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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classic

철학에서 정치학으로의 과도기

 


정치학

저자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출판사
| 2009-08-1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아리스토텔레스, 정치를 말하다!국가가 개인에 우선하고, 인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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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재미없다. 정치학에 나름 관심 있는 나도 재미없을 정도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이 대개 그렇다. 『니코마코스윤리학』도 그렇고, 『시학』도 그렇고, 『영혼에 관하여』는 그나마 짧아서 용기를 내서 읽을 만했지만 아직 읽지 못한 『형이상학』도 매우 재미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 까닭은 아리스토텔레스 특유의 복잡하고 난해한 글쓰기 방식과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지는 “분류” 때문이다. 정치학에서도 수없이 많은 첫째 둘째가 독자를 졸리게 만들고 몇 백 개국의 헌법체계를 분석했다는 방대함에 놀라면서도 그 지루한 설명방식은 그 자료의 풍부함을 무색하게 만든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꾸역꾸역 다 읽고 정리했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 이전까지의 정치제도와 정치철학을 정리해주는 그의 친절함으로 인해 다른 사료에서는 감히 알 수 없는 다양한 정치체제들의 실례들을 알 수 있다는 점, 두 번째로 이 책에서 서서히 철학에서 빠져나가려는 정치학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 제목이 『정치학』일지도 모르겠다.

1. 분류와 분석, 플라톤의 그림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점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그들의 학교 앞이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의 문 앞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고 쓰여 있다. 수학적인 방식으로 자연에서의 진리를 찾고(이는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향이 크다.) 이러한 수학적 진리가 가장 이데아에 가깝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능력을 갖춘 자가 철인왕이 되어야한다고 믿었던 그의 사상이 압축되어 드러나는 지점이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디움 앞에는 생물을 수집한 것들이 매우 다양하게 늘어져 있었다고 한다. 경험과 다양한 사례들을 분석하고 분류하기를 좋아했던 그의 모습이 드러난다. 정치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이전의 방대한 사료들을 모아(아마도 이런 노가다는 제자들이 대행하지 않았을까.) 자랑스럽게 나열한다. 더불어 그에 대해 비판하여 자신만의 철학을 세우려 한다. 예컨대 정치학 제2권 이상국가편에서 그는 플라톤의 정치철학, 필레아스가 제안한 정체, 밀레토스의 힙포다모스가 구상한 정체, 스파르타 정체, 크레테 정체, 키르테돈 정체, 솔론의 정체 등을 정리하고 비판한다. 그리고 그런 사례들을 분석하여 거대한 분류체계를 만들어낸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수많은 사료들을 찾아봐도 정치체제는 세 가지 뿐이다. 민주정, 귀족정, 왕정이 그것이다.’

이러한 분류 방식은 플라톤의 영향이 크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뿐 아니라(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충실하긴 했지만) 수없이 많은 철학자들이 이렇게 분석. 분류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철학을 정리하고 전개한다. 자신만의 철학을 내세우면서 플라톤이 도입한 이 방식을 거부하기란 매우 어렵다. 플라톤은 철수 영희 민수가 인간인 이유는 그들이 인간의 이데아를 공유하기 때문이라고 믿었고, 그 인간의 이데아는 또다시 더 큰 이데아인 동물의 이데아에 속한다. 동물의 이데아는 생물의 이데아에 속하고 그 이데아는 더 큰 것에, 이런 식으로 무한히 소급하여 결국 맨 위에는 이데아의 이데아, 선의 이데아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데아를 깨닫기 위해선 이러한 분류체계를 알아야한다. 아니, 논리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나는 인간의 이데아에 속해있다. 이것이 서양철학 전반에 드리워진 플라톤의 그림자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긴 각주다.’라고.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 등이 전개한 해체철학은 바로 이런 분류의 방식을 뒤집어엎고 플라톤을 죽이려는 시도였다. 슬라보예 지젝이 A 밑에 a를 놓는 기준이 바로 이데올로기라고 말했듯이 해체철학자들은 b가 A 밑에도 갈 수 있고 a가 B 밑에도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쉽게 말하면 이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인들은 무지하고 비합리적이며 권위주의적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물으면 된다. ‘동양인’이라는 게 뭔데? 기존의 가부장 사회에서는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약하다고 말했다. ‘여자’라는 게 뭔데? 데리다가 차이가 차별을 낳는다고 말했듯이 중요한 건 서로 분류된 두 체계가 ‘평등하다!’는 것이 아니다. 차이 자체, 분류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디스 버틀러가 같은 페미니즘 철학자는 sex에 따른 성 구분이 아닌 새로운 성 구분 방식을 제시하기도 했다. 데리다는 재치 있게 플라톤의 사유를 우스개로 만들어버렸고 들뢰즈는 더 나아가 새로운 사유체계를 제시하고자 했다. 현대철학은 거칠게 말해 플라톤의 세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물론 알랭 바디우 같이 ‘플라톤 밖에서 사유하려면 꼭 플라톤을 죽여야만 하는가?’라고 묻는 이들도 있다.)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흘렀는데, 이처럼 해체철학이 뒤집어엎고자 했던 플라톤의 사유방식, 학문하는 방식을 가장 충실히 따르고 결정적으로 모든 학문에 확립시킨 공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다. 그는 철학으로 통합되어 있던 학문체계를 천문학, 해부학, 기하학, 정치학, 수학, 논리학, 생물학 등으로 다양화시켰다는 점에서 서양학문의 아버지이며 플라톤의 분류 방식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학문하는 방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런 영향 아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뛰어넘고자 했지만 플라톤의 영향 아래 있었다. 물론 형이상학적 진리를 추구했다는 등 다양한 점에서도 역시 그러하다.(그래서 박종현은 『헬라스사상의 심층』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제대로 읽긴 한 건지 의문이 간다고 말했을 정도다.)

