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9.03.07 08:54

* 스포일러는 거의 없도록 썼지만, 주의하시길....


<어벤져스4: 앤드게임> 전 마지막 마블 영화 <캡틴마블>을 보고 왔다. 어벤져스 배경 이전인 1980~90년대를 다루고 있기에 다른 마블 영화와의 연결고리들이 많다. 그래서 마블 팬이라면 이스터에그 찾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앤드게임을 보기 전에 꼭 봐야하는 건 아니다. 일종의 독립영화기 때문이다. (물론 쿠키영상 빼고)


개봉 전부터 페미니즘 논란이 있었는데, 오히려 일반적인 히어로 영화에 가깝다. 배경이 1980년대고 주인공이 비행기 조종사라는 (당시에는 남성적이라고 여겨진)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당연히 그런 요소가 등장은 한다. 하지만 그런 요소는 시련을 이겨내야 히어로로 거듭난다는 클리셰적인 장치로 활용되는 차원일 뿐, 페미니즘 요소가 전면으로 다뤄지진 않는다.




오히려 눈에 들어온 건 마블이 힘, power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였다.


히어로가 등장하는 영화나 만화가 가장 다루기 힘든 주제가 힘이다. 관객이나 독자들은 히어로 영화를 보며 늘 더 업그레이드된 강함을 갈구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더욱 강해져야 하고, 빌런도 더욱 강해져야 한다. 조연들도 같이 강해져야 한다. 안 그러면 밸붕(밸런스붕괴)이 이루어져 주인공 싸우는 옆에서 방해만 되거나 해설자, 지략캐로 전락한다.


드래곤볼이 그랬다. 처음에 에네르기파만 쏘던 손오공은 나중에 초사이언이 된다. 적들은 사이어인에서 프리더, 셀, 마인부우, 비루스까지 점점 강해지고 손오공과 일당들도 점점 강해진다. 인플레가 벌어져서 나중엔 개나소나 다 행성을 파괴할 능력을 갖추고 처음에 막강했던 조연들은 쩌리가 되거나 전투력 측정기 취급을 당하는 신세가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야무치..야무치의 사망장면을 일컬어 "야무치의 웅크린 포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안습 신세다.)


마블은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히어로의 정의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힘만 세다고 히어로의 자격이 있는가?"


캡틴아메리카는 슈퍼솔져 혈청을 맞고 강해지기 전부터 히어로였다. 왜소한 몸집에 체력은 약했지만 거리낌없이 수류탄으로 몸을 던졌고, 얻어맞으면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힘이 세진 이후에도 그가 싸우는 적들은 힘만 센 적들이 아니다. 적만 없앨 수 있다면 자유를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국가, 그리고 그에 동의하는 동료들, 그 사이에서 벌어진 분열 등등.


어벤져스 세계관에서 캡틴은 어느새 힘만으로는 약한 축에 속하지만 그가 없는 어벤져스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는 언제나 더 강한 적들에 맞서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슈퍼솔져 혈청 맞는다고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토니스타크는 군산복합체의 수장이었으나 자신이 만든 무기가 나쁜 목적에 사용된다는 점을 깨닫고 자신의 기술력을 이용해 아이언맨이라는 히어로가 되었다. 그는 최고의 기술력을 갖고 있지만, 늘 더 첨단의 기술을 이용해 세상을 구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 과정에서 실수를 반복하고, 그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발버둥치면서 히어로로써 성장한다.


아이언맨3에서 아이언맨은 자신이 미친듯이 만든 아이언맨 슈트들을 모두 폭파시켜버린다. 아이언맨3 최고 명장면으로 꼽힌다. 힘에만 집착한다고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아이언맨이 깨달은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힘을 갖고 있던 히어로들은, 늘 영화 속에서 한 번은 힘을 빼앗긴다. 대표적인 캐릭터가 토르다. 토르는 토르1편에서 맘대로 힘을 남용하다 아버지 오딘에게 힘을 빼앗겼고 힘이 없는 상태에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뛰어든다. 그 과정에서 다시 힘을 되찾는다. 힘이 없어도 사람을 구하려는 정신이 있어야 히어로의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인피니티워>에서 마블은 토르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동생은 죽었고, 자신이 지키려던 백성들은 타노스에게 전멸당한다. 이미 자신의 무기 묠니르는 박살났다. 모든 것을 빼앗긴 토르는 하지만 화려하게 돌아온다. 토르가 지구에 돌아오던 장면이 <인피니티워> 최고의 명장면인 이유는 그가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히어로로 복귀했기 때문이다.

(인피니티워 최고의 명장면..!)


<홈커밍>에서 아이언맨은 스파이더맨이 사고를 치자 슈트를 빼앗아간다. 스파이더맨이 "슈트없이 전 아무것도 아니에요"라고 호소하자, 아이언맨이 말한다. "슈트없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넌 더더욱 이걸 가져선 안 돼." 힘만 세다고 히어로가 아니라는 마블의 일관된 정신을 요약한 대사였다. 스파이더맨은 자신이 만든 허접한 슈트를 입고 적들을 상대하며, 히어로로 거듭 태어난다.


캡틴마블 이야기로 돌아가자. 캡틴아메리카에게 히어로의 자격이란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며, 아이언맨에게 히어로의 자격이란 실수를 통해 성장하는 법을 깨닫는 것이다. 토르에게 히어로의 자격이란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절망하지 않는 강인함이다. 그렇다면 캡틴마블에게 히어로의 자격이란 무엇일까?


캐럴 댄버스(캡틴마블)는 자신이 힘을 얻게 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의 힘이 외계종족인 크리종족에게서 기원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늘 감정을 억누르고, 자신을 통제하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캐럴댄버스가 성장한 순간들은 세상이 가르친 것을 거부한 순간들이었다. (이 대목에 페미니즘의 요소가 들어가 있다.) 세상이 규정한 것을 거부하고 내가 누구인지 나 스스로 규정할 때 캡틴마블은 자신의 힘을 가장 필요한 곳에 사용할 수 있었다. 그의 친구는 말한다. "넌 손에서 나오는 그 불광선이 없을 때부터 히어로였다"고.


여러 설정, 다소 오그라드는 전개 등등 빈틈은 있는 영화였다. 오락용 영화로 좋지만 놀랍도록 잘 만든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마블은 마블이란 걸 기억하자. <토르1>은 (내가 부제도 기억못할 정도로) 허접했다. 하지만 라그나로크와 인피니티워의 간지철철 토르가 등장하기 위해 꼭 필요한 영화였다. 마블 영화는 한 편만 독립적으로 평가해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장르다.


(캐럴댄버스는 이때부터 히어로였다.)


일각에서는 갑자기 너무 쎈 히어로가 나와서 밸런스 붕괴를 우려하는 사람도 있다. 캡틴마블이 타노스 걍 이겨버리면 어쩌지? 마블 영화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기우라고 생각할 것이다. 마블의 가장 큰 장점이 히어로의 힘을 잘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마블이 디씨 영화보다 뛰어난 결정적인 이유다.

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9.02.21 15:14

한 달 전쯤에 페북에 어벤져스4 결말에 대한 예상을 썰처럼 풀었던 적이 있다.

이전의 글이 캡틴아메리카의 관점에서 접근했다면, 이번에는 토니 스타크의 관점에서 접근해보려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마블 팬으로서 그냥 재미로 써보는 썰이기에 틀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토니스타크의 캐릭터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고자 강박증적으로 노력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토니스타크는 시리즈를 반복할수록 성장하는 캐릭터이고, 다소 고지식한 모습을 보여주는 캡틴아메리카에 비해 친근하고 정이 가는 캐릭터이다. (이 점은 캡틴과 대비된다. 캡틴은 '수많은 시련과 고뇌에도 불구하고 강박증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는 인물'에 가깝다.)




