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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 /기타 칼럼 기고

난독증 환자들의 나라

http://www.naeilshot.co.kr/Articles/RecentView.aspx?p=3KBPc0gc7lq3rtjezzDbf%7Eplus%7E2oBWDWWWm%7Eplus%7EKB9OlmbhRXM%3D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인터넷을 사용했고, 중학교 때부터 인터넷 커뮤니티나 사이트에서 활동했다. 지금도 다양한 온라인 매체에 글을 올리고 있다. 아무도 트위터에 관심이 없던 때부터 트위터를 사용하면서 모르는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이처럼 나는 인터넷에서 글을 쓰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문화에 익숙한 편이다. 하지만 내가 여전히 익숙해지지 못한 인터넷 문화가 있다. 왜 사람들은 글을 읽지도 않고 욕하는 걸까? 왜 제목만 보고 댓글을 다는 걸까? 내가 한겨레 훅에 글을 올릴 때마다 난독증 환자들의 댓글이 줄을 이었다.‘온라인 민주주의’는 무슨 ! 이건 그냥 쓰레기통이었다. 온라인에서의 글쓰기를 통해 내 의견을 제시하면서 사람들과 소통해보려던 나는 허탈감에 빠졌다.


특히 글이 길고 어렵다고 욕을 하는 건 이해할 수 없는 풍토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데 친구의 말이 너무 길고 어려워서 이해를 할수 없다고 치자. 이때의 정상적인 반응은“무슨 말이야? 다시 한번 말해줘.”이지 “XX가 말 더럽게 어렵게 하네.”가 아니다. 나는 처음에 이러한 현상이 익명성이라는 인터넷의 특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네티즌들이 익명성 뒤에 숨어 누군가를 공격하고 헐뜯는 것처럼, 남의 글을 읽지도 않고 그냥 똑똑한 척 하는 것 같으니까 몰려들어 공격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주변의 어른·친구·동생들을 보면서 이러한 현상이 단순히 인터넷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책이나 신문도 많이 읽고, 책을 몇 권 썼다는 사실을 아는 어른이나 친구, 동생들은 ‘쉬운’책을 추천해달라고 한다. 나는 정말 고심에 고심을 다해 쉽게 쓴 나의 책이나 기초적인 사회과학 서적을 추천해 준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나에게 “너무 어렵다. 더 쉬운 거 없느냐”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더 쉬운건 없다. 어디가 어려운가. 나랑 이야기해보자”라고 말한다. 친구는 머뭇거린다. 그러다가 “사실은 내용이 어려운게 아니라 책을 읽지 못하겠어”라고 고백한다. 자기 자신도 이게 문제라는 건 알겠는데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으면 엉덩이가 근질거려 못 견디겠다는 것이다. 한 문장 넘어갈 때마다 딴 생각이 나서 진도가 안 나간다는 거다.


나는 독해에도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문맹이 아니라면 모든 글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몸을 움직일 수 있다고 축구를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축구를 잘하려면 드리블 훈련도 받아야 하고 체력훈련도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면서 글을 읽기 위해서는 독해력훈련이 필요하다. (실제로 한국이 문맹률은 매우 낮지만 실질문맹률에 해당하는 ‘문서해독능력’은 OECD 국가들 중 꼴찌라는 보도도 있었다.)


사람들이 문자나 카카오톡, 미니홈피나 트위터의 짧고 간략한글에 익숙해짐에 따라, 긴 호흡을 가지고 차분히 읽어야 하는 글, 맥락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긴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그렇다고 SNS를 없앨 수는 없다. 방법은 교육을 통해 어릴 때부터 독해력 훈련을 시키는 방법뿐인데, 사고력보다(순간) 암기력을 길러주는 우리 나라의 교육현실에서는 이조차 요원하다. 쌩뚱맞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이러한 현실은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 진보주의자들에게는 암담한 현실이다. 보수우파들은 기득권세력이기 때문에 굳이 자신의 가치를 다른 사람들에게 쉬운 언어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또한 이미 보수의 가치는 이해하기 쉬운 즉물적인 언어다. 하지만 진보의 언어는 복잡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현재 대한 문 앞에서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농성 중이다. 보수는 ‘불법점거’라는 깔끔한 언어로 설명한다. 하지만 진보는 이들이 왜 여기 있는지, 그 복잡한 맥락을 설명해야 한다. 사안을 이해하는 독해력이 부족한 이들에게 진보는 끊임없이 ‘쉽게 말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물론 쓸데없이 어렵게 말하는 진보주의에 대한 비판은 타당하다. 하지만 진보가 쉬운 언어를 쓴다 해도, 그것이 보수의 즉물적인 언어보다 더 ‘쉬울’ 순 없다. 진보는 단순히 쉬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넘어서 사회 전체의 독해력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어떻게’는 나도 모르겠다. 사실이 글도 어렵다고 욕먹지 않을지 걱정이다.

<대학내일>에 기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