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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classic

인간은 존엄하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저자
임마누엘 칸트 지음
출판사
아카넷 | 2005-08-2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를 번역한 책. 윤리형이상학 정초는 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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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 사는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여러 상황에 직면한다.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가하는 물리적. 구조적 폭력과 전쟁 앞에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의심하게 된다. 인간이 복제되고 대량 생산되는 미래를 상상하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과연 존중받고 도덕적으로 대우받을 권리를 지닌 존재인지를 의심하게 된다. 이런 시대에도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계몽주의 시대에 살았던 칸트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칸트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경험적 사실들과 시대적 상황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모두 소거하고 남는 ‘순수한 선험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이 존엄성을 지닌 이유는 인간이 자율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율은 인간의 모든 이성적 자연존재자의 존엄성의 근거이다.”(161) 그렇다면 인간 존엄성의 근거인 ‘자율’이란 무엇인가? 자율(自律)이란 스스로 법칙을 수립하고, 그에 복종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만이 ‘자율’이 가능한 존재일까?


이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선의지’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칸트에 따르면, 선의지만이 그 자체로 선하다. “이 세계에서 또는 도대체가 이 세계 밖에서까지라도 아무런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을 것을 오로지 선의지뿐이다.”(77) 칸트는 선의지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선한 행위를 진짜 선한 행위라고 판가름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한다. 우리는 흔히 행동의 결과를 보고 선한 행위를 했다고 평가하곤 한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노인이나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청년을 보고 ‘착하다’라고 말한다. 또한 우리는 그 행동의 동기를 파악하여 선한 행위를 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어떤 청년이 할머니의 무거운 짐을 옮겨주다가 실수로 그 짐을 떨어뜨려 짐이 상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렇다고 해서 그 할머니가 청년에게 욕을 한다면 사람들은 할머니가 이상하다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그 청년이 결과적으로는 할머니에게 피해를 주긴 했지만 할머니를 돕고자 했던 ‘동기’가 선한 것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에 따르면 자리를 양보하는 청년이 선한지, 짐을 옮겨주는 청년이 선한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칸트에 따르면 선한 행위의 기준은 선한 동기나 좋은 결과가 아니라 선의지이다. 청년이 주위 평판이나 사회적인 눈초리(사회적 약자를 배려해야 한다.) 때문에, 무언가의 이익이나 보상을 바라고 자리를 양보했거나 무거운 짐을 들어주었다면, 그는 선한 것이 아니다. 그 청년은 내면의 의지가 아니라 타율에 의해 행동했기 때문이다. 다른 조건들이 변화한다면 그는 선한 행위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의 경향성에 따라 다른 행동을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선한 행위의 기준은 내면의 의지, 옳은 행위를 오로지 그것이 옳다는 이유에서 택하는 의지, 선의지이다. “선의지는 그것이 생기게 하는 것이나 성취한 것으로 말미암아, 또 어떤 세워진 목적 달성에 쓸모 있음으로 말미암아 선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의욕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말해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79) 다른 말로 하면, 선한 행위는 오로지 ‘의무로부터’ 나와야 한다. 어떤 행위가 언제 변할지 모르고 타율적인 자신의 이해관계나 사회적 압력이 아니라, ‘해야만 하기 때문에 행위 하는’ 의무에서 기인할 때 그 행위는 참으로 선하다.


인간이 이런 선의지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판단이 선행해야 한다. 이는 결코 경험으로부터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순수 이성을 지닌 이성적 존재자만이 이러한 판단을 할 수 있다. 인간이 바로 이 이성적 존재자에 포함된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자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윤리형이상학 정초> 2절에 따르면 인간이 자연법칙과 윤리법칙, 둘 다의 지배를 받는다는 의미이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3절에 따르면 인간이 감성계와 예지계(지성계) 둘 다에 속해 있다는 의미이다. 인간 역시 동물처럼 자연적 법칙과 자연적 경향성의 지배를 받는다. 다른 말로 하면 감성계에 속해 있다. 동물들처럼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자연법칙으로부터 독립된 법칙을 세우고, 이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윤리법칙의 영향을 받는다. 인간은 외부로부터 강제되는 타율, 자연법칙에 따르지 않고 새로운 법칙을 수립할 수 있는(자율) 지성계에 속해 있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은 자연적 경향성만이 아니라 자신이 세운 그 법칙 자체에 대한 존경에 의해 행위 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자다. 배가 고파도 인간은 자신의 원칙에 따라 밥을 먹지 않고 다른 행위를 하거나, 살을 빼기 위해 식사량을 조절할 수 있다. 반대로 ‘자신의 의지에 따라’ 배가 고프지도 않은 데 밥을 먹을 수 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계획과 자기 원칙에 따라) 다이어트와 폭식이 가능한 이성적 존재자다. 졸려도 잠을 자지 않고 공부를 하고, 수면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자가 인간이다.


