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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글/논문 및 레포트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비판적 고찰

1,2학년때 썼던 보고서들도 여기다 다 올려둔다. 첫째는 보관을 위해서이고 둘째는 얼마나 허접한지 끊임없이 인식하기 위해서이다.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비판적 고찰

1. 들어가며

우리는 한국의 근대사를 '수난'의 역사라 부르곤 한다. 우리의 근대사에 대한 인식의 대부분을 '일제 침탈'이 장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난의 역사에 대한 강조는 민족적 단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당한 집단적 피해를 강조함으로써 민족적 유대감을 형성하고 단결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의 교과서는 민족주의적 시각을 취하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연구는 이런 민족주의적 시각을 걷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그들'과 맞섰던 한국 독립운동사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이를 통해 근대사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자 하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고찰이 '수난사의 반복'을 피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한국 독립운동의 문제점

(1) 조선인들의 ‘봉건 사상’에 따른 문제점

근대 한국 독립운동1)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 문제점을 ‘사상(思想)'이라는 코드로 풀어볼 것이다. 먼저 독립운동이 문제점 중 하나는 조선인들이 구국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을 펼치면서도 ‘봉건 사상’에 빠져있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개화를 통해 근대화를 주장하고, 근대화를 통해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아내려고 했던 조선 지식인층은 철저한 ‘우민관(愚民關)’을 지니고 있었다.

1900년대, 1910년대 혹은 그 이후 조선의 지식인층의 근원은 개화 세력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선진국에서 신 문물을 배워와 조선을 근대화하려 했던 개화 세력들이 조선 지식인층의 원류(原流)인 셈이다. 초기 개화 세력들은 봉건 사상에 사로잡혀 인민을 ‘개화해야 할 대상’으로 밖에 보지 않는 문제점을 지니게 된다. 이런 문제점은 초기 개화의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 1889년 탈고해 1895년 출판)에 잘 드러나 있다.

『서유견문』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위정자(爲政者)의 역할이다. 위정자는 근대 교육을 통해 몽매한 백성들을 깨우쳐야 하며, 무지몽매한 자들에게 덕행을 권장함으로써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 또한 사유재산의 자유에 대해 알지 못하는 백성들이 소요를 일으키지 않도록 지나친 자유와 권리 부여 역시 자제해야 한다.2) 유길준이 말하는 ‘인민’은 국권의 확립을 위해 오로지 교육, 통제, 개량되는 ‘대상’에 불과했다.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정치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유길준은 심지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교육을 받지 못한 무식한 자들의 폭거로 판단하기까지 했다. 그의 동학 농민운동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우민관은 개화 사상가를 비롯한 조선 지식인층에 그대로 전파된다. 유길준으로부터 『독립신문(獨立新聞)』의 발행자금을 받았던 서재필, 그를 조선 지식인의 대부로 추앙했던 1900년대 신문, 잡지의 논객들, 유길준을 흠모해 흥사단(興士團)의 부단장으로 앉힌 안창호 모두 이런 우민관을 답습했던 것이다.

『독립신문』에 대한 기존의 평가는 후하다. 『독립신문』은 한국 초기 모범적인 민족 언론기관의 표상이었다.3) 물론 천부인권을 강조하고 근대적 사고방식의 확산시켰다는 점에서 『독립신문』은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조선 지식인 대다수가 빠져있던 우민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었다. 그들은 근대화의 주체를 관(官)으로, 대상을 민(民)으로 설정하는 일본 메이지 유신의 사고방식4)을 답습하고 있었다. 국민에 의한 개혁이 아니라 관에 의한 하향(下向)식 개화를 주장했다.5) 또한『독립신문』은 그 당시 사고방식으로서는 굉장히 개혁적인 ‘정당’의 필요성을 역설하긴 했지만, 정당의 역할은 법률, 규칙을 만드는 주체였고 백성은 이 법률, 규칙에 복종하고 감시하는 피치자에 불과했다. 즉 백성이 정치에 주체가 될 경우 우민 정치가 펼쳐질 수 있다는 우민관에 입각해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인민의 제한참정론(制限參政論)’은 주민의 1.14%만이 선거권을 가진 일본을 모태로 하고 있다. 이는 당시 대다수 성인 남성의 선거권을 인정했던 유럽 선진국가들의 현실과는 대단히 동떨어져있던 것이었다.

