이명박이 물러나면, 또 그 사람에게? 또 그 다음에게? 또 그 다음에게?

지금의 대학생들이 직면하고 있는 적은 386들이 20년 전에 직면했던, 총칼 들고 맞썰 눈에 보이는 적들이 아니다. 우리의 적은 어쩌면 우리 그 자신이다. 먹고 살기 바빠 정치에 관심 없는 우리들, '경제' 성장이 아니라 내 부동산, 내 주식에만 관심있는 우리들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죽여야 한다. 이명박은 어딘가에서 한국인들 탄압하려고 나타난 악의 세력이 아니다. 이명박은 우리 안의 이명박이 표상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도덕성을 포기하고 우리를 먹여살려줄 CEO를 뽑았다. 40대가 된 386들은 집값 상승을 위해 뉴타운으로 무장한 한나라당을 지지했다.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명박은 '절대악', '근본악'이 아니다. 바로 우리 안의 것들이 표상된 '평범악'이다.

그럼 우리는 이명박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우리는 우리 안의 이명박과 우리 밖의 이명박을 분리해내야한다. 토건귀족과 상위 10%가 추구하는 이익과 우리의 이익은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10%가 되고자 한다. 그것이 우리 안의 이명박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밖의 이명박을 인식한다면, 그 때서야 투쟁은 시작될 수 있다. 독재에 맞써는 것처럼 이명박을 향해 던지는 돌, 등록금을 깍아달라는 투쟁은 그 이후에야 진정성을 발휘할 수 있다. 우리 안의 이명박을 죽이고, 우리 밖의 이명박을 자각해야한다. 우리 안의 이명박을 먼저 죽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이명박을 죽이려 든다면, 그가 죽어도 우리 안의 이명박을 표상할 그 누군가는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포기한다. '한국 정치판이 원래 그래.'라면서. 무능력한 냉소주의를 반복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