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글 /기사

세월호 1년, 한국 언론에 던지는 7가

세월호 1년, 한국 언론에 던지는 7가지 질문

[기획] 언론의 빈 자리가 유독 컸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참혹했던 기억 가운데 하나로 남을 것입니다. 이 비극적 순간에 우리 앞에 등장했던 이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희망의 상징으로, 누군가는 절망과 분노의 대상으로 등장했습니다. 

미디어오늘은 세월호 참사 1년을 되돌아보며 뉴스의 중심에 섰던 인물 7명을 꼽아봤습니다. 참사 당일 7시간이나 행적이 묘연했던 박근혜 대통령과 45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했던 ‘유민아빠’ 김영오씨, 유일하게 세월호 유가족들이 믿고 의지했던 언론, JTBC의 손석희 앵커(보도담당 사장), 폭탄 발언으로 KBS를 흔들어 놓았던 김시곤 당시 보도국장, 세월호 사고 현장에서 10분 인터뷰로 27년 인생이 뒤바뀌었다는 홍가혜씨, 도피 행각으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가 시신으로 발견된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그리고 표현의 자유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입니다. 

이들의 지난 1년이 한국 언론에 던지는 질문을 살펴봅니다. <편집자 주>

박근혜의 1년 “구명조끼 입었다는데 발견하기 힘듭니까”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한 달 만인 5월 19일 눈물의 대국민담화를 내보냈다. ‘해경 해체’라는 전례 없는 조치도 이 때 등장했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다음 날인 4월 17일 팽목항과 진도체육관을 찾았고, 적극적인 구조를 약속했다.

1년이 지난 지금 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외면과 침묵이 이어졌던 탓이다. 유민아빠 김영오씨를 비롯한 세월호 유가족들이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해달라며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으나 대통령은 “여야가 할 일”이라는 답만을 남겼다. 유가족의 손을 잡고 위로해 준 이는 박 대통령이 아니라 프란치스코 교황이었다. 그러면서도 박 대통령은 올해 신년 기자회견에서 “세월호 유족 분들은 여러 번 만났다”고 밝혔다.

참사 초기부터 국가는 없었다. 박 대통령은 참사가 발생한 지 7시간 만에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찾아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었다는 데 그렇게 발견하기 힘듭니까”라고 물었다.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국회에 나와 “(참사 당일) 대통령이 어디 계셨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고, ‘대통령 7시간’을 둘러싼 논란까지 벌어졌다.

세월호 1주기를 앞둔 현재 ‘특별법 시행령’ 폐기 요구가 이어지지만 박 대통령은 여전히 이에 대해 답이 없다. 오히려 1주기인 4월 16일 콜롬비아, 페루, 칠레, 브라질 등 남미 4개국 해외순방에 나선다. 비판여론이 일자 청와대는 “1주기 행사 참석 후 출국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의 세월호 1년은 외면과 침묵의 1년이었다. 

그러나 대통령 탓만 하기에는 언론의 책임도 크다. 언론은 너무 쉽게 세월호를 잊었고 본질을 왜곡했고 여론을 호도했다. 비극이 계속되고 있지만 비판의 칼날은 무뎠다. 대통령의 불통의 배경에는 언론의 무관심과 무력감이 있었다.

김영오의 1년 “굶어서 쓰러지는 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도 자신이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지난해 세월호 특별법을 요구하며 45일간 단식 농성을 했던 유민아빠 김영오(48)씨다. 그는 지난해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큰 딸 유민이를 잃었다. 유민이는 사고 8일째에 ‘올라왔다’. 너무 깨끗하던 딸의 모습을 보고 그는 부검까지 고민했다. 익사인지 저체온증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딸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어 포기했다. 

참사 석 달 후인 7월, 그는 단식을 시작했다. 당시 김씨는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혼해서 살다보니 애한테 해준 게 너무 없어요. 해주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해줄 수가 없고. 그래서 내가 목숨 걸고 단식하는 거야. 굶어서 쓰러지는 거, 유민이한테 못 해준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의 단식 농성은 45일간 지속됐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를 만나면서 그는 더욱더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됐다.  

하지만 그에게 우호적인 보도만 있었던 건 아니다. 일부 언론들은 “아이들을 고아원에 버리라고 했다” “양육비를 주지 않았다” “딸들을 버려두고는 귀족 취미인 국궁을 했다” 등의 논란을 키웠다. 그는 자신과 딸들이 가까웠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생전의 휴대전화 카카오톡 대화를 공개해야 했고 양육비를 보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통장 거래 내역까지 공개해야 했다. 잔인했다. 

