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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문학 외

‘중국식’ 법치를 고민하자

 


귀주 이야기 (0000)

The Story of Qiu Ju 
9.2
감독
장예모
출연
공리
정보
드라마, 코미디 | 중국, 홍콩 | 110 분 | 0000-00-00

아무리 좋은 제도와 사상도 그것이 한 공동체에 뿌리내리는 데까지는 타임래그(time lag)가 있기 마련이다. 국가나 정치 엘리트들이 새로운 사상과 제도를 자기네 나라에 도입한다 해도, 전통적인 방식과 기존 제도에 의존하여 살아온 민중이 이를 단번에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제도나 사상이 한 공동체의 운영 원리로 자리 잡기까지, 수많은 혼란이 발생한다. 영화 <귀주 이야기>는 이 타임래그의 시대에 살았던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마오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은 개혁. 개방을 통해 서구식 사상과 제도를 중국에 도입하여, 전근대적인 중국을 개혁하고자 했다. 법치제도의 개혁도 이루어졌다. 1982년 신헌법이 개정되고, 당의 영도를 받던 사법기관의 독립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인치의 시대가 아니라 법치의 시대를 열고자 한 것이다.


<귀주 이야기>의 배경은 과거의 전통과 새로운 사상이 공존하던 시기다. 즉 인치와 법치가 공존하던 시기인 것이다. 당시 중국은 서구의 법치제도를 도입했다. 귀주는 남편의 급소를 걷어 차 다치게 한 마을 촌장으로부터 사과를 받기 위해 향 공안국을 찾아간다. 그러나 향 공안국은 촌장에게 사과가 아니라 돈을 지불하라고 결정하고, 이에 귀주는 향 공안국보다 상급공안당국인 현 공안당국에 재심을 요청하고, 현 공안당국에서도 똑같은 결정이 나오자 시 공안당국을 찾아간다. 시 공안당국에서도 같은 결정이 나오자 변호사를 고용해 법원에 소송을 건다. 그리고 그녀가 남편의 엑스레이를 법원에 제출하자 법원은 촌장에게 폭행 혐의가 있다고 판결하고, 결국 촌장은 잡혀가고 만다. 사인(私人)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기관으로 당이 여전히 큰 역할을 하긴 하지만, 당의 중재와 결정에 불복할 경우 법원에 소송을 걸 수도 있는 법치제도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인치’의 모습도 아직 중국에 남아 있다. 법원의 판결 이전에 이루어지는 당 공안국의 ‘중재’가 대표적인 예이다. 향 공안국의 리 경관은 촌장과 귀주를 모두 아는 입장에서, 둘 사이를 중재하는 것으로 갈등을 해결하고자 한다. 손해배상과 형벌로 사인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서구식 법치제도와 매우 다른 중국의 전통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중국인들 역시 법치보다는 이러한 인치에 더 익숙했다. 만일 귀주가 서구식 법치를 받아들였더라면 <귀주 이야기>라는 영화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서구식 법치는 ‘객관적인’ 요소를 통해 사인 간의 갈등을 해결한다. 잘못한 사람이 손해를 입힌 측에 얼마를 배상하거나, 잘못한 사람이 몇 년 간 감옥에 갇히는 형벌 등을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귀주가 원한 것은 ‘객관적인’ 요소를 통한 해결이 아니라 ‘주관적인’ 요소를 통한 해결이었다. 그녀가 바란 것은 치료비가 아니라 촌장의 진심어린 사과였다. 그리고 당과 법원이 이 ‘사과’를 받아 내주길 원했다. 촌장이 몇 번이나 돈을 건네지만 귀주는 돈 은 필요없다며 돈을 거절한다.


귀주가 옌 국장을 대하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 공안국의 옌 국장은 멀리서 찾아온 귀주를 매우 친절하게 대해준다. 그리고 귀주가 시 공안국의 결정에 불복하여 법원에 소송을 걸자, 옌 국장 역시 법원에 서게 된다. 그러나 귀주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옌 국장님은 나한테 잘해주셨는데 왜 옌 국장이 법원의 조사를 받아야 하느냐”며 법정에 서는 것을 거부한다. 변호사와 옌 국장이 계속해서 ‘필요한 절차’라고 말해도 이를 쉽게 납득하지 못한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촌장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귀주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촌장은 산고의 고통을 겪고 있는 귀주를 병원에 데려다 준다. 귀주는 첫 아이의 돌잔치 때 촌장을 초대함으로써 촌장을 용서한다. 귀주 입장에서는 촌장과 자신, 남편의 갈등은 이미 해결된 것이다. ‘주관적인’ 요소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법원의 판결은 귀주의 이런 생각과는 달랐다. 법원은 촌장이 폭행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했고, 촌장에게 형벌을 내렸다. ‘객관적인’ 요소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귀주가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닌데’라는 표정을 지은 것은 이 때문이다.


