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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 /단상

고3때 썼던 글

 

여러 차례 나눠서 썼던 글을 모아놓은 거라 좀 난잡하지만 수정하지 않고 그냥 올릴게요 ㅋㅋ
이 글을 썼던 고3때의 그 느낌을 살리기 위해 ㅋㅋㅋㅋ

시사토론반 가온누리 1기 마지막 토론
<“한국사회의 진보, 보수를 논한다”에 앞서>

(1) 개념정의

일단 무슨 이야기를 하기 전에는 개념 정의가 확실해야합니다. 따라서 먼저 진보와 보수에 대한 개념정의를 확실히 하고자 합니다.

 

먼저 “보수”라는 개념은(앞으로 이야기할 진보, 보수의 의미는 기질적이 아닌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뜻합니다.) 현재의 상황,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성향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변화를 수용하지 않고 무조건 현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 보수주의일까요?

철학적으로 보아도 어제와 오늘은 다르고 오늘과 내일은 다릅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자본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변화에 대처하지 못한다면 보수는 아무런 의미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어차피 변하는 세상인데, 현재를 고수하고자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요. 따라서 정확히 말하면 보수는 “현 체제를 토대로 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즉, 진보와 보수는 변화를 용인하느냐 변화를 무시하느냐에 따라 나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변화시키되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보수는 현재 기존 체제를 바탕으로 하여 현실의 문제를 수정해나가기 때문에 현실의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근대 보수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버크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유럽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적극적 개혁을 옹호합니다. 보수주의는 유럽의 전통주의자들로부터 시작되는 데, 이들이 옹호한 전통은 “과거로의 회기”라기보다 “과거의 전통을 통한 현재의 혼란 회복”의 의미가 강했습니다. 보수라고 해서 변화를 수용하지 않는다는 건 극단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합니다. 영국의 보수주의자 디즈레일은 자유주의적 급진개혁을 예방하기 위해 1867년 진보보다 더 진보적인 선거법 개혁을 단행합니다. 현재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면 충분히 진보적일 수도 있는 것이 보수입니다.

보수의 반대는 진보가 아니라 수구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구는 원 뜻대로 하면 나쁜 뜻은 아니지만, 흔히 극우를 일컫는 말로 쓰입니다. 수구는 현실의 안정만을 추구하며 현실의 변화조차 수용하지 않습니다. 그 현실조차도 자신들만의 현실입니다. 대한민국에는 스스로 보수라 일컫는 사람이 수구라 평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은 진보입니다. 진보는 현실의 문제의 원인이 현실 그 자체에 있다고 보고, 보수와는 반대로 현실 안정보다 현실의 변화를 추구합니다. 꼭 마르크스가 주장한 “공산당 선언”같은 유혈혁명은 아니더라도, 시민운동으로 현 부패정치를 바꾸려 한다던지 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 등 현 체제에 대한 비판과 변화운동 모두가 크게는 진보운동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진보는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하는 정신, 사상을 의미합니다.

(2) 진보와 보수, 기타 등등

1. 보수는 우파, 진보는 좌파?
진보. 보수 논쟁이 시작된 것은 근대(시민혁명) 이후입니다. 18~20세기까지는 보수주의는 우파, 진보주의는 좌파로 통했습니다. 그러나 세계화와 정보사회 등 많은 변화가 도래하면서 이 개념에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원래 두 개념 사이엔 차이가 있었으나 20세기까지는 진보. 보수와 좌파. 우파세력이 일치했던 것이죠.

자유와 평등 중 자유를 중시한다면 우파, 평등을 주장한다면 좌파로 구분합니다. 그렇다면 보수주의이면서 평등을 중시할 수도, 진보주의이면서도 자유를 주장할 수도 있죠.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은 평등을 중시 여기는 사회주의 이념을 택하고 있지만, 사회주의가 정착되면서 그것은 현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주의가 되어버립니다. 즉 보수주의적 좌파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죠. 반대로 진보주의적 우파는 흔히 신자유주의자들을 말하곤 합니다. 세계화라는 진보사상에 시장의 자유를 중시 여기기 때문이죠.(물론 하나의 관점일 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진보적 사상이라는 것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뉴라이트랑 똑같은 궤변에 불과하죠.) 간단히 말해서, 20세기 전까지는 진보는 좌파였고 보수는 우파였지만, 지금은 엄밀히 말해서 두 개념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2. 진보. 보수는 상대적인 개념.

