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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글/한겨레 hook

이재오와 민주당 그리고 좌파

최근 이재오 특임장관 내정자의 발언이 화제다. 그는 지난 7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일자리 대책에 관한 견해를 밝혔는데, 그 대책이란 것이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한 자격요건으로 중소기업에서의 근무를 의무화하고 재수생들로 하여금 입시준비를 하는 대신 공장이나 농촌에서 1,2년 일하게 하고 그 성적으로 대학에 입학하도록 하는 것이다. 당연히 인터넷에서 이재오를 비난하는 댓글들이 들끓었고 야당에선 ‘인권 침해’느니 ‘권위주의’니 ‘전체주의’니 ‘모택동’이니 하는 각종 원색적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재오의 견해는 참으로 기발했다. 고용과 취업 시스템을 점검해야 한다는 그의 견해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야당이 하는 언급만 보면 그들은 이 상식적인 명제에도 공감하지 않는 듯하다. 야당의 ‘대책 없음’으로 인해 이재오의 ‘기발함’은 빛을 발하고 있다. 비록 그 기발함이 의도는 좋았으나 방법과 과정, 현실 인식 모두 진부한 기발함이지만 말이다.

 

민주당 비주류에 속하는 천정배는 얼마 전 자신의 트위터에 ‘민주당은 싸움은 한나라당에게, 조직은 민주노동당에게, 정책은 진보신당에게 배워라.’라는 글을 올렸다. 여기서 ‘싸움은 한나라당에게 배우라’는 말의 의미는 단지 국회 안에서의 날치기나 민주당 의원들을 때려눕히는 유도 실력을 배우라는 것이 아니다.(물론 그 분야에서도 매우 뛰어나지만) 민주당은 홍준표의 ‘반값 아파트’, 이명박의 ‘반값 등록금’, 그리고 오세훈의 ‘장기주택 쉬프트’, 그리고 ‘미소금융’을 따라잡을 만한 정책들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이런 이유로 한나라당이 서민정당이라고 믿을 생각도 또 그들의 정책이 현재 당면한 경제 문제를 해결할 거라고 믿을 생각도 없다. 다만 정책과 공약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혹 하게 만들 구체적이고도 긍정적인 정책 생산능력, 즉 전투력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 생산능력조차도 없으면서 그 정책이 문제라고 삿대질하고 있다.

이번 이재오의 일자리대책에 대한 야당들의 논평도 마찬가지이다. 민주당의 이규의 부대변인은 이재오의 발언에 대해 “재수생들의 인권을 해치고 취업·채용의 자유와 권리마저 침해하는 막말성 발언은 오만한 권력자의 폭력이며 학생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것”이라면서 “권위주의 시대의 반사회적·반교육적 사고를 서슴없이 보여준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취업. 채용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주면서 어떻게 이 청년실업을 해결할 셈인가? 대기업들로 하여금 자신이 원하는 인재를 뽑을 권리를 더 많이 보장해주고, 취업준비생들에게 더 많이 취업할 권리를 보장해준다면 청년실업이 해결될 수 있는가? 문제는 더 많은 자유나 더 많은 권리, 즉 대기업에 원서 낼 수 있는 자유나 대기업 면접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그냥 ‘취업하기’이다. 게다가 이들은 이 자유를 ‘인권’으로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농촌과 공장에서 일하는 것을 인권의 문제에서 사유하고 있다. 인권위는 뭐하는 거냐, 농촌이랑 공장으로 달려가지 않고! 놀랍게도 민주당 대변인이 한 이 질문을 똑같이 동아일보 기자가 이재오에게 던졌는데, 이재오는 ‘대기업도 경력 있는 사람 뽑으면 좋지 뭐.’라고 대꾸했다. 방법과 현실 인식은 그릇되었지만(이 부분은 뒤에 설명할 것이다.) 이재오는 적어도 청년실업을 해결하기 위해 대기업을 설득하거나 압박할 수도 있음을 내비치고 있다. 반면에 민주당의 논평에는 청년실업을 야기한 신자유주의를 그대로 수용하자는 무사유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민주당이야말로 이재오보다 더 ‘참된 신자유주의자들’이다. 게다가 마지막에 덧붙인 말은 더욱 가관이다. 취업. 채용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사회적이고 교육적인 거란다. 이 사회란 신자유주의 사회이고, 이 교육이란 ‘신자유주의 제도화 교육’인가?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의 논평도 마찬가지 수준이다. 그는 이재오의 발언에 대해 "자유와 창의성을 고취시켜도 모자랄 판에 군사 독재시대나 전제 군주시대에도 불가능한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가히 '왕의 남자'만이 할 수 있는 폭탄 발언"이라며 "이 내정자의 스승은 모택동이냐"고 되물었다. 지금의 청년실업을 만들어낸 건 바로 ‘자유와 창의성’이다. 이 자유와 창의성은 고부가가치 사업 위주의 경제 운영을 구조화하는 핵심 이데올로기이며 모든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있는 마법의 칼이다. 박선영 대변인 말대로 자유와 창의성을 고취시키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즉, 야당들의 논평은 현재 고용-취업 구조의 고질적 병폐가 무엇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비난을 위해 늘어놓는 레토릭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이재오는 적어도 문제가 있다는 것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 이명박이 대기업 때리기에 열중하는 것을 정치적 수사로만 보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재오의 이 일자리 대책 역시 진정성이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런 정치적 수사를 통해서 적당히 서민들에게 돈 좀 더 쥐어주고, 그들의 따뜻한 손을 좀 더 잡아주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들은 민주당 같은 신자유주의 집단보다 훨씬 더 서민의 지지를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복지국가 동맹? 이 담론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박근혜일 것이다. 여기서 좌파가 짜잔 하고 나타날 공간이 생겨난다. 좌파들은 신자유주의를 이념적으로 추구하면서도 서민정책과 대기업 때리기에 골몰하는 이 보수 세력들이 결단코 상상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제시해야한다.

