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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classic

우리는 왜 이 책을 읽어야하는가?

 


국가 정체

저자
플라톤 지음
출판사
서광사 | 2005-04-3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국가의 헬라스어 원전을 완역한 책. 이번 개정증보판은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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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조금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특히 학문에 이유와 목적을 들이대는 것을 거부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이라면 “책을 ‘왜’ 읽다니? 무언가를 얻으려고 책을 읽느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고, 강유원 같은 사람은 “재밌으니까 읽지!”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이런 부제를 붙인 이유는 학문을 순수하게 하는, 학문에의 열정이 넘쳐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과는 조금 한 부류의 사람들을 위해서다. 바로 ‘바보들’이다. 원전을 읽지 않으면서 그것들을 해석한 2차, 3차 텍스트를 줄치며 외우는 바보들 말이다. 해석자가 자신의 관점과 입장에서 해석한 글들을 마구잡이로 받아들이는, 그 과정에서 압축되고 생략된 모든 것들을 보지 못하는, 그래서 “헤겔의 변증법이 뭐냐구? 정반합이지!”라는 초등학생 수준의 대답을 하는 바보들 때문이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뭔데? 철인왕이지!”라는 대답은 900쪽에 이르는 플라톤의 국가를 요약하기엔 지나치게 협소하고 압축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직접’ 읽으라는 것이다. 이 책을 왜 읽어야하는가? 요약해서 말하자면, 서양철학의 시원이자 거장인 만큼 다양하게 해석되는 플라톤을 접하기 전에 그의 모습 그대로를 접함으로써 그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철인왕이지!”라는 대답 따위에는 결코 포함될 수 없는 그의 고민을 느끼기 위해서이다.



 

1. 플라톤은 왜 대화편으로 글을 썼을까?

인터넷 검색하고 책 좀 뒤지면 나오는 이야기를 나불거리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플라톤 국가를 읽으라고 하는 글이니 만큼 플라톤에 대한 소개를 해야겠다. 플라톤의 일생, 당시 정치상황, 아테네의 특징 뭐 이런 것들은 수없이 많은 좋은 책들에 수없이 많은 플라톤 연구가들이 잘 서술해주고 있다. 나는 그런 것들 말고 플라톤 저작의 가장 특이한 점 중에 하나인, ‘대화체’에 집중하여 플라톤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실 대화라는 형식은 철학사는 물론 학문사적으로 매우 특이한 형식이다.(내가 알기로 철학 서적 가운데 플라톤의 국가 말고 대화체로 써진 책은 토마스 모어의『유토피아』나 조지 버클리의 『하일라스와 필로누스가 나눈 대화 세 마당』정도다. 다른 책을 아는 분은 알려주시기 바란다.) 그럼 플라톤은 왜 대화체로 글을 썼을까?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그의 진리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알다시피 소크라테스는 생전에 단 하나의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왜냐면 그가 진리를 책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앎’을 단지 현대의 ‘안다’는 의미가 아닌 몸으로 체득하고 느낀 진정한 것이라고 여겼는데, 예컨대 우리는 모두 ‘전쟁’이라는 단어에 대해 알고 있지만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진정으로 ‘전쟁’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 전쟁을 경험한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경을 읽고 “아~이게 하느님이 한 말씀이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하느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고 진정으로 그 말씀을 ‘아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나 같은 사람은 성경을 아무리 읽어봐도 그 말씀에 감동을 받지 못하지만, 어떤 이는 그 말씀에 감동을 받고 그 말씀대로 행동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지덕의 합일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책에 다 적어놓았다 할지라도, 그걸 읽는 사람이 그 진리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그냥 외우거나 머리에 집어넣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문자를 신뢰하지 않은, 더 나아가 책을 남기지 않은 이유다.