아이언맨이 되기 전 토니스타크는 군수산업의 수장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개발한 무기가 테러단체에 넘어가 사람을 죽이는 무기로 활용된다는 점을 깨닫고 난 뒤, 군수산업에 손을 뗀다. 대신 자신의 과오를 씻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아이언맨을 만든다. 그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강박증적으로 집착하는지는 <아이언맨3>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는 잠도 자지 않은 채 미친 듯이 아이언맨 슈트를 만들어댄다.


문제는 토니스타크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세상을 구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실수가 반복된다는 것이다. 세상을 구하려다 세상을 위협에 빠뜨리는 모순이다. 토니스타크는 <어벤져스>에서 쉴드와 함께 우주에서 온 인피니티스톤 중 하나인 테서렉트를 연구하고, 이를 지구를 지킬 무기로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로키에게 이 테서렉트가 털리면서 로키가 치타우리 부대를 지구로 불러들인다. 게다가 이 무기로 인해 쉴드의 충실한 요원 중 하나가 사망하자 괴로워한다.


<어벤져스:에이지오브울트론>에서도 마찬가지다. 토니스타크는 누군가 지구를 침공할 것을 알고 있었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울트론을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울트론이 세상을 멸망으로 몰아넣었다.




캡틴아메리카는 이런 토니스타크에게 매우 정확한 팩폭을 했다. 캡틴은 토니를 향해 “너는 너 자신을 위해 싸울 뿐이야.”라고 말했다. 토니스타크가 세상을 구하려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너 자신의 죄책감을 해소하기 위해 싸우는 거 아니냐는 날카로운 지적이다.


또 캡틴은 토니가 울트론을 만들려고 할 때 “일어나지도 않은 전쟁을 이기려고 할 때마다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된다”고 비판했다. 세상을 구하려는 토니가 반복해서 세상을 위협하는 모순을 정확히 지적한 말이다.


이 지점에서 토니가 겪고 있는 ‘지식의 저주’가 등장한다. <어벤져스:인피티니워> 후반부에 타노스와 아이언맨이 1대1로 맞붙은 장면이 있다. 타노스는 토니에게 “너만 지식의 저주에 걸린 게 아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거칠게 정리하면 지식의저주란, 자신이 아는 걸 남들도 안다고 생각해 남을 설득하지 못하고 혼자 답답해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타노스는 지식의저주에 걸려 있다. 타노스는 자원 분배, 인구조절에 실패한 탓에 자신의 고향 타이탄이 멸망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는 인구와 자원 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남녀노소 빈부계급을 막론하고 절반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무도 타노스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타이탄은 멸망했다. 타노스는 그 이후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행성의 절반을 파괴하고 다니지만 당연히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 급기야 인피니티스톤을 모두 모아 우주 절반을 먼지로 날려버리기에 이른다.


토니에게도 지식의 저주가 있다. <에이지오브울트론>에서 완다의 환영에 걸린 토니는 외계인에 의해 지구가, 그리고 자신의 동료들이 모두 죽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 뒤로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어벤져스>의 뉴욕 전투가 끝난 상황임에도 홀로 지구로 쳐들어올 위협에 대비해 미친 듯이 기술을 개발하고, 울트론까지 만들었다. 모두가 토니를 이해하지 못한 채 토니를 뜯어말렸다.


토니가 알고 있는 지식이란 ‘언젠가 외계인의 침공으로 세상이 멸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토니가 걸려버린 지식의저주는, 언젠가 세상이 멸망함에도 아무도 그걸 알지 못해 본인 혼자의 힘으로 세상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대로 방치하면 우주가 멸망할 것이라는 점을 혼자 깨닫고. 본인 혼자 힘으로 우주의 균형을 맞추려 했던 타노스와 비슷하다.


토니가 걸린 저주는 한 가지 더 있다. 홀로 세상을 지키려 했던 토니가 반복해서 세상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타노스도 이런 의도치 않은 비극을 겪는다. 타노스는 우주의균형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유일하게 사랑하는 딸 가모라를 희생시켜야 했다. 우주의 절반을 날려버린 뒤 환영 속에서 만난 가모라는 그에게 "목표를 이룬 대가가 무엇이었나?"라고 묻는다. 타노스는 "모두 다..."라고 답한다. 절반을 구하기 위해 자신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모순이다. 우주의 관점에서는 숫자로 계산해 절반을 날리는 게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어도 개개인에게는 그 한 명 한 명이 우주와 같다는, 타노스식 논리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토니는 이 저주에서 벗어나려 한다. 하지만 그가 매번 선택하는 방법은 또 자신이 혼자 책임지는 것이다. 자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늘 스스로를 희생하는 방법을 택한다. <어벤져스>에서 그는 핵폭탄을 들고 홀로 우주로 날아간다. <인피니티워>에서는 타임스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려 했다. 스파이더맨이 우주로 따라오자 불같이 화를 낸 이유도 그는 다른 사람의 희생을 눈앞에서 보는 것을 가장 괴로워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쉴드의 국장 닉퓨리는 언젠가(어느 영화인지 기억이;;) 토니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에게 있어 최악은 다 죽고 너만 안 죽는 거지.” 그리고 토니는 이미 완다의 환영에 걸려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죽어가고, 세상이 멸망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끔찍하게도 환영 속에서 캡틴이 토니에게 “네가 우리를 구할 수 있었어.”라고 말한다.


정리하자면 토니는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세상을 구하려 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세상을 위협하고 나아가 자신만 살아남는 상황을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이다.


인피니티워의 결말은 토니 입장에서 가장 끔찍한 결말이다. 타노스가 지구로 쳐들어올 거란 것을 토니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막으려 발버둥을 쳤으나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세상을 위협했고, 결국 함께 타이탄에서 함께 싸웠던 동료들이 모두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자신만 남았다. (타이탄 전투 멤버들 중 스파이더맨 등이 모두 사망하고, 토니가 가장 최근에 만나 가장 친분이 없는 네뷸라만 살아남았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네뷸라가 어벤져스4에서 토니를 살리고 죽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어벤져스4에서 토니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어벤져스4에서 토니가 사망할 거란 예측은 주요한 가설 중 하나다. 하지만 난 토니가 희생하는 식으로 결말이 지어질 것 같지 않다. 그 방식은 앞선 영화에서 늘 실패해 왔기 때문이다. 마블이 그런 식상한 결말을 택할까? (물론 토니가 죽을 수도 있다. 다만 죽더라도 모든 걸 짊어지고 죽는 방식은 아닐 거란 뜻이다.)


토니의 가장 큰 패착은 늘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려 한다는 점이다. 지식의저주를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나의 눈이 아니라 남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즉 다른 이들과 함께 힘을 합치는 것이다.


3시간에 달하는 인피니티워에서 해결하지 못한 과제가 하나 있다. 이 과제는 인피니티워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놀랍게도 인피니티워에서 캡틴과 토니는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 시빌워에서 갈라진 이후, 둘은 화해하지 못했다. 서로 각자의 방식으로 싸우다, 결국 타노스에게 모두 패배했다.


어벤져스4의 가장 중요한 장면은 토니와 캡틴이 다시 만나는 장면이 될 것이다. 그리고 토니는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구하려 했던 '지식의저주'에서도 벗어날 것이다. 그것이 홀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의 절반을 날려버린 타노스에 맞서, 이 게임을 끝낼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9.01.22 08:39

며칠 전 블로그 '어벤져스4'의 주인공은 캡틴아메리카가 될 것이란(될 수밖에 없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번엔 본격적으로 캡틴아메리카에 대한 팬질 글을 써볼까 한다. (* 구체적인 대사는 나무위키 캡틴아메리카 편을 참조하였습니다.)