환경보호 운동을 벌이는 것이 진보운동에 속할까요? 또, 민족주의가 보수일까요 진보일까요? 한 가지 개념으로 설명하기 힘듭니다. 진보. 보수는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죠.

환경보호 운동을 주어진 환경의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보수적인 성향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지속가능한 사회발전을 위한 환경보호운동으로 해석한다면 진보적인 성향으로 분류할 수도 있습니다.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식민지 국가의 국민들에게 민족주의는 진보사상이었습니다. 민족이 하나로 단결하여 나라를 되찾는, 세상을 바꾸기 위한 진보사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화가 도래한 지금 민족주의는 현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적인 사상입니다. 이처럼 진보. 보수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해석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3. 한국사회에서 진보/보수를 가르는 기준

흔히 진보. 보수를 나누는 기준은 변화와 안정, 자유와 평등(대부분 진보와 좌파, 보수와 우파는 일치하기 때문에), 성장과 분배, 시장 우선이냐 국가 주도이냐(경제에서)에 따라 나뉩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미국에 많이 예속되어있고, 분단국가라는 점에서 대미관계와 남북관계에 따라서 보수와 진보가 나뉘기도 합니다. 흔히 보수는 한미관계를 중요시여기고, 상호주의적 남북관계를 중시하며 진보는 대등한 한미관계와 북한에 대한 포용을 중시합니다.(물론 다 그런 건 아닙니다.)

(3) 보수의 한계와 문제점

먼저 “보수”라는 것의 보편적인 특성은 “부패한다”는 점입니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있듯이, 보수는 이미 물적. 사회적 기반이 마련된 상태에서 그 기반들을 지키고자 하는 성향이 강합니다. 그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할 우려가 있는 것이죠.

미국은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등장으로 점점 보수화되어가고 있습니다. 매파(강경파) 중의 매파라 불리는 네오콘들은 새로운 적을 만들어가며 팍스아메리카나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벨룸유스툼(명분있는 전쟁)을 위한 악의 축 발언도 서슴지 않으면서 말이죠. 이런 현상은 팍스아메리카나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 혹은 우경화에서 나온 발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전쟁까지도 서슴지 않습니다. 강한 미국을 지키려는 목적에서 나온 전쟁이라는 수단의 정당화. 그게 올바른 길인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일본의 역사왜곡이나 신사참배 역시 일본의 “보수화”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니, “수구화”이죠. 2차세계대전 전범들의 위패가 보관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 총리가 참배를 하고, “침략”을 “진출”로 바꾸어가며 한일합방과 남경대학살 등 침략의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의 의도는 “과거로의 회귀”이며 “군국주의 일본에 대한 동경”입니다. 그들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은연 중에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 제국주의의 만행이나 일본의 역사왜곡, 신사참배는 보수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 수단이 잘못 쓰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부패한 것입니다. 꼭 바깥을 찾지 않아도, 한국 내부에서도 보수주의라 일컫는 사람들이 “수구”인 경우가 많습니다.

 

소설가 이문열은 이른바 “홍위병”론으로 낙선운동을 주도한 총선 시민연대와 언론개혁을 벌인 시민단체를 공격했으며, 경실련의 이석연 사무처장은 “시민 단체가 특정 정당이나 정파.세력 등을 지지하고 이들과 연계해 활동하는 것은 시민운동에 대한 배신행위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시민이 주체가 되어 정치에 참여하여 정권을 견제하는 것은 자유 민주주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원조보수주의자들이 그토록 외친 “자유정신”에 어긋나는 발언과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보수라고 볼 수 있을까요?

박정희 정권 때 <민족일보>의 조용수 사장은 남북협상과 남북교류를 주장하다 간첩으로 몰려 사법 살인당했습니다. 사상을 검증당한 것입니다. 이 “사상검증”은 그 시절 그 때 이야기가 아닙니다. <조선일보>의 이한우 기자가 최장집 교수의 “사상”을 “검증”했습니다. 그에 관해 월간 <인물과 사상>에 비판글을 실은 강준만 교수는 조선일보한테 소송을 당해 700만원 형을 선고받았고, 월간 <말 >에 비슷한 글을 실은 정지환 기자는 400만원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국가에서 누군가 누구의 사상을 검증하는 일을 비판한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한나라당은 장관 후보자들의 사상을 검증합니다. 이게 보수일까요? 반공이 국시였던 과거를 원하고 그 때 이득을 보았던 자신들의 체제를 지키고자 하는 수구에 불과합니다.