이와 같은 우민관에 입각한 독립운동은 안창호를 비롯한 애국 계몽 운동으로 이어진다. 애국 계몽 운동은 교육을 통해 민중을 계몽함으로써 독립을 이루려 했는데, 이들의 독립운동은 주체가 객체를 계몽하고 이끈다는 엘리트주의에 입각한 우민관에 사로잡혀있었다. 이들은 일반 민중, 백성들이 주체가 된 무장 독립운동을 비판하고 부질없는 짓이라 여겼다. 교육받지 못한 무지몽매한 자들이 일제에 덤벼봤자 당하기만 한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교육은 실력 양성을 위해 절실한 것이다. 그러나 민중을 품으려 하지 않은 채 민중을 계몽하고 이끌려만 하는 우민관에 입각한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을 민중 전체로 확대하지 못한다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한 평등선거권이 전세계적으로 확립된 지는 채 100년도 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지금의 패러다임(paradigm)을 가지고 봉건 사상에 사로잡혀 있던 독립운동가들을 비판하는 것은 너무 가혹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를 모두 인정한다고 해도, 교과서나 기존의 역사서가 독립운동가들의 긍정적이고 개혁적인 면만을 부각시킨다는 것은 지극히 편협한 역사 서술일 것이다. 이런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비판적 관점에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평가하는 것 역시 긍정적인 면의 서술과 더불어 병행되어야 한다.

(2) 외국에서 건너온 사상,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에 의해 발생한 문제점

조선 내부의 봉건 사상 말고도, 독립운동가들은 사회진화론이라는 서구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사회진화론은 자연에서의 약육강식이 사회에서도 적용된다는 이론으로서 이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는 제국주의를 정당화해준다. 또한 제국주의적인 강대국 건설을 위해서 온 국민이 국가를 위해 단결하고 뭉쳐야 하기에 이는 국가주의적 사고방식을 정당화시켜준다.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한국 독립 운동가들은 위와 같은 두 가지 사상적 경향을 보인다.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은 주로 민족의 자주와 단결,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던 개화 언론들의 글에서 엿볼 수 있다. 한국 최초의 근대신문인『한성순보(漢城旬報)』는 처음에는 제국주의 침탈을 받는 식민지인들을 동정하는 글을 쓴다. 그러나 개화파들이 『한성순보』를 주도하게 되면서 이 논조는 바뀌게 된다. 아프리카의 식민화를 유럽인이 베푸는 ‘교화’로 보는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 『한성순보』의 전통을 계승한『한성주보(漢城週報)』의 편집자들은 제국주의 강대국을 선망하는 글을 싣는다. 예컨대 1887년 4월 1일자 기사에서 영국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을 폭도로 몰고, 그들의 강제 이주를 제안하는 모습이 그 예이다. 제국주의적 침탈에 대한 옹호는 『독립신문』6) 에서 극에 달한다. 『독립신문』의 주장을 살펴보자. 『독립신문』은 일본 군인들이 동학농민들을 학살하고, 의병운동을 탄압한 것을 찬양한다. 또한 아프리카의 반제국주의 운동을 진압한 영국군의 수고를 치하하며, 미국이 쿠바, 필리핀의 침략을 위해 스페인과 전쟁을 벌인 것을 문명화라고 극찬한다. 『독립신문』의 창간자이며 주필인 서재필은 중국 북부에서 러시아의 이권 강탈을 찬양하기까지 한다.7) 그들은 문명국, 즉 강대국이 문명화되지 않은 야만국을 정벌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구한말 가장 급진적이며 민족적이었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마저도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대한매일신보』의 논객들은 제국주의라는 현상을 반인륜적으로 묘사하여 비판하긴 했지만, 권리 경쟁과 생존 경쟁을 우주의 원칙으로 생각했던 점은 다른 개화 언론들과 동일했다. 그들은 식민지 국가들이 제국주의에 침탈 당한 것이 그들 자신의 경쟁력 부족한 것으로부터 기인한다고 판단했고, 조선 역시 침탈 당하지 않기 위해 제국주의적 강국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1909년 7월 21일자 <논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강권이 있는 자는 성현이며 군자며 영웅이오, 강권이 없는 자는 용렬한 놈이며 천한 놈이며 소와 말과 개와 돼지다.”

