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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지난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에서 울려 퍼졌던 ‘헌법 제1조’라는 노래의 한 구절이다. 헌법 1조 1항을 그대로 읊는 이 노래는 이명박 대통령과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터져 나오던 촛불집회의 주요 테마곡이었다. 그러나 헌법 제1조는 더 이상 ‘반(反)새누리당’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다.
‘헌법 제1조’는 새누리당의 원내대표인 유승민 의원의 입에서 나왔다. 8일 원내대표직 사퇴 의사를 밝힌 8일 유승민 의원은 “평소 같았으면 진작 던졌을 원내대표 자리를 끝내 던지지 않았던 것은 내가 지키고 싶었던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법과 원칙, 그리고 정의”라며 “나의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유 의원은 또한 “다소 혼란스럽고 불편하더라도 누군가는 그 가치에 매달리고 지켜내야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다”며 “지난 2주간 나의 미련한 고집이 법과 원칙, 정의를 구현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그 어떤 비난도 달게 받겠다”고 강조했다.
유 의원의 이 발언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한 방 먹인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박 대통령은 의원들이 투표로 뽑은 여당 원내대표를 찍어내려 했고 친박계 의원들은 이에 동조해 유 원내대표 사퇴를 추진했다. 이 과정이 민주주의적이지 않았으며 헌법 1조 1항에 어긋난다고 주장한 셈이다.
유 의원의 이 발언은 야권에게도 한 방 먹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간 야권은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을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정치세력’이라고 비판했다. ‘불통’을 넘어 ‘독재’라는 비난도 자주 나온다. 야당은 지난 대선 때도 박근혜 후보에게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오에 대해 물으며 대선 구도를 민주화 세력 대 반민주화‧독재 세력 간의 대결로 만들었다.
야당은 ‘유승민 찍어내기’도 비슷한 구도로 해석했다. 민주주의를 무시하는 박근혜 대통령이 마음에 안 드는 여당 원내대표를 몰아낸 사건. 박수현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변인은 현안브리핑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 세력은 ‘배신자 유승민’을 쫓아내는데 성공했는지는 모르지만, 국민들은 국민 위에 군림하며 국민을 ‘핫바지’로 여기는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태도를 차갑게 지켜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박 대통령이 여당 원내대표까지 좌지우지한다는 점을 ‘민주주의에 반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유승민 의원은 박 대통령에게 맞선 정치인이 됐다. 그냥 고개를 숙인 것이 아니라 의원총회가 사퇴를 결정할 때까지 2주간 버텼고, 원내대표직을 던지면서 ‘헌법 제1조’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말을 남겼다.
야권이 그간 새누리당으로 대표되는 보수 세력을 비난하던 주요 논거 중 하나를 유승민 의원에게 빼앗겨 버렸다면 과장일까. 당사자가 유승민 의원이라는 점이 더 의미심장하다. 유 의원은 지난 4월 국회에서 “가진 자, 기득권 세력, 재벌대기업의 편이 아니라, 고통 받는 서민 중산층의 편에 서겠다”며 성장과 복지의 균형 발전을 도모하고 자유시장경제와 한국 자본주의의 결함을 고치겠다고 밝혔다. 야권이 주장하던 바와 큰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기에 새정치민주여합도 유 의원의 연설에 찬사를 보냈다.
그러던 유 의원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정치적 탄압을 당하며 ‘헌법 제1조’까지 가져가버렸다.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는 지난 대선에서 야권이 주장해 왔던 경제민주화와 복지 공약을 대거 가져갔고 결국 집권에 성공했다. 야권이 중도층을 향해 ‘우리가 더 경제민주화, 복지를 잘할 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야당 의원들은 유 의원이 원내대표직을 사퇴하자 유 의원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유승민 의원의 존재로 이제 야당의 주요한 카드 중 하나가 사라졌다. 독재 대 민주화가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는 점이 더욱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야당은 유승민 의원을 응원하는 것을 넘어 경제민주화, 복지에 이어 헌법 1조까지 빼앗긴 상황에서 어떤 메시지를 던져야할지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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