2. 철학과 정치학의 과도기에서

플라톤의『국가』가 철학인지 정치학인지 헷갈리는 상태에 있고 마키아벨리의『군주론』이 정치학을 독립적인 영역으로 설정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정치학』은 둘 사이의 과도기에 있다. (중세의 정치학은 신학과 구분이 안된다는 점에서 발전론적 관점에서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퇴보적이다.) 그는 플라톤이 그랬던 것처럼 정치학을 윤리학과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요소가 엿보일 만큼 정치 기술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과 연장선상에 있는 가장 큰 점은 국가에 대한 정의에서 볼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국가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최고의 선을 추구하는 정치공동체이다. 또한 플라톤의 영혼론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도 각자는 다른 영혼을 갖고 있기에 각자 다른 역할(용기의 부분, 욕망의 부분, 이성의 부분)을 담당하며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차이 역시 영혼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나중에 홉스는 이 지점을 ‘이 세상에 피지배자하고 싶은 바보가 어딨는가?’라고 반박한다. 그리고 끈임 없이 훌륭한 덕성과 훌륭한 시민을 일치시키는 것이 최선의 국가라고 말한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 정치집단의 목적을 선의 실현, 다른 영혼들 간의 조화로운 상태라고 주장한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조지 세이빈은『정치사상사』에서 이상적인 것에서 벗어나 실제 사례들을 보며 이야기하자고 말하면서 계속 윤리적이고 이상적인 국가를 추구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하기도 했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마키아벨리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이는 법을 절대화하려는 그의 주장 때문일 것이다. 법이란 건 결국 이상, 윤리라기보다 현실세계에서 작동하는(특히 관습법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질서유지의 수단에 가깝다. 고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법을 절대화할수록 불법행위에 대한 감시와 처벌에 대한 지도자의 역할을 강조하게 된다. 심지어 농민들에게 처자 공유제를 실시함으로써 우애와 가족적 유대감을 낮춰 불법행위와 소요를 막을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각 정체를 보존하는 방법을 서술하는 곳에서 극대화된다. 최선의 정체라는 이데아를 기준으로 보면 참주정, 과두정, 민주정 등은 타도의 대상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이 유지되는 방법까지 알려주며 그 방법에는 민중을 억압하고 속이고 기만하는 방법도 포함되어 있다. 지도자에겐 좋을지 몰라도 이상적인 국가의 건설이나 선의 공동체와는 거리가 멀다.

3. 마치며
(아직 글쓰기 내공이 모자라 ‘마치며’라는 멋대가리 없는 소제목을 붙이는 것이 아쉽지만, 다른 도리가 없다.)

앞에 국가에 대한 쓴 글에서 밝혔지만, 내가 원전을 읽는 것은 그들의 고민을 피부로 느끼기 위해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학문, 더 나아가 현대 대부분의 학문의 학문하는 방식을 정립했다는 점에서 서양학문의 근원이다. 정치학은 이런 방법에 따라 써진 최초의 정치학 서적이다. 이 분류를 하며 그가 얼마나 고민했을까 하니 존경스러워진다. 더 나아가 플라톤이라는 거인이 남겨놓은 이상 국가라는 철학을 이어받은 후인으로서, 하지만 그를 뛰어넘어 정치학을 독립시켜야할 사명을 지닌 후인으로서 펜을 집어 들었을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민이 느껴진다. 이 결과물이 바로 이 고전,『정치학』이다. 그에게 일관성이 없다고 욕하지 말자. ‘당신의 연구결과에는 모순이 있습니다.’라고 지적한 한 기자의 질문에 대답한 미셀 푸코의 대답으로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그럼 당신은 내가 몇 년 동안 열심히 연구했다고 가져온 결과가 고작 옛날이랑 다를 게 하나도 없길 바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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