세월호 1주기를 하루 앞둔 지금까지도 그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앞서 지난 2일에는 삭발을 했고 며칠째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천막도 없이 쪽잠을 자고 있다. 무급 휴직으로 그나마 유지하던 회사도 그만뒀다. 이번에는 세월호 특별법을 옭아매는 시행령 때문이다. 당시 가족들은 “머리를 깎는다는 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유가족들은 불통하는 정부와 맞서는 동시에 국민들의 무관심과 망각에 맞서야 했다. 언론은 날마다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보상금이나 노리는 사람들로 매도했고 이들의 피끓는 호소를 외면했다. 그게 이들이 1년이 다 되도록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다.

유병언의 1년, 잡히기만 하면 다 해결될 것처럼 요란 떨었는데…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이 세월호 참사 국면에서 미친 영향은 짧고 굵다. 세월호 참사 100일을 앞둔 7월 21일 그가 사망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40일 전인 6월 12일 전남순천에서 발견된 변사체가 알고 보니 유병언 전 회장이었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믿지 못했다. 유병언이 어딘가에 살아있다거나, 시체가 뒤바뀌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현실 탓이다. 검찰은 대규모 검거작전을 벌였으나 헛발질을 하고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의 사체가 발견된 지 18일이나 지난 6월 30일 “(유병언을) 반드시 잡아 구상권을 행사해야한다”고 당부했다.

유병언 일가와 청해진해운은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4월 말부터 언론에 등장했고, 검찰이 검거 작전을 벌인 5월 초 언론은 유병언 일가 및 구원파의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의 장남 유대균씨와 ‘호위무사’로 알려진 여인 박수경씨의 성격, 그들이 먹은 음식에 대한 온갖 소소한 ‘단독’보도가 나왔다. 언론은 유병언 일가를 슈퍼맨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세월호 참사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라졌다.

유병언은 해결된 것 없는 세월호 참사를 상징한다. 온 나라가 유병언만 잡으면 참사가 해결될 것처럼 떠들썩했으나 1년이 지난 현재 그와 청해진해운에 대한 구상권 청구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희대의 여론조작으로 불릴만한 사건이었지만 정작 이에 동조한 언론의 반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남은 것은 구원파의 언론중재위원회 조정건수 ‘1만 6554건’뿐이다.

김시곤의 1년 “KBS 사장은 대통령만 보고 가는 사람”

김시곤 당시 KBS 보도국장의 한 마디는 KBS를 뒤흔들었다. 그는 ‘세월호 보도참사’로 KBS에 대한 국민적 여론이 최악이던 지난 5월 9일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와 비교했다며 논란이 일자 기자회견을 열고 보도국장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길환영 KBS사장을 향해 “언론에 대한 가치관과 식견도 없이 권력의 눈치만 보며 사사건건 보도본부의 독립성을 침해해온 길환영 사장은 즉각 자진 사퇴해야 한다”고 비수를 꽂았다. 

김시곤 보도국장은 당시 “(길 사장은) 윤창중 (성추행)사건을 톱뉴스로 올리지 말라고 한 적도 있다”고 폭로했으며, 이어진 JTBC와의 인터뷰에서 “길환영 사장은 대통령만 보고 가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세월호 관련 보도에서 청와대의 개입이 있었음을 시인했다. KBS와 청와대와의 ‘유착관계’를 KBS 보도국장이 인정한 사건은 그 자체로 파문이었다. 김 전 국장의 발언 이후 KBS 양대노조가 공정보도 쟁취를 위한 총파업에 돌입했고, 결국 길환영 사장은 해임됐다.

김시곤 전 국장의 한 마디는 KBS를 살렸다. KBS는 사장 교체시기를 거치며 자사보도에 대해 반성했고, 이후 공정보도 가이드라인을 내놓으며 변화를 도모했다. 세월호 이후 KBS와 MBC의 결정적 차이는 김시곤 전 국장과 같은 보도국 책임자의 성찰과 내부고발의 유무라고 할 수 있다. 김시곤 전 국장은 현재 KBS 방송문화연구소 소속으로, 회사가 통보한 정직 4개월 징계가 부당하다며 징계무효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시곤 전 국장의 ‘소신 발언’은 두고두고 언론계에 회자되고 있다.

손석희의 1년, 팽목항엔 그나마 JTBC가 있었다

세월호 참사 실종자가족이 모여 있던 진도체육관에는 커다란 TV가 두 대 있었다. 밤 9시가 되면 두 대 모두 JTBC <NEWS9>에 고정됐다. 2014년 언론계를 상징하는 한 장면이다. 

JTBC 기자들은 팽목항에 오래 남아 있었다. 한 실종자 가족은 “JTBC만 본다. 다른 방송에 비해 훨씬 신뢰가 간다. 정부 비판을 조금이라도 하는 방송은 여기뿐이다. 다른 곳은 정부 좋은 말만 한다”고 말했다. JTBC는 4월 27일 세월호 사고 희생자인 단원고 2학년 이승현 군의 아버지 인터뷰를 12분간 내보냈고, 많은 시청자들이 아버지의 눈물을 보며 함께 울었다.

