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과거 글/한겨레 hook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갈 수 없다.

중도개혁 세력을 지지하는 이들이나 ‘사과하지 않는 이명박’과 ‘사과하는 노무현’을 대비하며 노무현을 추억하는 이들에게야 노무현과 이명박의 간극이 상당해 보이겠으나, 신자유주의를 규탄하는 한국의 좌파들에게 노무현과 이명박의 간극은 그리 크지 않다. 그리고 그들은 노무현 역시 신자유주의자였다는 반증의 결정적인 상징 중 하나로 노무현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노무현의 이 말은 정치권력이 더 이상 경제 권력을 통제할 수 없음에 대한 개혁적 정치인으로서의 현실 인정이자, 삼성과 손잡은 데에 대한 그의 변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이 말은 무엇인가를 은밀히 전제하는 동시에 무엇인가를 은폐하고 있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이 말에 대한 “아니,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가지 않았다.”는 식의 반응이다. 얼마 전 한겨레 훅에서 노정태가 쓴 글 한 편이 이런 반응을 대표한다.(http://hook.hani.co.kr/blog/archives/9863) 아직 정치 권력자로서 이명박은 대기업을 압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정치권력은 경제 권력을 억제할 충분한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권력이 “어디에, 혹은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식의 접근은 한 가지 사실을 은폐한다. 바로 신자유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권력을 발휘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미셀 푸코의 권력에 대한 접근이 과거의 그것들에 비해 획기적이었던 이유 중 한 가지는, 권력에 대한 질문을 바꾸어 버림으로써 정치철학의 연구대상을 바꾸어버렸기 때문이다.1) 그는 ‘권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권력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나오는가?’라는 질문 대신에 ‘권력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는 근대 이후 권력은 부정적인 의미, ‘무엇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 ‘무엇을 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우리는 푸코의 이러한 지적에 주목해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기존에 권력을 가지고 있던 정치인들에게서 권력을 빼앗아 경제인들(기업)에게 그 권력을 쥐어주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적 권력이란 장소의 개념으로 사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권력이란, 누군가에게서 누군가에게로 옮겨 다니는 ‘무엇을 못하게 하는 힘’이 아니라 ‘그 모든 누군가’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하게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모든 대학생들은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스펙을 쌓고 자기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계발한다. 그러나 ‘자유로운 선택’이란, 라캉이 비유했듯이 길에서 만난 강도가 돈을 요구했을 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강탈에 불과하다. 돈을 내놓지 않으면 강도에게 찔려죽을 것이기에 그것은 사실상 자유로운 선택이 아닌 것이다. 더욱 비극적인 사실은 돈을 모두 내놓아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의 자유로운 자기계발을 부추기지만, 사실상 신자유주의적 주체는 자유롭지 못하다. 비극적이게도 그는 자기계발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신자유주의적 질서 하에서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도박에 모든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즉 정치적 합리성으로의 신자유주의는 특정 행위를 만들어내는 바로 그 조건들을 만들어내는데, 그 조건들이란 간단히 말해 전체 사회영역을 경제화 하는 것이다. 철저한 Self care 시스템. 고용은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다. 청년실업에 대해 대학생의 눈높이를 낮추라는 식으로 말하는 정치인들은 이미 정치적 합리성으로서의 신자유주의를 철저히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스펙을 쌓아대는 대학생들 역시 신자유주의를 철저히 수행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개인들,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에게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것이지, 삼성에게 특수하게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경쟁력’이란 말이 언제부터 이렇게 널리 쓰이게 되었는가? 언제부터 ‘국가 브랜드’를 높이기 위해 모든 정치인들이 혈안이 되었는가? 신자유주의는 이미 우리 일상을 구성하며 우리를 능동적으로 만드는 권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선량한 정치 권력자가 나타나 이건희를 구속하고 밀린 세금을 내게 한다고 해서 우리가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가지 않았다.”라고 말한들, 그건 공허할 뿐이다. 자유주의자들은 ‘더 좋은 대의’, ‘더 좋은 정당정치’, ‘더 좋은 정치’를 통해 즉 제도적으로 경제 권력의 횡포를 물리치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개혁적 정치인이 변절되어 가는 모습’만을 보여주어 정치적 환멸만 더 불러일으킬 것이다. 제도 자체를 구성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때려 부수지 않고서는 아무리 위대한 ‘노짱’이 나타나도 혁명은 일어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식을 구성하는 이 긍정적인 권력을 근본적으로 지양하지 않고서는 절대 이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다.

권력이 시장에게로 넘어갔다고?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넘어간 적도 없고 넘어가지도 않을 것이다. 권력은 그곳에 없기 때문이다.

1) 푸코에게 권력이란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권력은 소유되는 것이 아니며 마르크스가 계끕, 자유주의가 국가에게 있다고 말한 것처럼 특정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다. 2. 권력은 통제나 억압이 아니며 생산적, 적극적, 능동적이다. 권력은 ‘돌봄’이다. 3. 죽게 하고 살게 내버려두는 것이 근대 이전의 권력이라면, 죽게 내버려두고 살게 하는 권력이 근대의 권력이다. (이런 정의와 통치성에 대한 개념을 참조하면 푸코의 권력 개념이 왜 획기적인 것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서동진,「신자유주의 분석가로서의 푸코」 참조

<한겨레 훅>에 기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