캡틴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는 겉으로 보기엔 미국의 애국주의와 제국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보인다. 코스튬도 그렇고, '캡틴아메리카'라는 이름도 그렇다.


하지만 캡틴이 상징하는 건 미국이 아니라 미국의 사상, 가치, 이념이다. 캡틴은 누구보다도 자유를 소중한 가치로 여기며, 자유를 지키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투사다. 바로 이 'Gap'이 캡틴아메리카의 가장 큰 매력이다.


자유주의자 캡틴아메리카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은 <윈터솔져>다. 1940년대 냉동인간이 되었다가 70년 만에 깨어난 캡틴이 발견한 건 쉴드가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 인사이트'였다. 프로젝트 인사이트는 그야말로 대국민감시프로젝트. 헬리캐리어들을 띄워서 미 전역을 감시한 다음, 미국 정부에 위협이 될 만한 것들을 미리 제거한다는 계획. 이 계획을 알게 된 캡틴은 강하게 반발하며 이렇게 말한다.


"처벌은 범죄 그 이후에 따르는 것입니다."


범죄라는 구체적 행위가 등장하기 전의 시민의 행위를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 자유주의자 캡틴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다. 쉴드의 국장 닉 퓨리는 캡틴을 설득하려 하지만, 캡틴은 끝까지 반대하며 이렇게 답한다. "저는 가끔 현실과 타협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타협을 한 이유는 시민의 자유를 위해서였습니다. 이건 자유가 아니라 공포에요."




캡틴의 우려대로 쉴드의 이 계획은 쉴드 안에 잠입해 있던 하이드라(빌런 집단)의 음모였다. 이를 알아챈 캡틴은 홀로 쉴드 본부에 침입한다. 그리고 이미 지도부를 장악한 하이드라에 맞서 쉴드의 요원들에게 함께 싸우자고 설득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이 무리한 요구임을 안다. 하지만 항상 그래왔듯 자유의 대가는 크다. 그리고 난 그 큰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다. 나 혼자라도 상관없다. 하지만 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결국 자유주의자 캡틴의 선동에 동화된 쉴드 요원들이 싸움에 동참하면서 하이드라는 패배한다. 캡틴에게 국가는 시민의 자유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미국의 국기를 몸에 걸고, 이름에 '아메리카'를 달고 있지만 캡틴이 지키고자 하는 건 미국이 지켜야할 가치, 자유다.


<시빌워>에서도 캡틴의 이런 행보는 이어진다. 히어로가 법에 등록된 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소코비아 협정'. 히어로 진영은 협정을 따라야 한다는 '아이언맨' 파와 이에 반대하는 캡틴 파로 나뉘어진다. 히어로등록법을 거부한 캡틴의 근거도 '자유'였다.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법과 조직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건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는 길이다." 캡틴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미국 정부 전체와 싸우고, 수배자가 된다. 그는 미국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조국과도 싸우는 히어로다.


누가 봐도 고지식한 이런 면모 때문에 캡틴은 <시빌워> 이후 안티가 급증했다. 히어로들의 활동에 어느정도는 제약이 가해져야 함에도 캡틴이 대책없이 반대만 한다는 시선 때문이었다. 일견 이해가 가는 이야기지만 영화의 맥락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캡틴은 법률 수정을 통해 히어로등록법에 찬성하려는 입장을 취했었다. 하지만 법에 반대하는 입장인 스칼렛위치가 아이언맨에 의해 감금되었다는 사실, 즉 히어로등록법이 시작도 되기 전부터 개인의 자유가 침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는 법을 거부했다.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유다.


<시빌워>에서 캡틴이 욕을 배부르게 먹었던 또 다른 이유는 캡틴이 친구인 버키 반즈를 구하기 위해 또 다른 친구 토니 스타크(아이언 맨)을 공격했다는 점에 있다. 버키 반즈는 윈터 솔져로 활동하며 수많은 요인들을 암살했고, 심지어 토니의 아버지까지 살해했다. 캡틴은 그런 버키를 구하기 위해 토니를 배신했다.



하지만 자유주의자 캡틴에게 이는 당연한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버키 반즈는 하이드라에게 세뇌당해 자신의 자유의지와 무관하게 암살자 노릇을 했다. 캡틴은 아무리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자유의지에 따라 저지른 일이 아닌 이상 온전히 개인에게 책임을 묻기 어려우며, 그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캡틴이 생각하는 자유다. (물론 토니 입장에선 그가 배신자인 건 당연하고, 버키반즈를 죽이고 싶은 것도 당연하다.)


캡틴의 자유주의자로써의 면모는 동료 시민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1940년대에 살다가 70년 만에 깨어난 백인이지만 흑인인 닉 퓨리가 쉴드 국장으로 자신에게 명령한다는 점에 한 번도 차별적인 시선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을 돕는 흑인 군인 샘 윌슨(팔콘)을 대할 때도 이런 태도가 전혀 없다. 1940년대 미국의 인종차별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대단한 태도인지 알 수 있다.


혹자는 "그냥 설정 오류 아니야?"라고 생각할 지 모른다. 아니다. 설정 오류가 아니라, 캡틴의 이런 태도는 그의 자유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설정이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계속 군인 시험을 보는 그에게 면접관이 묻는다. "왜 그렇게 독일인들과 싸우고 싶어하지?" 그러자 스티브 로저스(캡틴)가 답한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관심 없습니다. 그저 억압에 맞서 싸우고자 할 뿐입니다." 그는 이미 1940년대에 살 때부터 '억압에 맞서는 모든 시민은 동료'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유라는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는 데 있어 한치도 망설이지 않는다.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상대가 억압을 일삼는 자, 시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자라면 끝까지 맞서 싸운다. 그리고 그에게는 억압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하나로 모으는 힘이 있다. <퍼스트 어벤져>에서 적에게 끊임없이 얻어터지던 스티브 로저스가 계속 일어나면서 한 말이 있다. "i can do this all day." 포기하지 않는 자유주의자 캡틴아메리카가 어벤져스4에서 극강의 공리주의자 타노스를 물리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9.01.19 11:56

<갑자기 생각나서 쓰는 어벤져스4 예상 글>
(마블 팬으로서 그냥 재미로 써보는 썰이기에 틀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올해 5월 개봉을 앞두고 있는 "어벤져스4:앤드게임"의 주인공은 캡틴 아메리카가 될 것이다. 마블이 캡틴아메리카에게 보내는 마지막 헌사가 될 가능성도 높다. 아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어벤져스3: 인피니티워"에서 어벤져스는 타노스에게 두 차례 패배했다. 첫째는 물리적으로 패배했고, 둘째는 사상적으로 패배했다. 그 사상이란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할 수 있는가"이다.


타노스는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할 수 있다'는 신념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빌런이다. 급기야 다수와 소수의 균형을 반반으로 맞춘다. 그리고 그 희생대상에 자신까지 걸었다. 타노스가 핑거 스냅으로 우주의 절반을 날릴 때 그 대상으로 타노스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블 제작진이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



이런 극강의 신념을 지닌 타노스에 비해 어벤져스의 신념은 어떠 했나. 어벤져스는 타노스의 신념으로 타노스와 맞서려 했다. 완다는 마인드스톤을 지닌 비전을 희생시켜 타노스를 막으려 했고, 닥터스트레인지는 타임스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스파이더맨과 아이언맨이 죽어도 신경쓰지 않겠다고 말했다. "더 큰/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할 수 있다"는 태도로 타노스와 맞서려 했다. 애초에 이길 수 없었던 싸움인 셈이다.


그래서 타노스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타노스의 정반대에 서서 타노스만큼 강한 신념을 지닌 영웅일 수밖에 없다. 그 인물이 바로 캡틴 아메리카다. 캡틴 아메리카는 비전을 희생시키는 것에 끝까지 반대했다. 그 이유에 대해 "we don't trade lives”라고 말했다.