제국주의적 사고방식과 더불어, 사회진화론은 국가주의(國家主義)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근대주의적 계몽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했던 개신(改新) 유림들은 개인들이 국가를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 국가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사고방식은 개신 유림들의 대표 언론이었던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주장에 잘 드러나있다. 『황성신문』은 천부인권을 강조함과 동시에, 개인의 천부인권 위에 국가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국가가 있으면 인민이 있고, 국가가 없으면 인민도 없다.”8) 는 논리를 펼쳤던 것이다. 이런 개신 유림들의 국가주의는 유길준의 『서유견문』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천부인권설을 주장하는 동시에 인민이 언제나 ‘권리’보다 ‘국법’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9) 특히 황성신문이 광고하기도 했던 유길준의 저서 『국민수지』(國民須知: 국민이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이란 뜻; 유길준 말년의 작품으로 1907년에 발간됨)에는 국민의 의무로 ‘병역’을 강조한다. 독일이나 일본과 같이 군사력으로 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도인 것이다. 유길준과 개신 유림이 지닌 국가주의는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항일 독립운동에까지 그 모습을 보인다. 1909년 12월 22일 젊은 기독교인 이재명은 이완용을 암살하려다가 이완용의 마부인 평민 박원문을 살해하게 되는데, 이재명은 공판에서 단 한번도 이에 대해 유감을 표시한 적이 없었고10), 독립운동가들도 이를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나라를 위하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평민 하나의 죽음쯤은 국가주의에 빠진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별 고민거리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기존의 교과서에는 개화 언론들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으며, 민중을 계몽했으며 정치 의식을 고양시켰다고만 표현되어있다. 또한 개신 유림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구국(救國)과 독립을 위하여 노력한 영웅들로만 평가 받아왔다. 하지만 그들이 한 ‘독립’은 단지 독립 그 자체로서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독립을 이루지 못한 것은 우리가 열등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우리도 부국강병과 근대화를 이루어야 하고, 더 나아가서 제국주의 열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당시 주류를 이루던 독립운동가들의 궁극적 목표였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의 사회진화론, 우승열패(優勝劣敗)11)의 이론을 비판한다. 더불어 우리 민족을 그런 제국주의 열강에 맞서 저항을 한 훌륭한 민족이라 치켜세운다. 하지만 과거 우리 민족들 역시 그 당시 ‘대세’였던 사회진화론의 확산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자각해야 한다.

3. 현대의 관점에서 과거를 비판하는 것의 의미

흔히 현대의 시각과 기준으로 과거의 역사를 비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비판하는 것은 그 당시 현실과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신중을 가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필자의 연구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을 지 모른다. 근대화가 되기 전 조선 사회에서 지식인 층이 정치를 소수의 엘리트가 하는 것이라는 봉건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제국주의 열강에 둘러싸인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그 상황 타파를 위해 제국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즉 ‘넌 세종대왕이 비민주주의자라고 비판할래?’와 같은 논리일 것이다.

하지만 현대 관점으로 과거를 비판하는 것과 더불어 역사를 대할 때 조심해야 될 것이 또 있다. 바로 ‘균형 있게’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 때 반(反)박정희 운동을 펼쳤던 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은 왜 정권에 저항하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업적, 긍정적인 면은 사회에 충분히 알려지고 있잖아요. 그런데 박정희의 안 좋은 면은 알려지지 않고 있잖아요. 균형을 맞추려고 하는 행동입니다.” 역사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긍정적인 면이 부각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한계점이나 문제점이 있다면 지적해야 한다. 긍정적인 면을 배우는 동시에 부정적인 면은 배우지 않는 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다. 필자의 연구는 민족주의라는 이유 때문에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독립운동사라는 우리의 근대사를 균형 잡히게 만드는 작업이다.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독립운동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를 넓히려는 시도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1) 앞으로 논의될 모든 독립운동은 을시늑약 이후의 항일 독립운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자주권을 지키려는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2) <서유견문>, 「兪吉濬全書」, 일조각, 1971, pp. 118-119.

3) 신용하, 『독립협회연구』, 일조각, 1976.

4) 마루야마 마사오, 가토슈이치, <메이지 일본의 ‘관’과 ‘민’에 대한 의식에 관해서>,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 2000, p. 200.

5)『독립신문』, 1896년 8월 27일 국문판 논설; 김숙자, 『大韓帝國期의 救國民權意識』, 국학자료원, 1998, pp. 22-23

6) 아관 파천 이후 국가의 자주성이 크게 손상되고 열강의 이권 침탈이 심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재필 등이 자유 민주주의적 개혁 사상을 민중에게 보급하고 국민의 힘으로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7) 박노자, 『나를 배반한 역사』, 인물과사상사, 2003, p. 18.

8) 『황성신문』, 1898년 11월 24일 논설.

9) 김봉렬, 『유길준 개화사상의 연구』, 경남대학교 출판부, 1998 , pp. 67-75

10) 박노자, 「’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 『한겨레21』, 통권 655호, 2007, 4월

11) 강한 자(우월한 자)는 흥하고 약한 자(열등한 자)는 패한다, 또한 그것이 자연. 사회의 법칙이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이론.

<참고문헌>
한국근현대사연구회, 『한국독립운동사강의』, 한울(한울아카데미), 2007.
김인기, 조왕호, 『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두리미디어, 2006.
유길준, 『서유견문』, 허경진 역, 서해문집, 2004.
<논설> 제6호, 1883년 12월 20일; 문중섭, 『한말의 서양 정치 사상 수용』,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8, P. 117.
관훈 클럽 편집. 번역, 『한성주보』제3권(1989), P. 923.
『독립신문』, 1898년 4월 14일자 논설.
『독립신문』, 1899년 1월 30일 논설.
『독립신문』, 1896년 11월 12일 논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