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과거 글/한겨레 hook

노르웨이 참사’라는 정치 투쟁

지난 22일 노르웨이에서 끔찍한 참사가 일어났다. 노르웨이 현지시각으로 오후 3시 30분 경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의 정부청사 근처에서 차량 폭탄으로 보이는 테러가 발생해 7명이 숨졌고, 오후 5시 30분 경에는 오슬로에서 30km 떨어진 우토야 섬에서 열린 집권 노동당 청소년 캠프장에서 한 남성이 총기를 난사해 85명이 숨졌다. 경찰은 정부청사 테러와 총기난사의 용의자로 32세의 노르웨이인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을 체포했다. 그는 극우 성향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로, 이민자들을 널리 수용하는 집권 노동당의 다문화주의 정책에 반발하여 이러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어떤 범죄가 발생했을 때, 그에 대한 가장 쉬운 분석은 그 원인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이번 노르웨이 참사도 마찬가지이다. 브레이빅이 미쳤다고 한다면 문제는 매우 쉬워진다. 브레이빅이 범행 전 약물 복용을 했고, 정신상태가 온전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폭력적인 게임을 즐겨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유럽의 몇 몇 극우정당들은 이민자들을 몰아내자는 브레이빅의 주장과 동일한 주장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미치광이를 처벌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범죄를 방지하는 대안을 제시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문제는 쉬워진다. 우리는 브레이빅처럼 미치지 말아야 한다. 좀 더 부드럽게 표현하자면, 우리는 우리 사회 내의 다른 타자들을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지 말고, 그들을 보듬는 관용을 발휘해야 한다.

한국의 보수언론들은 노르웨이 참사를 보도하면서 하나 같이 이런 목소리를 냈다. 보수언론의 노르웨이 참사 관련 사설과 칼럼들을 살펴보자.

“한국에서도 내실 있는 다문화 정책을 펴나가면서 소외아동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1)(최연혁, “노르웨이 테러 불러온 北歐 가족 해체”, 조선일보 7월 27일자 시론)

닫힌 마음으로는 대한민국이 글로벌시대에 계속 발전해갈 수가 없다.”2)(오태진, “외국인 혐오”, 조선일보 7월 26일자 만물상)

“우리나라는 유럽 국가와 처지가 다르고 다른 문화, 다른 인종, 다른 종교에 열린 태도를 취해야 글로벌 시대에 역동적인 국가로 발전할 수 있다.”3)(동아일보 7월 26일자 사설)

“사회구성원들이 소외된 이웃의 친구가 돼주기 위해 적극 노력을 한다면”4)(주성하, “탈레반 테러만 위험한건 아니다… 전세계에 경종 울린 증오범죄”, 동아일보 7월 25일자 기자의 눈)

“테러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약화될 때 고개를 내민다. 혼자 살 수 없는 것이 세상인 만큼 다를수록 서로 이해하고 함께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존과 관용의 정신이 전제돼야 한다.”5)(중앙일보 7월 25일자 사설)

보수언론은 ‘배려와 관심’, ‘열린 태도’, ‘공존과 관용’, ‘친구 되기’ 등의 단어를 사용해가며 다문화주의를 옹호하고, 포용과 관용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또, 과연 이번 참사에서 브레이빅이 경멸하고 혐오했던 ‘다문화주의’가 바로 보수언론들이 역설하는 그 ‘다문화주의’일까?

다문화주의는 단순히 다양한 문화가 한 공동체 내에서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며 아름답게 공존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문화주의란, 나의 문화적 정체성과 시민적 권리 사이에 아무런 상관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한 공동체에서 특정한 문화적 정체성을 지닌 그 누구도 그 공동체의 시민적 권리에서 배제당하지 않는다, 이것이 다문화주의다. 따라서 다문화주의는 단어 자체가 지닌 탈 정치적인 뉘앙스와는 달리 매우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다. 정치를 고전적인 의미에서 ‘공동체의 재생산’이라고 정의한다면, 다문화주의란 한 공동체를 재생산할 권리를 누구에게 부여하는가라는 문제(이민자들에게도 그 권리가 있다!)와 관련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참사를 통해 드러난 ‘다문화주의’의 문제는 보수언론들의 주장처럼 ‘이민자들을 포용하고 열린 태도로 이들을 대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문제는 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느냐 마느냐’이다.

브레이빅이 반대한 다문화주의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다문화주의다. 그는 실업자 양산, 범죄의 증가, 복지비용의 증대와 같은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 기독교 백인들의 고유한 영토였던 유럽을 침입해 들어온 (이슬람) 이민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이슬람 이민자들을 수용하고, 그들에게 유럽이라는 공동체 구성원이 누리는 권리, 시민권을 부여하는 다문화주의라는 정치이념을 증오했던 것이다. 미국의 외교 문제 전문가인 존 페퍼가 이번 사건에 대해 “유럽의 극우파들이 경멸하고 공격하는 이슬람 교도 등 이민자들은 장기판의 말일 뿐, 사실 이번 사건은 유럽 내 이데올로기 전쟁이 극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설명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브레이빅이 이슬람교도들을 혐오했다면 모스크를 테러하면 될 일이다. 이슬람교도들에게 꺼지라고 외치면서 그들에게 총기를 난사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브레이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모스크 대신, 노동당 출신 총리집무실이 있는 정부청사를 테러 했고, 이슬람교도들에게 총기를 난사하는 대신 노동당 청소년 캠프에 참여한 노동당 당원들을 무자비하게 쏴 죽였다. 그는 그가 척결해야 할 대상이라고 믿는 그 대상들 대신에, 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국가권력, 정확히 말하자면 집권여당을 향해 총을 쏘았다. 그것도 앞으로 그 집권여당의 핵심 인물이 될 청소년들을 향해 말이다. 그의 학살은 단순한 증오범죄가 아니라, 정치적인 요구를 담은 ‘폭력적 선전술로써의 테러리즘’이다.