이런 캡틴아메리카의 성격은 '시빌워'에 잘 등장한다. 시빌워에서 캡틴아메리카는 '가장 원칙적인 진보 히어로'의 면모를 잘 보여주었다. 아이언맨을 위시한 일군의 히어로들은 정부가 만들려는 '히어로등록법'에 찬성했다. 히어로들이 지닌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히어로들이 지닌 자유를 제약할 수 있음에 동의했다. 그러나 캡틴아메리카는 이에 반대했다. 그건 미국의 가치에 어긋난다는 이유였다. 미국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미국 정부 전체와 맞섰다. 캡틴아메리카의 몸에 새겨진 미국의 국기는 미국정부, 미국이라는 국가가 아니라 자유라는 미국의 정신과 사상을 뜻한다.


인피니티워에서 타노스와 캡틴아메리카가 대면하는 장면이 나온다. 힘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타노스는 자신의 주먹을 이를 악물고 막은 캡틴아메리카를 보며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인다. 닥터스트레인지의 공격에도, 아이언맨의 공격에도 놀라지 않은 타노스가 한낱 인간에 불과한 캡틴아메리카의 공격을 보고 놀랐다. 그건 자신만큼 강한 신념의 소유자를 만난 것에서 느낀 감정이었다고 생각한다.



타노스의 핑거스냅으로 히어로들이 사라지고 캡틴아메리카를 위시한 일군의 히어로들만 남았다. 캡틴아메리카, 아이언맨, 토르, 호크아이, 헐크, 블랙위도우. 어벤져스1의 멤버들이다. 시빌워로 갈라지기 전 함께 뉴욕을 지켰던 동료들이다. 이 때의 리더가 캡틴아메리카였다.


인피니티워는 끝없는 싸움을 뜻한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킬 수 있느냐는 질문을 두고 서로 갈라져 대립한 역사는(누가 소수인가? 누가 희생되어야 하는가?) 인류 역사에서 끝없이 반복된 '인피니티워'였다. 그 게임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앤드게임) 그 부당한 질문을 거부하고 우리가 다시 하나가 되어 공동의 적을 향해 맞서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캡틴아메리카가 있다.


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6.10.23 15:20

“할머니는 왜 천천히 읽어?” 못 배운 게 한이 된 87명의 시인들

[서평] 보고시픈 당신에게 / 강광자 외 86명 지음 / 한빛비즈 펴냄

대학진학율이 80%에 달하는 시대, 갓난 아이에게 한글은 물론 영어까지 가르치는 나라다. 이 런 시대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이들에게 ‘글자를 모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글을 몰라서 발생하는 불편함은 겪어보지 못한 ‘보릿고개’ 같은 존재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2014년 국가평생교육진흥원 조사에 따르면 성인 100명 중 6명은 기본적인 읽기와 쓰기를 하지 못한다. 이런 비문해자들은 264만 명에 달하고 60~70대 여성 성인 10명 중 5~6명이 문해교육을 필요로 한다. 글을 배우지 못한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여러 사정으로 공부의 때를 놓쳤고, 나이 들어서는 자식 뒷바라지하다보니 60~70세를 훌쩍 넘겼다.

신간 ‘보고시픈 당신에게’는 각양각색의 이유로 한글을 모르고 살다가 뒤늦게 한글을 배우고 어르신들이 쓴 시와 산문 89편을 엮은 책이다. 저자는 늦깎이 한글학교 학생 87명이다. 고령이라 책이 출간되는 동안 세상을 떠난 저자도 있다.

인문학자 김경집은 “글자를 읽어내지 못한다는 건 삶의 커다란 귀퉁이를 하나 허물고 사는 것과 같다”고 했다. 비문해자들은 한글을 읽고 쓰는 게 익숙한 일반인들이 상상하지도 경험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다. 간단한 메모나 은행 업무는 물론 아이들 공부 한 번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안타까움과 설움, 글을 몰라 깜깜했던 평생의 이야기가 시와 산문에 담겼다.

▲ 보고시픈 당신에게 / 강광자 외 86명 지음 / 한빛비즈 펴냄

“나는 회사에서 한글을 몰랐을 때 누가 전화가 와서 사장님이 박옥남씨 이거 메모 좀 해줘 하면 가슴이 두근두근 하면서 너무 힘들었다”

“아이 낳고 출생신고를 하러 간 날 나는 죄도 짓지 않았는데 손도 떨리고 얼굴은 빨개지고 말도 못했다”

“아이들 어릴 적 성적표를 받아와도 볼 줄도 어디에 도장을 찍을 줄도 몰라 남편 도장을 성적표와 함께 들려 보냈다. 만약 그 때가 지금이었다면 잘했다 머리 쓰다듬어주고 도장도 진하게 찍어 보냈을텐데. 이젠 나도 내 이름이 박힌 도장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들이 은행에 가서 십억 보증서를 써달라 해서 은행에 갔는데, 이름을 못 써서 은행 직원이 내 손을 잡고 글을 썼다. 그 때는 너무 당황해서 땀을 팥죽 같이 흘렸다”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면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야 눈에 뭐가 들어가서 글씨가 안 보여. 노래 좀 찾아달라고 했다. 지금은 공부를 하고 나니 자신이 있어 두렵지가 않다”

“할머니 책 읽어줘. 세 살 먹은 손녀딸이 나에게 책을 읽어달랜다. 가슴이 벌컥 내려앉는다. 더듬더듬, 글자는 왜 이리 구불구불. 할머니는 왜 천천히 읽어? 할머니는 할 말이 없다”

글은 자신의 삶과 마음을 표현하는 도구다. 늦깍이 학생들이 먼저 떠난 배우자와 자식, 며느리에게 전하지 못한 메모는 뒤늦게 시와 산문이 됐다.

“여보, 미안해요. 내가 빨리 글을 알았더라면 당신 이해하고 좋은 안내, 좋은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었을 것을”

“우리 아저씨가 조금만 더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만 가셨다. 살았으면 내가 편지라도 했잖아”

“달력도 못 보는 시어머니, 한글도 모르는 며느리. 미워서 원망했던 시어머니도 답답하고 깜깜한 세월 참 힘들었겠구나 싶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 적어 편지 한 장 보내고 싶다.”

비문해자들에게 문해 교육은 단순히 글자를 읽고 쓴다는 것의 의미를 넘어선다. 시를 쓰고 산문을 쓸 수 있게 된 비문해자들은 모임을 만들고 사회에 참여한다. 문해교육은 세상을 연결해주는 창이자, ‘나를 위해’ 살 수 있게 만드는 첫 번째 작업이다.

“6연 전부터 몸이 아파요. 백병원에서 파키스병이라 함이다. 땀이 비오더시 헐러내림니다. 옷 두 벌 새 벌식 배림니다. 온 몸이 떨림니다. 그래서 글이 삐뚤삐둘함니다. 부끄럽지 안아요. 잘몬한 기 업서요.”

“어디를 가도 누구를 만나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헤어져 우물쭈물하지 말고. 그랬다. 내 무식이 알려질까봐 속으로 벌벌 떨었다. 요즘은 세상이 환하다.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겁이 안 난다.”

“어렸을 때 나는 학교를 다니지 못해 그 흔한 동창생이 없다.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듯 허전하다. 오십이 훌쩍 넘어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남들에게는 흔한 동창생, 나에게는 특별한 동창생 내일은 옆집 언니한테 가서 말해야지. 언니 나도 동창 모임에 가요!”

