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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인문, 사회과학

혁명에 대해 올바로 사유하는 방법

 


세계를 뒤흔든 열흘

저자
존 리드 지음
출판사
책갈피 | 2005-06-1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미국의 진보적 언론인 존 리드가 쓴 이 책은 20세기에 가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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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수업용으로 간략하게 쓴 글.

내가 '러시아에 관한 책'을 한 권 고르라고 했을 때 존 리드가 쓴『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라는 책을 고른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맑스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이며, 공산주의자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마르크스와 공산주의 서적을 읽어왔으며, 대학에 와서도 지속적으로 사회주의/공산주의와 맑시즘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다. 내가 사회주의자인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내가, 그리고 대부분의 노동자 민중이 처해 있는 이 끔찍한 현실을 타파하는 데 자본주의 내의 어떠한 개혁이나 재분배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불충분하며 자본주의 자체의 철폐를 통해서만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역사적으로 '실패'했다. 소련도, 중국도, 쿠바도 북한도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하고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대다수 대중들이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 이후 자본주의가 승리했다고 믿는 오늘날, 자본주의 극복에 대한 상상력이 부재한 오늘날 혁명은 불가능해 보인다. 나 같은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절망적인 정세이다.

현재의 혁명이 불가능해보일수록, 혁명을 꿈꾸는 이들은 과거의 성공사례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레닌의 혁명에, 마오의 혁명에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다. 그러한 정세가 또 한 번, (대한민국이 아니더라도) 어딘가에 도래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존 리드의 생생한 르포는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혁명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사실을 매우 명확하게 보여준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은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무언가의 힘에 이끌려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레닌을 비롯한 몇 몇 혁명가들이 혁명을 설계하고, 지도하여 그들의 의지대로 혁명을 진행시켰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지도하고 설계하기 전에 수많은 대중의 혁명에 대한 열망과 의지가 있었다. 대중들, 그리고 그 대중들보다 조금 앞에 섰던 각 정당과 정파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의지가 자신들의 이념과 일치할 수 있도록 매우 노력했다.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대중에게서 그들의 정책과 이념, 열정을 가장 높게 평가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이념과 의지대로 혁명 이후를 설계할 수 있었다.

역사는 승자만 기억한다고 한다. 이는 역사가 결과적으로 패배한 가치 있는 인물들에 대해 기억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이 말은 승자가 '어떻게' 승리했는지를 자세히 알려주지 못한다는 데 있다. 역사는 승자를 영웅으로 만들고자 하며, 그 승자가 승자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어떠한 고민을 거쳤는지를 자세히 기록하지 않으려 한다. 승자의 '인간적인 모습'이 그의 영웅적 면모를 가린다고 생각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레닌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사회. 경제체제인 농노제를 유지하는, 자본주의 발전을 이루지도 못한 러시아를 자본주의 이후의 단계라는 사회주의로 바꾸어낸 영웅이다! 그의 의지는 매우 강철 같았고 그의 정세판단은 매우 정확했고 그의 언변과 열정은 완벽했고, 고로 러시아는 매우 신속하게 혁명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그리고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일부는 레닌을 이렇게 위대한 혁명가로 인식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과정에서 레닌을 비롯해 당대에 '혁명'을 사유한 이들이 어떠한 고민을 했는지는 망각해버린다.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완벽하고 신속하게,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것이 아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혁명의 전후를 생생하게 목격한 존 리드의 글은 이러한 사실을 매우 잘 보여준다. 자신의 방식대로 혁명을 해야 한다는 수많은 분파들이 제각기 혁명과 반혁명을 주창했다. 왕당파와 10월파, 코쟈크 등의 반혁명 세력이 언제든지 차르 체제를 복귀시키기 위해 술책을 일삼고 있었으며, 카데츠 같은 자유주의 집단은 입헌군주제 등을 통해 러시아를 개혁하자고 주장했다. 사회주의 정당을 표방했으나 사실상은 쁘띠부르주아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면서 개혁을 외치는 인민사회주의자들도 있었다. 볼셰비키와 함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속해 있었으나 볼셰비키가 주창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장 봉기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구호에 반대하며 부르주아 혁명을 먼저 일으켜야 하며, 부르주아들과 연합해서 일단 차르와 구체제를 먼저 공격해야 한다는 멘셰비키들도 대다수였다.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 중심의, 그리고 무장 봉기를 통해 자본주의와 농노제를 동시에 극복하고, 의회제 민주주의가 아닌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자신을 제외한 모든 정파들과 싸워 이겨야만 했다. 이 과정은 결과적인 혁명의 승리 앞에서 잊히기 쉽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과정이다.