특정인물 까대기로 글이 흘러갔습니다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의 보수라 자칭하는 자들의 행태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성급한 일반화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구가 존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수구를 견제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국 사회는 수구를 막을만한 진정한 보수가 없습니다. 보수의 타락을 막을 보수가 없다는 것. 그것이 한국사회 보수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4)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에서 논지를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진보는 한 마디로 “앞으로 나아가자”입니다. 하지만 아직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나아가야하는 지 아직 모릅니다. 그래서 진보주의자들 간에 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생기고, 분열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사회주의, 사민주의 논쟁이 바로 그 예입니다. 사회주의와 사민주의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하지만 무언가 잘못되어있다는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다 아는 것부터 고쳐야하는 것입니다.

 

진보논객 진중권 씨는 좌파 매체가 잘 안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 번째가 경제적인 이유입니다. 후원금에 의해 운영되다보니 돈에 얽매여있을 수 밖에 없는 거죠. 두 번째가 바로 이념논쟁, 노선논쟁으로 인한 분열이었습니다. 서로 간의 다툼이 심하다 보니 “수구”나 “보수”를 견제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좌파의 글이 이념적이고 사변적이며 관념적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실생활에서의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진보는 대중의 지지 기반을 얻기 어렵습니다. 몇 년 전 진보누리에 “쿠바 사회주의가 러시아 자본주의보다 낫다”라는 글이 올라온 적이 있는데요, 진중권 씨는 이 글을 비판하면서 “도대체 지금 상황에서 쿠바 사회주의가 러시아 자본주의보다 낫다는 걸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주장했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수구가 썩었다는 것이고, 그들을 견제하기 위한, 즉 실생활에서의 진보운동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한다는 점을 꼬집은 것입니다.

현재 진보주의 진영의 또다른 문제점은 세계적 연대를 마련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진보의 변질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영국의 진보당이라는(명목상으로) 노동당 당수 블레어는 미 제국주의의 이라크 침공을 막기는 커녕 돕기까지 했으며, 진보운동을 하는 시위대를 유혈진압하기까지 했습니다. 영국 노조회의(TVC)는 이라크전의 침공 전 총회에서 “후세인이 실질적 위협이라는 사실이 입증된다면 공격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또한 노르웨이 노동당 당수(진보당) 옌스 스톨렌베르그는 구소련의 아제르바이란을 방문했을 때 그 곳 인권단체들이 겪는 어려움을 지적하는 대신 경제적인 효과만을 늘어놓았습니다. 독일 사민당의 슈뢰더는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한다면서 부시와 타협하고 말았습니다. 진보라고 일컫는 자들이 현재 벌어지는 인권침해와 제3세계에 대한 수탈에 대해 “경제적 이유”, 혹은 “이익” 때문에 방조, 혹은 동조하고 있습니다. 즉 현재 서구의 진보주의는 서구 안에서의 복지국가로서의 틀을 고수하려 하고, 신자유주의에 의해 황폐화된 세계주변부에 대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자국 내 국민이 테러에 의해 죽어가는 것에 분개하면서 세계주변부에 서구에 의해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한 것입니다.

1986년 전후의 체 게바라, 마오쩌둥, 호치민으로 상징되는 신좌파 혁명과 현재의 진보주의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일본 우경화에 대해 저항하는 일본의 양심 이에나가 사부로, 이스라엘 군의 발포에 치명상을 입으면서까지 전쟁을 막으려했던 영국인 톰 후른달, 팔레스타인으로 돌진하는 이스라엘 탱크 앞에서 맞써다 희생된 미국인 레이철 코리와 같은 진보주의자들이 계속해서 나오지 않는다면 진보는 진정한 의미의 진보가 될 수 없습니다.

진보는 보수를 견제하고 수구를 배척함으로서 존재합니다. 인간이 존엄함을 위해 싸우고 부당함에 투쟁함으로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야할 진보가 현실에 타협해버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보가 아닙니다.