JTBC 기자들은 국제엠네스티 언론상을 받았다. JTBC 보도국은 세월호 참사보도 이후 기자들의 사기가 한껏 진작됐다. JTBC에 대한 신뢰도 또한 KBS를 능가할 만큼 성장했다.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 언론인 손석희가 있었다. 

2014년 손석희의 활약은 역설적으로 권력에 순치된 한국의 언론현실을 투영했다. 세월호 피해자 가족은 방송사 카메라를 쫓아냈지만 JTBC에는 먼저 찾아가 제보했다. 손석희는 팽목항에서 수일간 생방송을 진행했다. 기자들은 매일매일 진도 팽목항 현지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진정성이 느껴졌다.

손석희는 4월 21일 방송에서 실종자 가족이 전화 인터뷰 직전 딸의 시신 발견으로 자리를 비웠다는 소식을 전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 영상은 유튜브에서만 100만 명이 넘게 시청했다. 세월호 참사가 낳은 언론에 대한 극한의 불신은, 역으로 ‘손석희와 JTBC’에 대한 극적인 신뢰로 나타났다. 신뢰를 잃은 공영방송과 편파적인 종합편성채널이 손석희의 영향력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홍가혜의 1년, 10분 인터뷰로 27년 인생 뒤바뀌어

2014년 4월 18일 오전, 홍가혜(27)씨는 종합편성채널 MBN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민간 잠수사로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해경에서 지원해준다고 했던 장비며 인력이며 배가 전혀 지원되지 않고 있다” “갑판 하나 사이 벽 하나를 두고 신호도 확인했고 대화를 했다.” 이 발언으로 홍씨는 101일간 구속됐고 8개월가량 재판을 받았다. 거짓말로 해경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였다. 

올해 1월 재판부는 홍씨를 무죄라고 판단했다. 홍씨의 인터뷰와 개인 카카오스토리에 올린 글이 다소 과장되거나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사항이 포함돼 있다 해도 그 주요 동기가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대가를 치른 다음이었다. 당사자 확인조차 하지 않은 마구잡이식 언론보도로 신상은 ‘털렸고’ 수감 기간 동안 암 진단을 받기도 했다. 

홍씨는 올해 초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10분 인터뷰로 27년 인생이 바뀌었는데 후회를 안 할 수가 있나”라며 “자살까지 생각했다”라고 심경을 전했다. 언론은 재판 과정에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내용들에 대해서 여전히 기사를 생산했다. 제목만 ‘과거 논란’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역시 당사자 확인은 없었다. 그는 현재 해당 언론사들을 상대로 법적 대응을 진행 중이다. 

마녀사냥을 방불케 했던 홍씨에 대한 일련의 보도는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와 패거리 관행이 어떻게 본질을 호도하고 진짜 중요한 뉴스를 가리는지에 대한 반면교사가 됐다.

가토 다쓰야의 1년 “박근혜·정윤회 만남 허위” 황당한 재판 결론

박근혜 정부는 황색저널리즘으로 유명한 일본 산케이신문의 서울지국장 가토 다쓰야를 한 순간에 언론자유 투사로 만들었다. 가토 다쓰야는 2014년 8월 3일 <박근혜 대통령 여객선 침몰 당일 행방불명… 누구와 만났을까>란 제목의 칼럼 기사에서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을 둘러싼 논란을 거론하며 박 대통령이 당시 정윤회씨와 함께 있었다는 증권가 찌라시 내용을 소개했다. 

그러자 검찰이 그를 기소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였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재판장 이동근)는 지난 3월 30일 “정윤회씨의 휴대전화 발신지 추적기록, 청와대 경호실 출입 관련 공문, 정윤회씨와 점심을 먹었다는 이모씨의 증언을 종합해볼 때 가토 전 지국장이 기사에 게재한 소문의 내용은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로 허위”라고 밝혔다. 재판부가 쟁점의 진위 여부를 판결문이 아닌 판결 도중에 결정내린 것은 이례적이었다.

법원이 직접 “박 대통령과 정윤회씨가 세월호 참사 당일 만났다는 소문은 허위”라고 결론 낸 이번 사건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대통령이 직접 해결해야 하는 논란을 사법부에서 대신 처리해준 꼴이기 때문이다. 외신보도까지 통제하려는 박근혜 정부의 태도는 국제적 망신거리로 남았다. 가토에 이어 산케이신문 신임 서울지국장이 된 후지모토 긴야는 외신기자증을 발급받지 못했다. 보복성 조치였다. 

한국 언론이 하지 못한 질문을 일본에서도 극우 성향으로 통하는 산케이신문이 대신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 대통령의 7시간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있고 언젠가부터 언론은 질문하기를 멈췄다. 
한 동안 출국금지 상태였던 가토 전 지국장은 지난 7일에서야 출국금지가 해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