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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classic

정의는 자연적인가 인위적인가

 


도덕에 관하여

저자
데이비드 흄 지음
출판사
서광사 | 2008-04-3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근대 경험론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를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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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종종 덕스러운 행동을 한다. 정의로운 행동을 별 부담 없이 하기도 한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어르신들을 보면 자리를 양보하고, 지나가다 거리에 쓰레기가 버려져 있으면 주워서 버린다. 하지만 내가 이런 행동을 하고 난 뒤 그는 의문이 있다. “나는 왜 이런 행동을 한 걸까?” 칸트라면 나의 이런 행동이 ‘네 마음의 도덕법칙 때문’이라고 말했을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라면 ‘네가 그렇게 행동해야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칸트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과는 달리 매우 단순하다. “나의 정의로운 행동은 자연스러운 본능에 따른 행동일까 아니면 법과 도덕, 사회적 규범 때문일까?” 이에 대해 대답해 줄 수 있는 철학자는 아마 흄일 것이다.


흄에 따르면, 정의는 인위적인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흄은 덕에 대한 감각, 정의가 자연적인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우리가 누군가가 정의로운 행동을 했다고 말할 때,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 ‘동기’이다. 우리가 칭찬하고 찬동하는 것은 그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을 산출한 동기이다. 그렇다면 그 동기의 근원은 무엇인가? 


유덕한 행동, 정의로운 행동을 하게 만드는 독립적 원리가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와 같은 행동을 수행할 역량을 가진 독립적 원리가 인간 본성에 있으며 또 원리의 도덕적 아름다움이 그 행동을 값지도록 한다는 것이다.”(56)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고,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내가 누군가에게 돈을 빌렸다면, 나는 왜 그 돈을 갚아야 하는가?


“내가 눈곱만큼이라도 정직하거나 의무감과 책임감을 눈곱만큼이라도 가졌다면 내가 정의를 존중하고 나쁜 행동과 속임수를 싫어한다는 것이 나의 이유로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일정한 규율과 교육을 통해 수련 받은 계몽된 상태의 사람에게는 이 대답이 분명히 옳고 충분하다. 그러나 거칠고 더욱 자연스러운 조건의 사람은 이 대답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궤변적이라고 물리칠 것이다.”(56)

물론 사적인 이익이나 평판 때문에 돈을 갚을 수도 있지만, 이는 사적인 이익이나 평판에 관심이 있을 때에만 유효하다. 이 관심이 중단되는 경우 돈을 갚을, 정의로운 행동을 할 동기는 사라져버린다.

어떤 이들은 정의로운 행동을 할 동기가 “공공의 이익에 대한 존중”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역시 실제로 그렇지가 않다. “공공의 이익은 인간의 일반성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고 숭고한 동기이며, 정의와 통상적 정직을 갖춘 행동에서 빈번하듯이 사적 이익과 상반된 행동에서 어떤 힘을 가지고 작용한다.”(58)


흄은 이러한 반론을 통해 인간은 ‘인류애’ 같은 정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물론 인간은 ‘공감’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을 사랑할 수 있으며, 자신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타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수도 있다. 이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정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념은 매우 제한적이고 편파적이다. 같은 나라 사람을 사랑할 수 있지만, 내 가족과 친지를 사랑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힘들다.


공공의 이익이나 인류애가 정의로운 행동의 동기가 될 수 없다면, 사적인 자비나 자기 집단의 이익에 대한 존중이 정의로운 행동의 동기가 될 리는 더욱 만무하다. 내가 사정이 급하면 사적인 자비는 금방 사라질 테고, 자기 집단이라고 생각했던 이가 나에게 손해를 미치는 경우 그에 대한 관심과 사랑도 사라질 것이다.


흄은 이러한 논증을 통해 정의는 인간의 자연적인 본능이나 정념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법률 준수의 공정성과 그 가치가 없다면, 우리가 정의의 법칙을 준수할 실질적으로 보편적인 동기를 자연적으로 갖지 않는다.”(61) “정의와 불의에 대한 감각은 자연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며, 비록 필연적이라 하더라도 교육 및 사람들의 묵계 등에서 발생한다,”(61)


그런데 흄은 이 대목에서 우리를 헷갈리게 만든다. 덕과 정의가 자연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덕의 감각보다 자연스러운 인간 정신의 원리는 결코 없으므로 정의보다 자연스러운 덕은 없다,”


어떻게 정의가 인위적인 동시에 자연적일 수 있을까? 첫 째, 인간의 ‘필요’에 의해 정의는 자연적일 수 있다.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사회를 필요로 하며, 그리하여 사회를 ‘발명’한다. “발명이 명백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에, 사유나 반성의 개입 없이 근원적 원리에서 직접적으로 유래된 것과 마찬가지로 발명도 자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할 것 같다.” 이성 간의 자연적 욕망에 의해 남녀는 결합하고, 가족과 혈족이 꾸려진다. 자기 집단을 사랑하고 아끼는 자연스러운 정념을 지닌 인간들은 서로 충돌한다, 이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은 사회를 만들고, 안정적인 삶(예컨대 소유권)을 유지하려 한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집단에 대해 편파적인 사랑을 한다는 인간의 정념에서 기인하여 사회가 구성되고, 정의의 법칙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정념이 방치되는 것보다 절제를 통해 더욱 만족되는 것이 명백하므로, (중략) 사회를 유지함으로써 우리가 더 많이 소유하게 되는 것은 명백하므로”(72) “정념 자체는 스스로를 억제”(72)한다. 즉 정의의 기원은 인간의 욕구에 비해 부족한 자연 자원, 인간의 자기중심성과 편파적 사랑(한정된 관용)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의는 ‘자연적인’ 것이다. 인간의 자연적인 정념과 욕망에서 ‘인위적인’ 정의가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의가 자연스러운 정념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정치인들은 사람들을 보다 쉽게 통치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정의에 대한 존경과 불의에 대한 혐오를 나타내도록 애쓴다.” 공적인 비난과 칭찬이 정의로운 행동에 가해지면서 사람들은 정의를 내면화한다. 특히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이 될 어린이들은 어렸을 적부터 이러한 정의를 내면화한다. “명예에 대한 소감은 어린이들의 여린 정신에 뿌리 내릴 수 있을 것이고, 또 이 원리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확고부동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원리들은 우리 본성에 가장 본질적인 것이며, 우리 내부적 구조에 가장 깊이 붙박여 있다.”(83)


이 때 우리는 ‘자연적’이라는 말을 희귀하고 비일상적인 것에 반대되는, 일상적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우리가 일상적인 의미로 자연적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이 어디에나 있다면, 도덕성에 대한 소감도 어디에나 있을 것은 확실하다. 도덕성에 대한 소감이 전혀 없고 인간의 행동 양식에 대한 찬동이나 혐오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는 국가와 개인은 세상에 결코 없기 때문이다.”(49)


정리하자면, 흄은 정의의 속성을 인위적인 동시에 자연적인 것이라 말했다. 정의는 인간 본성에 그

동기를 내재하고 있지 않으며,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서는 인위적이다. 하지만 정의가 자연적 욕망과 정념에 의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는 점에서 자연적이다. 또한 한 사회가 그러한 정의감을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에게 교육하고, 그리하여 ‘일상적인’ 도덕성에 대한 소감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자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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