(5) 세계에서 배우는 보수, 진보-프랑스

최근 세계적으로 진보.보수 논쟁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진보를 표방한다는 열린우리당이 집권하고, 진보정당 민주노동당이 국회 의석을 차지하면서 진보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미국와 일본의 우경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중국의 좌.우논쟁(참고:물권법 논쟁), 남미의 좌파운동 등이 모두 그 예이죠. 그렇다면 세계에서 진보. 보수가 나름대로 올바른 균형을 유지하고 견제하는 곳은 어디일까요. 저는 프랑스와 북유럽(특히 노르웨이)를 그 예로 들고자 합니다.

먼저 프랑스에서 배우는 진보.보수 정신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바로 “수구를 견제할 보수의 존재”와 “진보운동의 활성화”입니다.

몇 해전 프랑스의 <리베라시옹>의 기자가 쓴 소설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소설은 프랑스의 극우당(수구) 당수 장 마리 르펜을 풍자한 소설입니다. 이에 대해 르펜 측은 800만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을 때, 조선일보가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이 때 프랑스 문인들이 대거 들고 일어나 이 일에 대해 항의했습니다.(소송이 기각되었는 지 아예 소송을 포기했는 지는 기억이 안 납니다만;)

프랑스의 보수주의자들은 이처럼 수구세력을 배척합니다. 즉 수구를 견제하는 게 진보가 아니라 보수인 것입니다. 프랑스 보수 세력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보수”입니다. 때문에 수구가 주장하는 반민주적 배제의 논리에 그들은 찬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수구들은 프랑스인와 이주외국인들을 구별하여 이주 외국인들이 프랑스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주 외국인들을 내쫓자고 주장합니다. 다름을 절대적 우열로 판가름하는 혐오. 배제논리를(똘레랑스가 없는) 프랑스 보수들은 극도로 비판하는 것입니다. 보수주의자인 자크 시라크가 공산당수인 로베르 위와는 친분을 유지해도 국민전선당의 극우파 장 마르 르펜과는 상대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물론 최근에는 프랑스 역시 우경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그들에게는 우경화를 견제할 보수, 진보가 존재합니다.(최초고용계약제에 대한 저항과 스크린 쿼터제 축소에 대한 저항이 바로 그 예입니다.)

프랑스는 1789년 프랑스대혁명으로 진보. 보수의 개념을 탄생시킨 나라입니다. 그들은 꾸준한 진보운동을 통해 사회를 진보적으로 바꾸어왔습니다. 1864년에는 노동자들의 파업권, 1868년에는 공공집회를 가질 권리, 1884년에는 노조결성의 자유를 획득했습니다. 모두 프랑스 진보주의자들이 진보운동을 통해 획득한 것입니다. 1901년에 피에르 발덱-루소법(시민단체법)이 만들어지면서 프랑스의 시민단체가 중심이 된 진보운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의 시민단체는 총 70만개입니다. 또한 국경없는 의사회(MSF)는 900억원의 일년 예상을 10만 명의 기부금으로 충당합니다. 프랑스 시민들은 언제든지 부당함에 대한 투쟁이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역사는 진보의 역사였으며 건전한 보수(버크나 디즈레일)가 진보의 브레이크 역할을 했습니다.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뉴라이트(신보수)에 맞썰 뉴레프트가 남미의 좌파진영을 제외한다면 오직 프랑스에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6)세계에서 배우는 보수, 진보-노르웨이

프랑스에게서 배우고 싶은 점은 “건전한 보수”와 “진보운동의 활성화”였습니다. 노르웨이 모델에서 배우고 싶은 것은 “다양한 사상의 표현”입니다.


진보이건 보수이건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의 올바른 표현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자유로운 생각의 표현을 우익단체들이 막아버립니다. 이른바 <색깔론>으로 말이죠.

