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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글/미디어스 칼럼

대선 이후, 남 탓과 무책임을 넘어 진보에 대해 고민하자!

대선 이후, 남 탓과 무책임을 넘어 진보에 대해 고민하자!

[조윤호의 우파의 시대에 살아남기]
조윤호 / '보수의 나라 대한민국 ' 저자

대선이 끝난 지 5일이 지났다. 대선에 관한 이야기도 점차 줄어드는 분위기다.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후보가 당선되지 않아 ‘멘붕’했던 이들도 점차 일상으로 돌아가고, 자신이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어 열광했던 이들 역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대선의 후폭풍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의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지 당내 논란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여타 정치세력도 대선 이후의 정국에 관해 머리를 굴리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이명박에 이어 박근혜 정부의 5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민주정부 10년에 이어 우파정부 10년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우파들은 민주정부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렀다. 훗날 진보세력은 우파정부 10년을 뭐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진보적인 시민은 우파정부 10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연합뉴스

 

대선을 둘러싼 각종 책임론

트위터나 페이스북, 아고라 등 인터넷 공간에서는 아직도 대선을 둘러싼 ‘책임론’이 진행 중이다. 나는 이전에 미디어스에 올린 글에서(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486) 민주진보세력의 대선 패배 요인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박정희 향수를 불러일으킨 경제문제의 해결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독재 대 민주주의의 구도로 선거를 끌고간 점. 둘째, sns 등을 통한 진보담론이 서울을 제외한 지방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점. 셋 째, 투표율이 높으면 야당에게 유리하다는 오판. 하지만 민주진보세력을 지지하는 많은 이들이 보기엔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는 모양이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특히 민주진보세력이 밀집한 인터넷 공간에서) 첫 번째 책임론은 ‘20대 개새끼론’이다. 20대가 50대만큼 투표하지 않아 민주진보세력이 졌다는 것이다. 20대의 투표율은 65.2%이고, 50대 투표율은 89.9%이다.(선관위가 공식 발표한 수치는 아니다) 선거가 끝나기도 전부터 트위터에는 ‘투표장에 20대가 안 보인다.’ ‘20대 투표 좀 해라’라는 협박성 글들이 올라왔다. 그리고 선거가 끝나고 박근혜가 당선되자 20대 개새끼론이 인터넷 공간에서 터져 나왔다.

나는 65.2%가 꽤 높은 투표율이라 생각한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신경 쓸 여력이 없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지닌 20대들이 무려 65%나 투표한 건 대단한 일이다. 실제로 이는 지난 대선보다 약 18% 상승한 수치이다. 또한 투표한 20대 중 약 33%, 즉 3분의 1은 박근혜를 찍었다. 대체 20대 투표율이 높으면 민주진보세력이 승리할 것이라는 판단이 어디에 근거하는지 모르겠다. 하긴 저 ‘깨어있는 시민’들은 20대 투표율이 높은지 낮은지는 관심이 없다. 유일한 관심사는 자기네들이 지지하는 민주진보세력이 승리하느냐 마느냐이다. 노무현이 당선되었던 2002년 20대 투표율은 약 56.5%였고, 박원순이 서울시장으로 당선된 2011년 10.26 서울시장 선거에서 20대 투표율은 약 35%였다. 그런데도 당시 언론과 민주진보세력은 20대가 세상을 바꿨느니, 소외받은 20대가 투표로 응답했느니라며 온갖 20대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았다. 이번 대선의 20대 투표율은 노무현과 박원순이 승리하던 때보다 높다. 하지만 20대를 욕하는 깨어있는 시민들은 그런 변화에 관심이 없다. 중요한 건 민주진보세력이 승리하느냐 마느냐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책임론은 ‘이정희 책임론’이다. 많은 언론들이 투표율이 경이적으로 높았던 50대를 인터뷰하며 이런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정희가 박근혜-문재인과의 3자 토론에서 박근혜에게 너무 몰아붙이듯이 토론을 주도해, 이에 거부감을 느낀 장년층과 노인층이 투표장으로 대거 몰려와 박근혜를 지지했다는 것이다. 이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이정희를 탓하거나 대선 패배의 책임을 이정희에게 돌리는 것이 타당한지는 모르겠다. 많은 문재인 지지자들은 이정희가 박근혜를 시원하게 까준다며 오히려 좋아하지 않았던가? 쟁점 없는 대선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좋아하지 않았던가? 나아가, 이정희가 ‘왜’ 문재인이 어떻게 하면 승리할지를 고민하면서 토론에 임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이정희는 존재감이 미미한 독자후보였고, 토론을 통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정당의 존재감을 알려야하는 처지였다. 더욱이 문재인 캠프는 이정희 캠프에 단일화나 선거연대를 제안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가급적이면 같은 편으로 보이지 않기 위한 제스처를 취했다. 통합진보당 사태나 종북 이미지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정희가 문재인에게 가급적이면 피해를 입히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토론에 임해야 하는 걸까? (심지어 이는 후보 등록 전에 사퇴한 심상정의 사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문재인 캠프가 심상정 캠프에 먼저 단일화의 손길을 내밀거나, 정책 협상을 하자고 말한 적이 있던가?)