귀주가 살았던 당시 중국은 자본주의 개혁 개방이 막 이루어진 시기다. 귀주 외에도 수많은 중국인들이 자신들이 가진 전통과, 바뀌어버린 제도 사이의 괴리로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귀주와 미엔즈가 현 공안국의 판결에 불복해 시 공안국을 찾아갔을 때, 도시는 귀주에게 매우 어색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서구식 의복과 머리스타일을 한 중국 인민들이 돌아다닌다. 전형적인 시골 아낙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귀주와 미엔즈는 인력거꾼에게 사기를 당하고 만다.


길에서 만난 한 노인은 귀주에게, 그렇게 시골 사람처럼 하고 있으면 사기를 당하기 십상이라고 충고해준다. 새로운 제도와 사상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전통과 제도 사이의 괴리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중국 인민들(특히 시골 인민들)에게 개혁 개방이 이루어진 도시는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무서운 도시로 다가왔을 것이다. 귀주는 시골 아낙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도시의 옷을 사서 입는다. 하지만 귀주가 도시의 옷을 입은 모습을 보고 영화 보던 나는 ‘빵’ 터지고 말았다. 너무 어색하고, 귀주에게 안 어울렸기 때문이다. 귀주의 이 어색한 모습은 전통과 새로운 제도, 사상 간의 어색한 조화, 인치와 법치의 어울리지 않는 조화를 상징한다.


서구인들의 눈에 보면 이러한 중국인들의 법치에 대한 의식과 중국의 법치제도는 ‘개혁 대상’일 것이다. 중국에도 법치가 어느 정도 자리 잡긴 했지만, 중국의 법률 제도는 서구의 법제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중국에서 탈법행위나 불화들이 해결되는 방법은 상당부분 과거 수십 년 간의 자체의 혁명 경험과 공산주의 정치이데올로기에 의해 형성되어 온 것이다.


영화 <레드 코너>에서도 이러한 중국인의 법치에 대한 인식이 등장한다. 자신의 살인 혐의를 부정하는 잭 무어에게 공산당 당 간부들은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고, 죄를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는 강력한 처벌을 가하는 게 중국이라고 말한다. 잭 무어의 변호사인 쑨 율린은 ‘우리나라 법은 도덕적 교화를 중요시 여긴다.’고 말한다. 서구식 법치제도에 익숙한 잭 무어는 이러한 중국식 법 제도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꼭 중국식 인치는 후진적이고, 서구의 법치는 합리적이고 선진적이기만 한 것일까? 아마 한국인들의 경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다수일 것이다. 예컨대 서구식 법치제도가 가장 잘 발달해 있는 미국을 보자. 미국은 소송의 천국이다. 가벼운 사고가 벌어져도 소송으로 이어지기 일쑤고, 내 변호사랑 이야기하라고 말하기 일쑤다. 미국인들이야 쿨(?)해서 이런 소송만능주의를 수용한다고 쳐도, 사람 간의 관계와 정(情)을 중요시하고, 문제가 생기면 같이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면서 문제를 푸는 데 익숙한 한국인들이 이런 문화를 수용할 수 있을까? 중국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치에 의해 수 백 년을 살아온 중국인들이 서구식 법치제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에겐 그들이 비합리적이고 낡았다고 비난할 자격이 없다.


또한 <레드 코너>에서 묘사한 상황, 즉 주인공이 억울하게 위기에 처하는 상황은 중국식 ‘인치’의 문제라기보다 권력이 개입하여 사건을 조작하는, ‘권력형 비리’가 일으킨 문제가 아닐까? 죄를 반성하는 자에게 가벼운 죄를 적용하는 것이 뭐가 나쁜가? 다른 나라에서도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범죄자에게는 감형 조치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만일 <레드 코너>의 배경이 서구였다면, 율린이 무어를 보증하고 무어가 보석에서 나오는 경우도 없을 것이며, 둘 간의 우정과 사랑이라는 감동적인 장면도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서구식 법치제도가 중국식 인치보다 무조건 우월하다는 생각, 따라서 중국도 서구식에 맞춰 개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 ‘걸맞은’ 법치제도란 무엇인지를 더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