그럼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이는 그의 평생의 행적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상대방이 제시한 주장(테제 A)에 대해 반박을 제시(안티테제 B)함으로써 최종 진리(종합테제 C)에 도달하게 한다는 변증법의 방식을 사용하여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논파하고 다녔다. 그리고 이것이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믿음을 실현하기 위해 플라톤이 도입한 글쓰는 방식이 대화체이다. 대화체로는 서로 반대되는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하나의 견해로 종합되는 변증술의 방식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독자로 하여금 계속 고민하면서 글을 읽을 수 있게 한다. 논리적인 서술방식처럼 글을 맹목적으로 따라 읽는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는 왜 여기서 이런 말을 했지? 트라마시코스는 이렇게 반박했으면 되었을텐데! 논리적으로 오류인 거 같은데! 나라면 이렇게 말했을 텐데!’와 같이 계속 생각하면서 글을 읽게 만든다. 그것이 플라톤이 대화체로 글을 쓴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진리란 쓰여진 글들을 읽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끈임 없이 생각하고 사유하고 질문해야한다!


2. 그의 질문에 집중하라!

앞의 논의에서 계속 논의를 이어가보자. 그는 독자들이 사유하고 질문하여 결국 진리에 도달하길 바라며 대화편을 썼다. 내 생각에, 그렇기에 플라톤의 책을 읽을 땐 답보다 ‘질문’, 즉 답이 나온 과정에 집중해야한다. 그것이 변증술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슬라보예 지젝이 지적했듯이, 종합테제가 나오기 위해선 역설적으로 안티테제가 등장해야한다. 안티테제가 없다면 종합테제는 종합테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질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하는 두 가지 커다란 이유가 도출된다. 첫 번째, 플라톤의 국가에는 서양 정치철학의 핵심 주제들이 죄다 담겨 있다. 그가 질문하고, 후대인들이 답한 것이다. 두 번째, 그가 던지는 질문은 아직도 유효하다.


3. 서양철학의 핵심 주제들을 던지는 플라톤

1권 첫 부분의 트라마시코스의 정의에 대한 주장, 즉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는 주장은 정치철학의 핵심 주장 가운데 하나이다. 개인적으로 트라마시코스의 역할을 푸코가 맡았다면 가장 잘 대변했을 거라 생각한다. 푸코는 트라마시코스에 대해 반박하는 소크라테스, 즉 플라톤의 핵심 근거들을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에피스테메라는 단어를 플라톤과 푸코가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그 핵심이다. 소크라테스가 영혼의 해방이라고까지 표현한 지식(episteme)조차 강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권력을 제도화하는 장치일 뿐이라고 푸코는 주장한다. 심지어 푸코는 소크라테스가 비유한 의술마저도 권력관계의 보여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강자의 이익이 정의라는 이름, 즉 법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주장은 벤야민, 아렌트, 데리다, 아감벤 등의 철학자들에게서도 보이고 있다. 트라마시코스의 테제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안티테제, 그리고 나온 소크라테스의 종합테제에 대한 또 다른 안티테제의 등장이다.

2권에 소크라테스는 국가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이어지지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보기에 국가는 자연발생적이다. 자연적인 필요성에 의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국가다. 하지만 토마스 홉스의 이야기는 다르다. 그는 자연 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이며, 국가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계약의 산물이다. 고대도시국가를 모델로 삼으며 소규모공동체의 자연 발생을 이야기한 플라톤의 주장에 대해 보편적 공동체가 사라진 채 혼란 속에서 생존해야하는 근대국가 속에서 살아온 홉스는 안티테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올바름이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주는 것이라고 정의한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은 분배적 정의를 이야기하는 존 롤스를 연상시키며, 올바름이 합심과 우애를 낳고 국가를 발전시킨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에선 이기적 행동이 집단의 부를 가져온다는 아담 스미스의 논의가 떠오른다. 부의 기능과 전사의 기능을 구별하는 기능주의자 플라톤의 주장에 대해 국력의 증진과 부의 증가를 일치시키는 중상주의자들은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이성이 욕구와 기개를 지배한다는 주장에 대해 데이비드 흄은 “이성은 정념이 노예다.”라고 말하지 않을까. 빈자들이 부자들이 통치하는 과두정치를 뒤엎는다는 주장에선 맑스의 냄새가 난다. 영혼의 지옥 여행을 이야기하며 선하게 사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하는 10권의 마지막 부분에선 불신지옥을 외치는 기독교 신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통해 던진 수많은 질문들을 발전시키고 이에 대해 반대하는 것들이 하나의 주장으로 만들어진 것이 서양철학에서는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가 “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긴 각주다.”라고 말했을 지도 모르겠다. 플라톤 이후의 철학자들이 더럽게 어렵게 설명했던 것들을 플라톤이 먼저 제기하고 있다. 그래서 읽어야 한다, 플라톤은. 특히 플라톤 사상의 집대성이며 정치철학분야에서(분야를 나눌 순 없지만 굳이 나누자면) 법률과 더불어 최대 저작이라는 국가는 정치철학을 공부한다고 하면, 철학을 공부한다고 하면 더더욱 맨 처음에 읽어야한다. 그의 질문들에 집중하면서!