모두가 ‘디지털 3.0’을 이야기하며 모든 업무를 인터넷으로 처리하는 시대라고 말한다. 참 편해 보이는 디지털 시대, 이 수많은 비문해자들은 어디 가서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업무를 처리해야할까? 국가 지원이 필요한 문해교육 기관 중 실제 지원을 받는 곳은 1/3에도 미치지 못하고, 예산이 부족해 자원봉사자와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운영되는 곳이 다반사다. 문해교육이란 평생 남을 위해 사느라 글을 배우지 못한 이들에게 국가가 제공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가 아닐까.

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6.09.27 16:47

밀정, ‘너에게 독립운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리뷰] 암살과는 달랐던 밀정의 결말…흔들림과 망설임 속에 도달한 독립운동이라는 목적지


(영화 ‘밀정’과 ‘암살’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흥행하지 못한다” 이 법칙은 한동안 한국영화의 징크스였다. 이 징크스는 지난해 12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암살’(최동훈 감독)로 인해 깨졌다. 이후 ‘귀향’, ‘동주’, ‘덕혜옹주’ 등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영화가 이어졌다. 내편인지 네 편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스파이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밀정’도 일제강점기의 경성이 배경이다.  

‘암살’의 메시지는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라는 주인공 안옥윤(전지현 역)의 말에 압축돼 있다. 따라서 ‘암살’은 안옥윤이 해방 이후 친일파이자 독립군의 밀정이었던 염석진(이정재 역)을 처단하는 것으로 끝난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친일파 처단을 영화를 통해 이루는 일종의 판타지다.

▲ 영화 ‘암살’ 스틸컷

‘암살’에서 독립운동이라는 대의는 각기 서로 다른 배경과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황덕삼(최덕문 역)은 임무를 수행하다 사망하고, 목숨을 잃을 뻔한 속사포(조진웅 역)는 다시 총을 들고 현장에 나타나 친일파를 향해 총을 쏜다. 대장 안윤옥은 끝내 친일파 강인국을 암살하고, 밀정 염석진마저 처단하는데 성공한다. 영화 암살 속의 독립군은 하나같이 포기하지 않고 임무를 수행한다.

반면 ‘밀정’의 메시지는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 역)이 주인공 이정출(송강호 역)에게 건넨 말에 담겨 있다. “우리는 실패해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실패가 쌓이고 우리는 그 실패를 디딛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정출은 젊었을 적 독립운동에 몸을 담았지만 이후 일본경찰로 길을 바꾼다. 경부 자리까지 올라가며 출세가도를 걷는다. 민족반역자, 친일파라 불릴 만하다.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넌 독립이 될 것 같나?’라고 묻는 회의주의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정출은 일본 경찰의 명령으로 의열단의 밀정이 되기까지, 그리고 의열단원들을 돕는 모든 과정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관련기사 : 친일파? 독립운동가? 송강호는 어느 쪽 밀정이었을까

이정출은 의열단원들의 도움 요청을 거절하지 못한 채 기차에 탑승한 의열단원들에게 위험을 알린다. 하지만 늘 거리를 두려 한다. 그러면서도 의열단과 자신을 위협하던 일본경찰 하시모토를 쏴버린다. 잡혀온 의열단원 연계순(한지민 역)을 고문하라는 명령에 망설이지만 결국 고문을 집행한다. 의열단원 김장옥(박휘순 역)을 생포하려는 첫 장면부터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정출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 영화 ‘밀정’의 주인공 이정출(송강호 역).

그가 흔들리는 이유는 ‘밀정’ 속 등장인물들에게 독립운동이란 주어진 대의가 아니라 ‘질문’이기 때문이다. ‘밀정’의 등장인물들은 내내 ‘너에게 독립운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시달린다. 누군가에게 독립운동은 대의지만, 누군가에게는 대의가 아니다. 영화 속 의열단이 누가 밀정인지 누가 밀정이 아닌지 가려내기 위해 수많은 감정과 시간을 소모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밀정’ 속 의열단원들은 한없이 나약하다. 독립운동이란 대의로 똘똘 뭉친 것 같았던 김우진(공유 역)도 잡혀가는 연계순의 모습 앞에서 이성을 잃는다. 영화의 홍일점이라 할 수 있는 연계순은 ‘암살’의 주인공 안윤옥과 같은 강인함을 보여주지 못했다. 일본 경찰에 잡혀 고문당하고, 괴로워하다 사망한다.

이정출의 선택도 언뜻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출세가도를 달리던 그가 왜 의열단원이라는 고생길을 택한 것일까. 하지만 영화 속 그의 선택은 어느 순간 내려진 결단이 아니라 수많은 흔들림과 망설임 속에서 어느 새 도달해버린 목적지에 가깝다. 친구 김장옥의 죽음을 보며 느낀 복잡한 감정들 사이에서, 정채산을 잡겠다는 일념과 정채산이 보여준 신뢰 사이에서, 자신의 출세를 가로막는 하시모토의 등장과 자신에게 손을 내민 의열단 사이에서, 흔들리던 그는 어느새 폭탄을 들고 김우진이 다하지 못한 독립운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밀정’은 이정출이 어느 사건을 계기로 친일파에서 독립군이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이정출의 흔들리는 눈빛과 대사를 통해 그 선택의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따라서 이정출은 정채산이 말한 ‘앞으로 나아가는 실패’를 상징한다. 독립이 될 것이라는 확신도, 큰 대의를 품지도 못했지만 어느새 독립운동으로 나아간 이정출. 이 영화는 대한민국의 독립은 어쩌면 수없이 흔들렸던 독립운동가들의 수없이 많은 실패를 딛고 탄생했을지 모른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 영화 ‘밀정’ 스틸컷.
‘밀정’은 암살이 보여준 통쾌한 복수극 대신 의열단원이 된 한 밀정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낸다. 그 시점에서 이정출도 정채산도 그 누구도 자신들의 행동이 그냥 실패로 끝날지 ‘앞으로 나아가는 실패’였을지 확신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의 실패가 있었기에 더 나아갈 수 있었음을.


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6.09.03 17:13

http://slownews.kr/57507

“나는 ㅇㅇㅇ하려고 이런 짓까지 해본 적 있다”

몇 년 전 한 예능 프로그램은 연예인들이 출연해 자신의 독특한 경험을 공유하는 ‘있다/없다’라는 게임을 선보였다. 예컨대 A라는 연예인이 “나는 화가 난 애인의 화를 달래기 위해 이런 짓까지 해본 적 있다”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는데 나머지 사람들 중에 비슷한 경험이 있으면 A가 벌칙을 받는 게임이다.

대한민국 언론도 ‘있다/없다’ 게임 중이다. ㅇㅇㅇ의 빈칸에는 ‘먹고 살려고’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한다. 포털에 쏟아지는 수많은 어뷰징 기사와 기사로 둔갑한 광고와 협찬, 그리고 수많은 혁신의 시도들. 언론은 살아남기 위해 별짓을 다 하고 있다.

뉴스가 말하지 않는 것들 미디어오늘 기자들이 펴낸 신간 [뉴스가 말하지 않는 것들] (이 정환 , 정철운 , 금준경 , 차현아 , 강성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6)에는 위기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언론과 기자들의 몸부림이 담겨 있다. 언론은 독자들에게 저널리즘과 알 권리를 이야기하며 고상한 척하지만, 사실은 먹여 살려야 할 식구가 수십, 수백 명 딸린(많게는 수천 명) 기업이다. 이런 몸부림은 뉴스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뉴스에 이런 몸부림은 잘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의 제목이 ‘뉴스가 말하지 않는 것들’인 이유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 

이탈리아의 철학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위기를 “낡은 것은 죽어가고 있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시기”라고 정의한다. 언론이 처한 위기야말로 이 정의에 딱 들어맞는다. 모두가 지금의 수익구조로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점은 알지만,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았기에 쉽사리 혁신을 시도하지 못한다.