이것이 브레이빅이 저지른 테러를 단순한 미치광이의 범행으로 ‘평가절하’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테러라는 방식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지 유럽의 극우정당들은 이미 많은 부분 브레이빅이 했던 주장을 반복해왔다.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등지에서 강세를 보인 극우정당들은 브레이빅이 한 말과 별로 다르지 않는 공약을 내세우며 시민들로부터 지지를 확보했고,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에서는 다문화주의가 실패했다며 보수적 이민정책이 등장하기도 했다. 브레이빅처럼 테러를 하지 않고, 폭력을 쓰지 않았을 뿐 유럽의 수많은 극우정당과 이들을 지지하는 이들은 관대한 이민정책을 지지하는 이들을 상대로 이데올로기 투쟁을 전개하며, 정치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마리오 보르게지오 유럽의회 의원이 브레이빅에 대해 "폭력 부분을 빼면 일부는 훌륭하다"고 말하고, 네덜란드 극우정당 지도자 헤이르트 빌더스가 테러를 비난하면서도 반(反)이슬람주의 자체는 '평화지향적인 사상'이라고 주장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심지어 영국 극우단체 '영국수호동맹'(EDL) 대표는 반이슬람주의자들에게 감정을 표현할 민주적 수단을 제공하지 않으면 브레이빅 같은 '괴물'이 또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노르웨이 참사는 테러라는 급진적인 방식을 띠기는 했지만 분명히 유럽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데올로기, 정치 투쟁의 한 단면이자, 그 기반이 탄탄한 극우세력들의 목소리의 반영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정치투쟁은 현 시기 노동운동과 노동자 정당에 대한 커다란 위협이자 도전이다. 현재 세계정세 속에서 (특히) 이슬람권으로부터 들어오는 이민자들에게 관대한 정책을 취한다는 것은 현 시기 노동운동이 내걸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본태도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태는 오늘날 유럽 노동운동의 가장 중요한 대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6) 또한 우리는 누가 좌파이고 누가 우파인지, 이념적 경계가 점점 흐트러지는 현실에서 이민정책에 대한 태도가 유럽에서 누가 좌파이고 우파인지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척도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외국인 이민에 반대할수록 우파, 포용적인 이민정책을 추진할수록 좌파로 분류된다. 이민자들에게 관대한 정책을 취한다는 것은 유럽에서 좌파를 표방하는 정당, 정치세력이 내걸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본태도이다. 브레이빅의 테러가 대표하는 극우정당들의 반 다문화주의, 관대한 이민정책에 대한 반대는 유럽의 노동자 정당, 좌파정당에 대한, 더 나아가 이 정치세력들이 기반하고 있는 노동운동과 노동계급의 연대에 대한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투쟁이다. 옌스 스톨텐부르크 노르웨이 총리가 “이것은 노르웨이의 노동운동에 대한, 노르웨이의 노동당과 그 청년조직에 대한 공격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러한 도전에 대해, 스톨텐부르크 노르웨이 총리는 너희 같은 꼴통들하고 타협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지난 24일 오슬로 대성당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우리의 대응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개방성, 더 많은 인간애”라고 말했다. 노르웨이를 더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나라로 만들겠으며, 브레이빅이 내세운 반 이슬람, 반 이민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극우파들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그리고 유럽에서 이 투쟁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단일한 문화라는 이유로 브레이빅이 노르웨이의 모범 사례로 제시한 한국에서, 점점 외국인 이민자의 비중이 늘어가는 한국에서 앞으로 이 문제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이번 참사를 미치광이의 소행으로만 파악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5년 전 작가 브루스 바워가 이슬람과 이민자, 다문화주의에 반대하기 위해 쓴 책의 한 구절을 빌려 말해보자. “결국 유럽의 적은 이슬람교도나 이슬람 급진주의자가 아니다. 유럽의 적은 유럽 자신이다.”7)

각주

1)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7/27/2011072702356.html
2)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7/26/2011072602199.html

3) http://m.donga.com/MColumn/3/04/20110726/39076826/2

4) http://news.donga.com/Column_List/3/04/20110725/39047444/1

5)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643/5841643.html?ctg=
6) [메모] 노르웨이 참사(http://socialandmaterial.net/?p=1155)

7) 김봉규, “"왜 백인을 공격했냐고? 백인들이 진짜 적이니까”, 프레시안, 2011.07.29.(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10727233142&Section=05)

 

<한겨레 훅>에 기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