이런 논지에서 볼 때 플라톤의 방법(특히 교육론)이 전체주의적이라고 비난하는 칼 포퍼의 주장은(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내 소견에 다소 천박해 보인다. 비판하려면 한나 아렌트처럼 그런 교육론을 논리적으로 도출하게 만든 근본 근거를 건드리는 게 더 제대로 플라톤을 비판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다. 플라톤의 대답이 비현실적이고 전체주의적이라고 지적하는 건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욕하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실 난 별로 전체주의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공부 좀 했다는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를 교육하는 방식을 생각하면서 플라톤식의 교육방식을 희망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해롭다면서 이상한 거 못보게 하고 하는 거 모두, 근본 논리는 플라톤하고 다를 게 없다. 그럼 이게 전체주의적일까? 글쎄, 난 동의하지 못하겠다.)



4. 그의 질문은 아직도 유효하다!



두 번째로 그를 읽어야하는 이유는 그의 질문과 지적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사실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받아들이는 것(우리들이 고전을 읽을 때의 태도이겠다, 아마도.)은 두 가지 냉소주의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첫 째로 모든 사상은 시대를 배경으로 태어난 산물이라는 생각에 빠지는 냉소주의다. “플라톤 이거 옛날 이야기잖아. 지금은 민주주의고. 이때랑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읽어서 뭐한담?” 두 번째, 현재를 기준으로 삼아 과거를 해석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민주주의자가 아니잖아. 이런 반민주주의적인 책 따위 읽지마!” 그렇기에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과거를 낡은 것으로 판단하여 무시하거나 현재의 가치와 다르다고 욕하는 것보다는 과거의 그 논의들이 현재에도 유효하지 않는지 살펴보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의 민주주의 비판은 아직도 매우 유효하다. 욕망이 다양해져서 정치 참여 말고 다른 곳에 신경을 쓰면서 선동자에게 흔들리고 결과적으로 참주정이 등장 한다는 플라톤의 지적을 보자. 경제성장으로 투표 날 놀러가거나 경제대통령에 환호하고 재개발과 뉴타운을 보장하는 후보를 뽑는, 그래서 결국 포퓰리즘으로 무장한 정부가 등장하여 참주정을 펼치는 모습, 어딘가 매우 익숙하지 않은가? 플라톤이 현대인들을 보면서 비웃고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저놈의 민주주의, 하면서. 그가 제기한 문제는 아직도 우리에겐 과제이다. 이것이 국가를 읽어야할 두 번째 이유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관점으로 과거를 해석하는 시도의 전형을 보여주는 박홍규 같은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플라톤은 물론 니체도 반민주주의자라 비난하고 홉스와 스피노자가 민주주의자였다고 해석하는 못말리는 민주주의 찬양론자들에게 말이다.(솔직히 난 이 사람이 민주주의를 뭐라고 생각하는 지조차 모르겠다. 다 틀렸다고 지 해석이 맞다고 하는데 막상 자기의 해석은 없으니, 소크라테스도 아니고.) “플라톤이 반민주주의자라서 그의 책을 읽지 말고 던져버리라”고 하는데, 현재의 문제들을 간과하고 현재의 이데올로기의 증상들을 파악하지 못했다면 민주주의는 탄생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말이다. 테제에 안티테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종합테제가 나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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