종이신문과 TV 뉴스의 권력은 예전 같지 않다. 조간신문으로 하루를 시작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유물로 전락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TV 앞에 앉아 9시 뉴스를 보지 않는다. 언론진흥재단 조사에 따르면 종이신문 열독률은 1996년 85.2%에서 2014년 20.2%로 뚝 떨어졌다. 20대는 온종일 종이신문으로 4.2분 동안 뉴스를 보지만 인터넷으로는 227분 동안 뉴스를 본다. 신문 편집이나 1면 기사는 더는 과거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신문 열독률 추이

출처: 한국언론진흥재단, ‘2015 언론수용자 의식조사’

하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뉴미디어는 말 그대로 ‘NEW’(새로운) 미디어일 뿐이다. 카드뉴스가 유행하면 카드뉴스를 만들어보고, SNS로 기사를 많이 본다니까 SNS 맞춤형으로 기사를 만들기 바쁘다. 포털에 대한 종속은 새로운 엘도라도, 페이스북에 대한 종속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이걸로 돈 버는 언론은 드물다. 기사에 대한 소비가 구독으로 잘 이어지지 않는다. “뉴미디어에 신경 쓴다”는 브랜드를 만드는 것 정도가 성과다. MCN이 뜬다지만 제대로 수익 내는 사업자는 아직 없다.

혁신과 안전 사이 

언론은 위험한 혁신 대신 안전한 방법을 택한다. ‘낡은 것’으로 돈을 벌 수 없다면 포장만 바꿔 새로운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아무도 보지 않는 광고 대신 기사를 가장한 광고를 만들어낸다. 광고가 모자라면 컨퍼런스나 포럼을 열어 기업 돈을 끌어당긴다. ‘뉴스가 말하지 않는 것들’은 뉴스가 말하지 않는, 뉴스가 말할 리 없는 언론기업의 장사방법을 속속들이 소개한다.

돈벌이 수단은 뉴스에 국한되지 않는다. 경향신문은 칼국수를 팔고, 조선일보는 마라톤 대회를 연다. 헤럴드미디어는 내추럴푸드 기업을 설립하고 한겨레는 카페를 열었다. 중앙일보는 자회사를 통해 인력파견, 용역업무 등 비정규직 관리업을, 또 다른 자회사를 통해 여행 사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업 다각화가 늘 수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경쟁력이 뛰어난 기업들과 경쟁해야 한다. 사업의 다각화는 뉴스에도 영향을 미친다. 부동산에 투자한 언론이 부동산에 대해 객관적으로 보도할 수 있을까?

경향신문의 칼국수집 '졍동국시' (출처: 네이버 지도 거리뷰 캡처)

경향신문의 칼국수집 ‘졍동국시’ (출처: 네이버 지도 거리뷰 캡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결국 언론의 생명을 빼앗아 가는 역설적인 상황. 그래서 언론이 위기일수록 언론에는 ‘선(善)’이 필요하다. ‘있다/ 없다’ 게임과 유사하다. ‘화가 난 애인을 달래기 위해’ 시도한 독특한 경험을 제시해야 하지만, 애인의 화를 달래기 위해 “자살시도를 했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 게임이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남들에게서 없는 독특함’을 개척하면서도 ‘다 같이 웃으며 공유할 수 있는 선’을 지켜야 게임이 유지된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혁신을 시도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면서도 동시에 ‘언론의 선’을 지켜야 하는, 아슬아슬한 고공 곡예를 펼쳐야 한다. 이 책은 이 선을 ‘저널리즘의 복원’이라 부른다. 어떻게 하면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에 부합하는 좋은 뉴스를 계속 생산하고, 뉴스 소비자들에게 이를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해야 한다. 스브스뉴스가 인기라지만 스브스뉴스가 SBS를 구원할 수는 없다. VR이 아무리 대세라도 VR이 뉴스를 구원할 수는 없다.

스브스뉴스

‘믿고 보는’ 브랜드 가치 

이 책이 소개하는 몇 가지 성공 사례에도 ‘언론의 선’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경향신문과 노컷뉴스, YTN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한 대표 사례로 꼽힌다. 경향신문 페이스북 계정 ‘향이네’는 언론사 사이트 중 빠르게 ‘좋아요’ 수를 채워나갔다. 노컷뉴스는 1년 만에 페이스북 좋아요 수를 45배 가까이 늘렸다. YTN은 페이스북 구독자수를 1년 6개월 만에 100배 가까이 늘렸다.

이들에게는 ‘좋아요’와 ‘구독자’라는 외연에 가려진 저널리즘에 대한 고민이 있다. 경향신문 향이네는 암컷을 ‘소유’하지 못한 수컷 물개는 황제펭귄을 강간한다는 충격적인 기사를 올렸다. 조회 수는 대박이 났지만 향이네는 앞으로 이런 기사는 올리지 않기로 했다. ‘선’을 지키기 위해서다.

노컷뉴스에게는 동영상이라는 콘텐츠가 있었다.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지는 영상은 다른 언론사보다 빨리 업로드됐고, 도달 수만 800만에 달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어린이 합창단이 추운 날씨에 외투도 없이 떨고 있는 영상은 700만에 가까운 도달률을 기록했다. 노컷뉴스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 했던 뉴스를 전달하며 ‘대박’을 쳤다.

YTN에게는 ‘제보 영상’이 있었다. 급박한 지하철 심폐소생부터 아찔했던 교통사고 순간까지, 시민이 제보한 날 것 그대로의 영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스토리를 담았다.

결국, ‘좋은 이야기는 널리 퍼진다’는 믿음으로 좋은 콘텐츠를 생산하고 ‘믿고 보는’이라는 수식어가 달린 브랜드를 만들어내는 것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언론 혁신의 본질이다.

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6.08.23 10:19

남자는 울면 안 돼? 남성을 억압하는 강요된 남성다움

[서평] 맨박스 / 토니 포터 지음 / 김영진 옮김 / 한빛비즈 펴냄


“코르셋을 벗자” 인터넷 커뮤니티 ‘메갈리아’ 유저 등이 사용하며 유행한 말이다. 코르셋은 체형을 보정하거나 교정하기 위해 사용되는 속옷을 뜻하지만, ‘코르셋을 벗자’는 말에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억압에서 벗어나자는 의미가 더해진다.

여성에게 ‘여성은 이래야 한다’는 ‘코르셋’의 억압이 있다면 남성에게는 ‘맨박스’(MAN BOX)가 있다. 신간 ‘맨박스’에는 남성들이 맨박스에서 벗어나야 인류가 행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저자인 미국의 사회운동가 토니 포터는 이 책의 단초가 된 TED 강연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남자다움을 의심하라고 말한다.

토니 포터의 동생 헨리는 열 살의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토니 포터의 아버지는 아들을 묻고 오는 길, 딸과 아내가 없는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아버지는 토니 포터에게 눈물을 보여서 미안하다며 사과하고, 울음을 참은 토니 포터를 칭찬한다. “남자는 울면 안돼!” 4~5살 밖에 안 된 남자 어린아이에게도 익숙한 ‘남성다움’의 규정이다. 우리에게도 이 말은 익숙하다. “남자 새끼가 뭘 그런 걸 가지고 질질 짜냐?”