세 번째는 이정희 책임론과 유사한 ‘군소후보 책임론’이다. 이번 대선에서 박근헤와 문재인을 제외한 강지원, 김순자, 김소연 등이 독자후보로 출마했다. 군소후보의 존재감이 워낙 미미했던지라 지난 2010년 지방선거에 비해 군소후보 책임론은 등장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몇몇 깨어있는 시민들은 대선패배의 책임을 군소후보에게 돌리고 있다. 다 합쳐야 1%도 안 되는 후보들이 따로 출마한 게 문재인이 박근혜에게 진 거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또한 김소연, 김순자 후보의 지지자들 중에 박근혜가 싫어서 문재인을 찍은 사람들도 있다. 군소후보 책임론은 이런 비판적 지지자들의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다. 더욱이 군소후보가 영향력이 미미하니까 단일화나 선거연대 등 아무런 관심도 없었으면서 선거에 지니까 이제 와서 군소후보 탓을 하는 건 정말 꼴불견이다.

이 세 가지 책임론보다 더욱 가관인 네 번째 책임론은 ‘노인 책임론’이다. 정중하게 표현해서 그렇지 한 마디로 ‘노인 개새끼론’, ‘가난한 서민 노인 개새끼론’이다. 이명박 찍은 국민 욕하는 ‘국개론(국민 개새끼론)’의 다른 판본인 듯하다. 인터넷에는 노인복지를 없애달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노인들을 고려장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한미FTA가 되건 민영화가 되건 자기는 관심 끄고 불우이웃돕기도 안 하며 살겠다는 글들도 있었다. (이런 주장의 근저에는 ‘나는 복지나 경제민주화에 큰 이해관계가 없지만 힘든 서민들을 생각하여 복지나 경제민주화를 주장해왔는데 그걸 모르고 박근혜를 찍다니’라는 시혜적인 태도가 담겨 있어서 매우 불편하다.)

이 깨어 있는 시민들은 경제위기를 실감한 노년층이 안정된 변화를 위해 박근혜를 지지했으며 민주진보세력이 경제문제의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는다. 박근혜가 집권하면 어떻게 될지 한 번 당해보라고 노인복지 없애고 다 죽게 놔두자고? 그러면 그 사람들이 민주진보세력을 지지할 것 같은가? 박근혜에 대한 열광은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줄 지도자에 대한 신앙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 민주통합당 선대위 해단식 ⓒ연합뉴스

 

진짜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어디로?

이러한 책임론 공방 속에서 진짜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사라졌다. 가장 큰 책임은 민주당에 있다. 지금의 광경은 4.11 총선의 데자뷰다. 4.11 총선 때도 당연히 새누리당이 패배할 줄 알았으나 오산이었다. 정권교체만 부르짖던 민주당 대신 변화를 보여준 새누리당이 승리했다. 그러나 총선 패배 이후 민주당은 총선에서 왜 졌는지에 대해 자체적인 분석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다. 여전히 정권교체였고, 독재자 박근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대선에서 패배하자 “이길 선거를 졌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황당하다.”는 반응 일색이다. 지난 21일 열린 의원총회에서도 “(대선 패배에 대한) 분석은 나중에 하자”, “적을 두고 내부끼리 공격해선 안 된다.”, “문재인 후보 때문에 진 것”이라는 주장들이 난무했을 뿐 민주당이 어떤 책임이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선전했다며… ‘쇄신’ 없는 민주당”, 경향신문, 2012.12.23) 아마 이러한 내부의 논란은 친노와 비-친노 간의 권력 다툼 양상으로 진행될 것이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또 있다. ‘사회원로’니 진보재야인사니 하는 훈수꾼들이다. 소위 시민사회의 재야원로들은 원탁회의 등을 구성해 항상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이번 대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이번 대선에게 한 게 도대체 뭘까? 문재인과 안철수의 후보 단일화를 압박했다. 안철수가 출마하자마자 단일화를 해야 한다며 문재인과 안철수를 압박했고 단일화에 진척이 없자 "무소속 대통령이 여야를 두루 아우르며 더 잘할 수 있다는 발상은 비현실적"이라는 성명까지 냈다. 일부 인사들(소설가 황석영 등)은 단일화 중재안을 내놓으며 사실상 안철수를 압박해 안철수 캠프의 반발까지 샀다. 결국 단일화는 ‘단일화를 위한 단일화’ 외에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이는 많은 야권 지지자들이 문재인 후보에게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아마 기회가 될 때마다 이 재야원로들은 선거판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판이 잘못되면 나 몰라라 다시 재야로 돌아가는 짓을 반복할 것이다.

 

남 탓과 무책임을 넘어 진보에 대한 고민으로

나도 대선에서 박근혜가 승리한 뒤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왜 박근혜가 된 걸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대선 후 소위 깨어있는 시민들이 인터넷에 올리는 글들을 보며, 남 탓에 무책임으로 무장한 그들의 모습을 보며 왜 졌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세력을 확장하고 보수적인 노인층의 지지를 받을지, 20대에게 더 많은 지지를 받을지 고민하지 않은 채 그들이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았다며 개새끼라 욕하는 정치세력에게 무슨 미래가 있을까. 이들에게 비판적 지지를 보낸 진보정당의 정치인들이나 진보좌파들 또한 민주당과 깨어있는 시민들이 왜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비판적 지지’의 대상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우파의 시대를 살아가는 진보세력에게는 대선패배의 책임을 남에게 돌릴 시간, 책임져야 할 이들에게 면죄부를 줄 시간이 없다. 한진중공업의 노동자와 현대자동차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금도 철탑 위에 노동자들이 있다. 경제위기의 심화로 벼랑 끝에 내몰린 저소득층과 비정규직이 있다. 문용린 교육감의 정책 변화로 다시 싸움을 준비해야 하는 청소년들도 있다. 여전히 사회의 차별과 싸우는 성소수자, 장애인들도 있다. 이들이 보수우파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버티고, 또 승리할 수 있으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할지 차근차근 고민해야 할 때이다. 이번 대선에서의 박근혜의 승리가 남 탓과 무책임을 넘은 진보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미디어스>에 기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