한국전쟁 당시 우리군대의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을 이적행위, 혹은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막아서는 것이 그들입니다. 몇 해 전 이회창 前 총재가 “지금 이 나라는 목숨 걸고 간첩을 쫓던 사람이 그 간첩에 의해 백주에 쫓겨다니던 신세가 되었다.”라고 말했는 데, 그 간첩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언제까지 색깔론에 빠져 색안경을 쓰고 남의 사상을 “검증”할 것인지가 궁금하더군요.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노르웨이는 다양한 사상들이 자유롭게 표현됩니다. 한국에서 조선.중앙.동아라는 보수 언론이 전체 신문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과 달리, 노르웨이 신문시장은 “다양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노르웨이의 지방신문인 <베르겐스 디덴데>의 발행부수가 중앙일간지 중 최고인 <베게>의 4분의 1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지방신문 <베르겐스 디덴데>는 온건좌익을 표방합니다. 반면에 트론테임의 <아드레세 아비센>은 온건우익을 표방하는 신문입니다. 이 밖에도 기독교 계통의 우익, 온건좌익(노동당), 녹색주의, 국제주의적 지성계 좌익(사좌당), 노동자 공산당(AKP)에 동조하는 언론들을 형성하고 있으며, 자유롭게 자신들의 사상을 표현합니다.

또한 오슬로의 <닥스아비센>은 온건좌익을 표방하면서 국내 인종.문화 차별, 해외의 사회 문제를 심층적으로 분석합니다. 노동자 공산당의 기관지인 <글라센 캄펜>은 농어촌 문제와 증시의 모순점, 구소련 및 동구권의 빈곤, 대형 부정부패의 사회.과학적 심층분석, 그리고 민영기업의 부조리와 경영체계의 미비점을 파헤칩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공산당 기관지인 <프리레덴>은 이스라엘의 대아랍 침략사, 시오니즘의 인종주의적 측면을 다룹니다. 이념적으로 대립하면서 상대 언론들을 헐뜯는 행위를 일삼고, 보수 아니면 진보로 나뉘어져 있는 한국 언론들과는 상당히 다른 면이 있습니다. 또한 클라센 캄센의 한 기자는 노르웨이 최고 경제신문 일간지에 스카웃된 바 있습니다. 그 신문이 신자유주의라는 우익을 표방하고 있음에도 말이죠. 노르웨이는 이념의 차이를 인정하는 사회인 것입니다.

노르웨이의 대표적 좌파당은 노동당입니다. 100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정당입니다. 그러나 관료화, 보수화 되어가며 “지역에서의 작은 진보, 진보는 우리 동네부터”를 표방하는 사회주의 좌익당(이하 사좌당)에게 따라잡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고 진보당, 두 번째 진보당인 노동당, 사좌당의 지지율은 전체의 20%가 채 안됩니다. 그만큼 많은 당들이 각자의 이념을 표방하고, 지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좌당은 또한 “진보”를 이루기 위한 많은 활동들을 하고 있습니다. 일단 NATO를 불신하여 탈퇴를 추진하고 있고, 세계주변부에 대한 국고 재정 지원을 확대하는 방안 역시 마련하고 있습니다. 또한 비정규직 양산을 결사 저지하고 있으며(노르웨이에서 비정규직이란 직장 여건상 정규직 채용이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한 상황에서 채용되는 경우를 말하기 때문에 한국과는 조금 다릅니다.) 대학생들의 복지관련 정책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합니다.(대중교통 이용료 40% 할인혜택, 오슬로 대학의 무리한 학기말 시험 평가기준 강화저지 등) 대학생들에게 사좌당이 30~40%의 지지를 받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죠.(이 외에도 사좌당은 유치원에 대한 국고 지원증액, 지방공무원 증원과 장애인 고용 활성화, 여성의 기업 경영 참여 확대를 위해 노력합니다.)

물론 한국과 노르웨이를 단순 비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배우자고 주장하는 것은 “정책”이 아니라 “정신”입니다. 북유럽식 모델을 우리나라에 정책적으로 적용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노르웨이 신문들이 그토록 다양함을 추구하는 것은 정부의 “보조금 제도”의 영향이 강합니다. 하지만 공산당 기관지에 보조금을 줄 수 있다는 생각, “레드콤플렉스”, “반공주의”로 무장한 한국 극우들에게는 현재 가능한 일입니까? 그것을 배우자는 말입니다. 프랑스와 노르웨이에 맞춰 한국의 현실을 바꾸자는 게 아니라, 그들이 보수.진보의 균형을 맞추는 정책을 마련할 수 있는 그 정신을 배우자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