“남자는 울지 않는다” 말고도 남성을 억압하는 남성다움은 꽤나 많다. “남성은 분노 이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남자는 쫄지 않는다” “남자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통제한다” “남자는 약한 것들을 보호한다”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약하다” “남자는 여자처럼 굴지 않는다” “남자는 게이처럼 굴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를 소유한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 등등. 강요된 남성다움의 십계명은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 맨박스 / 토니 포터 지음 / 김영진 옮김 / 한빛비즈 펴냄
한 남자아이가 여섯 명의 친구를 집에 데리고 왔다. 그 친구들은 모두 여자였다. 아이의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할까. “우리 아들 능력 있네” 아니면 “혹시 우리 아이가 게이일까?” 아버지가 묻는다. “그 여섯 명 중 누가 좋아?” 여섯 명 중 한 두 명의 이름을 언급하면 아버지는 안심한다. 

하지만 아들은 말한다. “아녜요. 다 친구에요.” 당장 반문이 돌아온다. “너희는 대체 뭘 하고 노니? 무슨 애깃거리가 있는데?” 남성은 ‘게이가 아니라면’ 여성을 진짜 친구로 둘 수 없다는 ‘맨박스’다. 맨박스는 진짜 남자라면 성적인 호감이 없는 한 여자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강요된 남성다움은 여성에 대한 왜곡된 시선으로 이어지고, 여성성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고착시킨다. 이런 메시지를 사회화한 남자 아이는 여자를 성적인 대상으로만 인식하게 된다. ‘남자는 울면 안 돼’를 학습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남성들은 감정표현은 여자들이나 하는 것이며 연약함의 증거라고 배운다. 여성은 자주 울고 감정 표현이 과다하므로 남성보다 불완전하며 열등한 존재라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토니 포터는 63세 남성 ‘짐’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짐과 친구는 35년 전 대학시절 바에서 여성 두 명을 만났고 저녁 내내 넷이서 술을 마셨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했다. 짐의 친구와 한 여성은 바로 침실로 향했다. 하지만 짐은 여성과 섹스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대신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20분 정도 지나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에게 가자고 말했다. 일을 서둘러 마치게 된 친구는 신경질을 냈다. 친구는 35년이 지난 지금도 짐을 만나면 “우리 대학 때 기억나? 네가 섹스하고 싶지 않아서 나까지 그만두고 나오라고 했던 일 말이야”

강요된 남성다움을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다. 여성과 관계를 형성하는 주목적은 성관계이며, 그 외의 관계는 관심이 없다는 맨박스의 가르침은 “남자라면 섹스를 거부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섹스 할 기회를 거부하는 남성은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토니 포터는 이런 발상이 “강간이나 성폭력 같은 폭력 상황을 일으키는 정신적 기반이 된다”고 말한다.  

박선영 한국일보 기자는 <‘여혐 팽배 사회’ 아들을 페미니스트로 키우는 방법>이란 제목의 칼럼에서 “아들을 페미니스트로 키우려는 엄마는 드물다”며 딸은 페미니스트로, 아들은 ‘남자답게’ 키우려는 전략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대신 “여성혐오 이슈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지금이야말로 딸과 아들 모두를 성 평등 의식 갖춘 아이들로 키우려는 노력을 고민해봐야 할 적기”라고 지적한다. 이는 딸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다. 가부장제는 소년과 남자들에게도 힘들고 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토니 포터에 따르면 아들을 성 평등 의식을 갖춘 아이로 키우는 첫 걸음이 ‘맨박스’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아들에게 울거나 이성 친구와 거리낌 없이 지낸다고 남자가 아닌 게 아니라고 가르쳐야 한다. 언제나 공격적이지 않아도 된다고, 남자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고 알려줘야 한다. 

남성들이 경직된 성 역할에서 벗어나야 여성들을 둘러싼 사회적 억압도 해체될 수 있다. 토니 포터가 “평범한 남성의 작은 변화가 모든 것을 바꾼다”고 말하는 이유다. 남성이 배워야할 것은 강요된 남성다움, ‘맨박스’가 아니라 남녀 구분 없이 모든 구성원이 힘을 모을 때 세상이 가치 있게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6.08.23 10:18

‘터널’에는 있었지만 ‘세월호’에 없었던 한 가지

[리뷰] 구조요청에 ‘응답’하며 생명을 살려낸 영화 터널, 우리 앞에 놓인 세월호는 어떤가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독일의 사상가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말했다. 한 공동체의 역사적 경험은 예술가들에게도 고민을 던지기 마련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세월호 참사가 그런 사건 중 하나다. 세월호 이후 탄생한 수많은 재난영화는 세월호를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터널’은 대놓고 세월호를 연상시키는 영화다. 자동차를 타고 집에 가다 터널이 무너지면서 터널 밑에 깔리는 주인공 이정수(하정우 역)는 우연히 세월호에 탔다가 바다에 빠져버린 304명의 희생자들을 연상시킨다. 

많은 장면에서 터널은 세월호를 소환한다. 구조차량이 주차할 장소까지 들어와 버린 방송국 차량과 피해자 가족과 정치인을 향해 쉴 새 없이 셔터를 누르는 사진기자들, 사고 현장에 나타나 사진을 찍는 정치인들의 모습까지 이 영화는 데자뷰처럼 세월호를 보여준다.  

▲ 영화 터널 속 이정수(하정우 역). 터널 스틸컷.
‘터널’의 붕괴사고도 기본적 수칙을 지키지 않은 데서 발생했다. 영화 속 건설사 관계자는 “대한민국에서 FM대로 지어지는 건물이 어딨나”라고 말한다. 세월호에도 그대로 적용된 법칙이다. 안전수칙은 무시됐고 그 자리를 ‘관행’이 차지했다. 

구조에 반드시 필요한 제설차는 도시의 눈을 치우느라 도착하지 못하고, 열악한 구조환경 속에서 한 구조대원이 사망한다. 세월호 참사 당시 구조현장과 사망한 민간인 잠수사를 떠오르게 하는 장면이다. 구조대원이 사망하자 터널에 갇힌 피해자 정수의 아내 세현(배두나 역)이 “너 때문에 죽었다”고 비난받는 모습도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다. 

세월호 참사 때 언론이 그랬던 것처럼, 이정수의 가족들에게도 ‘이제 그만하자’ ‘지겹다’는 여론의 무관심이 가해자로 작동한다. 구조작업 중단을 결정한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처럼 세현도 “국민들이 이제 그만하자고 한다”는 말에 구조작업을 중단하는 데 동의한다. 언론은 진실을 파헤치는 대신 패널들을 불러다놓고 ‘이정수가 살아있을지’ 잡담에 가까운 토론을 벌인다.

이 영화에서 가장 리얼한 인물은 김영자 국민안전처 장관(김해숙 역)이다. 노란색 작업복을 입고 나타난 김 장관은 피해자 정수의 가족과 인사를 나누며 사진을 찍고 다 죽어가던 정수가 구출되어 나올 때도 사진을 찍어야한다며 호송을 늦춘다. 구조작업으로 인해 다른 터널 공사가 늦춰지고 갈등이 발생하자 “잘 협의해라”는 막연한 지시만 내린다. 참사 발생 7시간 만에 나타나 “구명조끼를 입었다는 데 발견하기 힘드냐”는 질문을 던지던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 영화 터널 속 김영자 장관(김해숙 역). 예고편 갈무리.
세월호와 터널의 가장 큰 차이점은 결말이다. 세월호와 터널에는 기레기(기자+쓰레기), 사진만 찍으려는 정치인, 무책임한 장관, 가해자 취급을 받는 피해자 가족들이 등장하지만 세월호 희생자들과 달리 터널의 주인공 이정수는 35일 만에 가족들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결말의 차이는 세월호엔 없었던 인물, ‘터널’의 119구조대장 김대경(오달수 역)의 존재에서 비롯된다.

김대경은 무책임한 이들이 넘쳐나던 터널에서 거의 유일하게 책임지는 사람이다. 김대경 대장은 구조가 늦어질 때마다 책임을 미루는 대신 “정말 죄송하다”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한다. “물이 떨어지면 오줌을 마셔라”고 말하고 난 뒤 미안한 마음에 자신도 오줌을 마신다. “나도 안 해본 걸 남에게 시킬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의 공감능력은 인간성을 끝까지 유지시켜주는 원동력이다.