몇 줄로 러시아 혁명을 요약해야 하는 세계사 책들과는 달리, 존 리드의 르포는 이러한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레닌과 볼세비키들이 힘을 얻었다가 잃는 과정, 정세의 급변과 대중의 의지로 다시 힘을 얻는 과정, 그러다가 예상치 못한 변수들로 다른 세력들이 레닌을 위협하는 상황들, 대중을 선동해야 하는 싸움에서 레닌과 다른 정파들이 싸움을 벌이는 모습, 이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존 리드는 곳곳에서 그 생생함을 지켜본 감격의 소회를 드러낸다. 각 정파들의 연설을 지켜보는 병사들에게서, 꼼짝도 하지 않고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여 연설을 경청하는 그 사람들의 모습에서 감격한다. 어린아이의 순수한 눈과 서사시에 등장하는 전사의 얼굴을 한 위대한 거인들! 그리고 이들의 혁명이 결국 성공하는 모습도 매우 감동적이다. 드넓은 러시아 각지에서 수많는 노동자, 병사, 수병들이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고 현명하게 결정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 그리고 마침내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로 결의하는 모습, 반혁명의 군대에 맞서기 위해 도시로 모여드는 노동자들의 모습. 존 리드는 단순히 레닌의 위대함을 찬미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레닌과 볼셰비키들의 '의지'와 '신념'대로 승리하는 데 일반 노동자 민중의 결의가 얼마나 크게 작용했는지 보여주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다.

존 리드의 이 글은 나에게 있어 또 하나의 시사점을 준다. 나의 사회주의자로써의 가장 큰 고민은 혁명 이후이다. 맑스주의에 정치경제학은 있어도 정치학은 부재 한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한 것이다. 맑스와 그 뒤를 이은 맑스주의자들은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가 어떻게 붕괴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서는 계속 강조했으나 공산주의 혁명 이후에 맑스주의자들이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위해 어떤 통치를 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통치는 부르주아들의 그것과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는 이야기하지 못했다. 일단 혁명이 일어나는 데 주력해야 하는 것이지만, 많은 대중에게 혁명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이 혁명 이후의 정치학은 맑스주의가 채워야 할 공백이다. 이런 의미에서 러시아 혁명은 훌륭한 사례이다. 실제로 레닌과 볼셰비키들이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위해, 자본주의 국가와 대치중인 상황에서 어떤 정책들을 시도했고 이를 통해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도 존 리드의 르포는 적절한 제 역할을 수행한다. 레닌이 신경제정책을 수행했고, 어떠한 정책들을 펼쳤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벗어나 이러한 정책과 통치를 펼치는 데 어떠한 고민이 수반되어 있었는지가 이 르포문학에서는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농민 문제이다. 사실, 혁명 당시부터 농민문제는 레닌과 볼셰비키에게 뜨거운 감자였다. 러시아 지식인들이 일찍부터 인지했듯이 농민 문제는 러시아 모순의 핵심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주창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농민은 골치 덩어리이기도 하다. 농민은 러시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착취 받는 계급이다. 따라서 혁명을 실시하는데 꼭 같이 데리고 가야할 이들이다. 그리고 농민이 원하는 개혁/혁명이란 대부분 '내 토지를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생산수단의 역할을 하는 사유재산을 철폐하고, 이를 국가의 소유로 하며, 궁극적으로 사회화하고자 한다. 제 토지를 주장하는 농민들의 존재는 어쩌면 사유재산 철폐라는 공산주의적 목표에 훼방이 될 수 있다. 혁명적 계급이 될 수 있는 동시에 굉장히 보수적인 계급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중성을 지닌 이들이 농민이다. 존 리드는 자신의 르포를 농민대회로 마무리하고 있다. 지금 당장 혁명이 일어난다 해도, 노동자 이외에 많은 '내 재산'을 요구하는 계급들이 즐비할 것이다. 이들에게서 폭력적으로 재산을 몰수할 것인가? 레닌과 볼셰비키들의 이러한 고민은 우리가 자본주의의 극복을 이야기할 때 다시 마주칠지 모르는 모순이다. 이러한 고민들이 이 책에는 그대로 녹아 있다. 나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이, '이념'에 따라 개혁을 꿈꾸는 이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은 세계사적 사건이다. 그리고 이 세계사적 사건을 서술하는 데 있어 존 리드의 이 글은 이 혁명이 필연적 요소가 있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의지가 결집된 결과였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혁명을 상상하는 이들이, 그 상상을 현실로 바꿀 때 생길 수 있는 고민들에 대해 충분히 사유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