이 지점에서 이재오 식 일자리 대책과 좌파의 일자리 대책이 어긋나야 할 지점을 지적해보자. 첫째 그는 이 취업-고용 시스템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그는 중소기업-대기업의 관계를 동네병원-종합병원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다. 그에게 중소기업은 더 큰 물로 나아가기 위한 훈련 단계일 뿐이다. 현재 불균형 개발이라고 하는 한국경제의 고질적 병폐를 해결하는 방안이란 결국 대기업을 중심으로 성장하되 그곳에 몰릴 인재들을 ‘훈련’하는 기관으로서의 중소기업의 기능성 확보이다. ‘어느 곳에는 실업자가 넘치고 어느 곳에는 일손이 부족한’ 이 현상은 단지 넘치는 실업자를 일손이 부족한 곳으로 옮긴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서는 오히려 중소기업이 대기업 인재 육성소로 전락함으로써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불평등한 관계가 영속화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불평등한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결국 대기업 개혁과 하도급 계약 등에서의 악습을 제도적으로 철폐하는 등의 ‘개입’이 아니라면 어느 곳에는 실업자가 넘치고 어느 곳에는 일손이 부족한 이 현실을 개선할 수 없다. 그러나 이재오는 여기까지는 상상력이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개혁은 대기업과 중앙 중심의 개발을 통한 성장 전략이라는 한국 보수들의 이해관계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좌파 세력은 우선적으로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불평등 관계를 근본적으로 철폐하는 개혁을 추진해야한다. (그것은 계약관계의 평등일 수도 있으며 세금 정책이 될 수도 있다. 비록 우리는 궁극적 공산주의를 지향하지만 일단은 중간목표로서 그렇게 하자는 말이다.)

재수생을 바라보는 이재오의 시각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그는 재수생이 왜 재수하는 지를 묻지 않고, 차라리 농촌이나 공장에서 일이나 하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 재수생은 인간이 아니라 국가 경제에 조금도 이바지 하지 못하는 잉여일 뿐이다. 그리고 그 성적으로 대학을 가게 만든다고 한다. 대학을 철저하게 ‘실용적’으로 또 ‘일 잘하는 이들만 모아 놓은’ 집단으로, 즉 취업학교로 만들려는 생각이다. 결국 재수생을 없애고 싶다면 재수생이 재수를 하는 환경, 즉 SKY와 지잡대의 구별을 없애야 한다. 그러나 이 세력들은 그럴 수 없다. 그들이 사회 기득권을 유지하는 방식은 학벌을 통한 재생산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좌파는 대학 자체의 서열을 없애는 혁명에 가까운 개혁을 실시해야한다. (일단은, 일단은 말이다.)

두 번째 이재오의 현실 인식이 지닌 가장 큰 한계는 이 취업-고용 시스템의 개혁을 고작 ‘청년실업’의 수준에서 사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그는 현재 취업-고용 시스템의 문제를 노동 그 자체의 관점에서 사유하지 못한다. 좌파는 단지 ‘20대 일자리 대책’을 내놓아서는 안 되며, 신자유주의 질서에서 노동자가 직면한 현실을 직접 대면해야 한다. 즉 좌파의 대안은 이재오의 대안과 달리 ‘20대 취업하기’가 아니라 20대, 더 나아가 노동자가 일자리를 찾아 헤매게 만드는‘ 신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문제제기 이어야한다. 이를 통해 ’20대가 일자리를 갖게 하기 위해‘ 기존 세대의 일자리를 빼앗거나 그들의 봉급을 깎는 등의 대안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질서에서 착취당하는 모든 이들의 연합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좌파가 이재오와도, 민주당과도 달라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인 동시에 전 세대를 아우르는 진정한 하방(下方)운동이다.

<한겨레 훅>에 기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