김대경이 상징하는 것은 ‘응답’이다. 이 응답이 세월호와 터널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모두가 구조를 그만하라는 상황에서 김대경은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냥 가버리면 미안하잖아”라며 홀로 터널 안으로 들어갔고 마침내 이정수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계속 누르고 있던 자동차 크락션 소리를 잡아냈다.

▲ 영화 터널 속 구조대장 김대경(오달수 역). 터널 스틸컷.
영화 터널에서 ‘응답’을 상징하는 또 다른 요소는 고립된 이정수가 유일하게 라디오를 통해 접할 수 있었던 클래식 방송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구조현장에 나타난 수많은 카메라 대신 이 클래식 방송이 정수와 그 가족들에게는 진짜 언론이었다. 클래식 방송은 구조현장에 나타나 카메라를 들이대고 자극적 장면을 쫓아다닌 기자들과 달리 매일 조용히 정수를 위로하기 위한 음악을 틀었고 정수의 아내 세현을 출연시켜 그의 목소리를 방송했다. 이 클래식 방송은 고립된 이정수에게 ‘잊지 않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터널의 해피엔딩 이후 다시 세월호를 생각한다. 진상규명을 위해 만든 특별조사위원회는 세월호 선체인양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조사를 끝마쳐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유가족 유경근씨는 18일 특조위 조사 기간 보장을 요구하며 무제한 단식에 돌입했다. 한국사회는 이들에게 응답하고 있을까? 김대경 구조대장은 경제도 어려우니 구조를 멈추고 터널 공사를 해야 한다는 한 전문가에게 이렇게 말한다. “깜빡하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저 안에 사람이 있어요.”


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6.05.29 19:37

박정희가 명문고를 강남으로 내려보낸 진짜 이유

[서평] ‘강남의 탄생’, 강남을 만든 네 가지 굴곡… 학생들이 두려웠던 군사정권, 투기적 욕망과 화학 반응

대한민국에서 강남은 욕망의 이름이다.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해 특권을 형성한다는 이유로 강남 밖의 사람들은 강남을 미워한다. 하지만 그들은 동시에 강남에 속하고 싶어 한다. 강남은 부정하면서도 선망하는 욕망의 이중성을 갖고 있다.

도 시연구자 한종수, 계용준, 강희용의 신간 <강남의 탄생>은 강남이 대한민국 사람들의 욕망으로 자리 잡게 된 과정을 추적한다. 지금 우리가 ‘강남’이라 부르는 지역은 1963년 이전까지 소달구지가 지나다니는 논밭이었다. 그런 강남에 대단지 아파트, 대법원과 경찰청 등 정부기관, 대형교회가 들어섰고 ‘8학군’이 형성됐다.

강남 개발사에는 현대사의 굴곡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첫 번째 굴곡은 ‘남북분단’이다. 1960년대 인구의 급증으로 서울(지금의 강북지역)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정부는 도심 기능을 분산시키고자 한다. 그 대안이 강남이었다. 저자들은 한국이 만약 분단국가가 아니었다면 국토의 전통적인 중심축인 서울-개성-평양 축에 있는 은평, 고양, 파주 쪽이 강남보다 먼저 개발되었을 것이라 말한다.

남북분단은 지금의 강남을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나아가 1960년대 후반 푸에블로 호 납치사건, 김신조의 청와대 습격사건 등으로 한반도가 극도의 긴장 상태에 놓이면서 박정희 정권은 서울 인구를 분산시키고 유사시 피난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강남 개발을 선택한다.

강남에 최초로 들어선 아파트는 1971년 완공된 논현동 22번지의 공무원아파트였다. 이후 강남에 대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강남구가 형성됐다. 이 시기 강남이주를 촉진한 요인은 1975년 4월 남베트남의 붕괴였다. 한국전쟁을 겪은 한국인들에게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 함락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은 “유사시 한강을 어떻게 건너지?”라는 고민을 던졌기 때문이다.

두 번째 굴곡은 민주화다. 1970년대 초 시작된 명문고의 강남 이전 정책의 배후에는 4.19혁명과 6.3학생운동에 대한 두려운 기억이 있다. 학생들의 힘을 알고 있는 권력집단에게 청와대와 중앙부처 가까이에 있는 서울대학교와 고등학교들은 매우 신경 쓰이는 존재였다. 이는 사립대의 지방 캠퍼스 이전 정책과 맞물린다. 정권은 학생운동권의 약화를 노리고 지방으로 사립대를 흩어놓으려 했다. 운동권이 약했던 여대는 지방캠퍼스를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 정부의 의도를 반증한다.

▲ 강남의 탄생 / 한종수, 계용준, 강희용 저 / 미지북스 펴냄

세 번째 굴곡은 97년 외환위기다. 강남 밖의 사람들과 강남이라는 욕망을 이어주는 기제는 사교육이다. 강남 밖의 사람들은 강남이 되기 위해 자기 자식을 강남의 학원에 보낸다. 저자들은 대한민국 사교육의 성지 대치동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평생 직장의 개념은 무너지고 이를 목도한 세대는 믿을 것은 자기 자신 뿐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대치동 학원들은 이들에게 ‘명문대 진학’이라는 현실적 목표를 손에 쥐어줬고 2000년대 들어 공교육을 흔드는 괴물이 됐다.

강남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반영인 동시에 대한민국 현대사에 몇 가지 신화를 남겼다. 그 신화 중 하나는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강남 개발은 온갖 특혜로 얼룩졌다. 유신의 실력자인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은 부동산 투기의 원조 격이다. 업자들에게 정보를 흘려주고 이들에게 받은 돈을 정권 유지를 위한 자금으로 썼다. 한보그룹의 정태수 회장은 수서, 일원 일대 개발을 위해 노태우 대통령에게 100억 원을 줬다.

또 다른 신화는 ‘강남불패’다. 강남 부동산 소유자들이 정부 정책을 결정하고, 강남의 집값은 떨어질 줄을 모른다. 강남은 부동산과 교육의 힘으로 금수저를 재생산한다. 강남 밖의 사람들은 강남 밖에서도 잘 살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대신 강남에 들어가고자 한다.

강 남에 들어갈 수 없다면 또 다른 강남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한다. 2008년 총선을 앞두고 불었던 뉴타운 열풍이 대표 사례다. 강북 시민들은 강남을 만들어주겠다는 뉴타운에 집권여당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 현상의 이면에는 ‘강남의 기적’의 주역이던 현대 경영자 출신의 이명박 대통령이 있었다.

이 책은 강남이 개발되면서 사라져버린 옛 기억의 장소를 차근차근 돌아본다. 강남은 지대가 낮아 물에 자주 잠겼고, 대대적인 수방 사업이 강남 개발에 필수적이었다. 수방 사업의 하나로 한강변에 제방을 쌓고 강변도로를 만들며 한강변은 사라졌다. 1970년대 초 압구정동과 옥수동 사이에 있던 저자도는 아파트 대단지 건설을 위해 골재로 채취되어 사라졌다.

지금도 기억의 장소들이 사라지고 있다. 강남의 개발 방식이 성공사례로 부각되면서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등 광역시는 물론 인구 10만 명도 안 되는 소도시도 강남을 따라 도시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신도심을 개발해 시청, 법원, 방송국, 터미널 등 알짜 시설을 옮겨놓는다. 구도심에는 기차역과 전통시장만 남는다. 대부분의 지방 도시는 특징도 없는 붕어빵 도시가 되고 구도심은 죽어버린다. 강남이 남긴 욕망의 그늘은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