그러나 ‘순수 이성’의 측면에서 인간이 지성계에 속해 있고 자연적 경향성에 따르지 않고 자율적으로 의무로부터 행위 ‘할 수 있다’고 해도, ‘실천 이성’의 측면에서의 과제는 남는다. 실제로 안다고 해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일종의 강요이자, 자기에게 부과하는 명령이다. 이 명령이란 이성적 존재자가 자신에게 가하는 명령이며, 법칙이다. 인간은 법칙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감성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 법칙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정언 명령이라는, 자연적 경향성과 같은 외부의 조건에 따라 변화하지 않고 늘 따라야 하는 명령이자 의무가 필요하다.


칸트는 구체적인 정언명령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 하라.”, “마치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 하라.”(132) 이 첫 번째 정언명령에서 인간이 존엄성이 드러난다. 자율적인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이 자신의 준칙/법칙/의무를 수립할 때, 그는 그것이 보편적인 입법이나 준칙으로 기능할 수 있을지를 고려해야만 한다. 자신의 행위가 특수하고, 자신 만에게 유용한 것이 되느냐가 아니라 인류 보편의, 세계 보편의 법칙이 될 수 있는 지를 늘 고민해야 하는 존재자가 인간이다. 이런 보편적인 법칙을 수립하려는 인간의 자기 법칙수립적인 자율성이야말로 인간 존엄성의 근거다.


두 번째 정언명령은 다음과 같다.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간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 하라.”(148)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은 자신과 다른 이들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한다. 그리고 그 법칙은 인간의 자율성에 의해 생겨나 인간 스스로가 복종한 법칙이다. 칸트는 이러한 인간들로 구성된 목적의 왕국에서 모든 것은 가격이나 존엄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가격을 갖는다는 것은 그것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 다른 것과 교환가능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목적의 왕국에서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없는, 모든 가격을 뛰어넘는 어떤 것은 존엄성을 갖는다. 인간의 자연적 경향성과 필요 등은 가격을 가지며, 다른 것으로 대체된다. 그러나 “어떤 것이 목적 그 자체일 수 있는 그런 조건을 이루는 것은 한낱 상대적 가치, 다시 말해 가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내적 가치, 다시 말해 존엄성을 갖는다.”(159)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는 법칙을 수립하는 인간의 자율성이야말로 인간 존엄성의 근거다.

이처럼 인간 존엄성의 근거가 자율성이라는 칸트의 주장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인간이 왜 존엄성을 갖느냐는 질문에 대해, 인간은 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있을 수 있다. 인간이 그러한 천부인권을, ‘자연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칸트가 제기하는 대답은 그러한 천부인권, 자연법과는 거리가 있다.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날 때부터 권리를 지닌 존재라는 것은 타율적으로 정해진 것이며, 자연적 경향성이다. 또한 인간이 천부인권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은 ‘자연적’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보장해줄 수 없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 시기, 이러한 천부인권은 국가나 정부에 의해 보장받는 시민권 아래에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칸트는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천부인권이나 자연적 경향성, 그리고 이를 보장하는 국가나 정부의 시민권에서 찾지 않았다. 그는 철저하게 인간 내면의 의지에서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찾아냈다.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외부의 무언가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자율’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칸트는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자율성에서 찾음으로써,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철저히 인간 내면에서 발견했다. 인간의 존엄성은 국가나 정부, 자연 등 외부의 그 무엇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인간은 존엄하다. 왜냐하면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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