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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classic

이런 것도 정치철학인가?

 


군주론(제3판 개역본)

저자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출판사
까치 | 2012-01-0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군주론 이탈리아 원전 번역판 출간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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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 논고 (한국학술진흥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9)

저자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출판사
한길사 | 2003-04-1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의 처음 열 권에 대한 마키아벨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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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두 저서를 한꺼번에 묶어 다루고자 한다. 마키아벨리 초기와 후기를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시오노 나나미가 그렇게 ‘나의 친구’의 걸작이라며 극찬한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다. 이 두 저서를 함께 다루는 이유는 두 저서를 함께 다룸으로써 마키아벨리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서다. 두 책은 조금 다르다. 하지만 공통점도 많다. 이 공통점에 주목하여 마키아벨리에 대한 오해를 풀고자 한다. 물론 시오노 나나미 처럼 빠돌이 짓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누군가는 정치철학서에 마키아벨리의 이름을 넣은 것 자체를 거북하게 느낄 지도 모르겠다. ‘이런 것도 정치철학인가?’

1. 마키아벨리즘이란?

인간 마키아벨리보다 더 마키아벨리즘이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즘이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가장 “객관적”인 마키아벨리즘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공익, 특히 국가이익을 위해서는 수단의 도덕적 선악에 관계없이 다만 효율성과 유용성만을 고려하는 마키아벨리 자신의 정치사상(곽차섭). 흔히 알고 있는 마키아벨리즘의 이미지는 앞의 공익과 국가이익이 괄호 쳐질 때 발생한다. 흔히 이런 이미지의 마키아벨리즘은 다음과 같이 정의 된다 :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즘은 갑자기 왜 플라톤적,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과 단절하고 ‘선의 공동체’가 아닌 수단 방법 안 가리는 ‘국가의 생존’을 논하고 있을까. 그건 시대정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16세기의 국가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도시 국가와는 너무나 달랐고 중세의 기독교 국가와도 너무나 달랐다. 중세를 지배하던 기독교라는 정신적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각 국가들은 치열한 격전의 장으로 돌입했다. 모든 국가들이 주권의 평등을 가지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근대국가시대의 도래다. 교황의 세속권력의 해체와 봉건제의 해체로 대표되는 주권과 영토의 일원화가 근대의 특징이라면, 마키아벨리는 그 변화의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살았다. 마키아벨리는 인구도 얼마 없는 도시국가에서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도 아니었고 “신의 말씀대로 하란 말이야, 안 그러면 넌 파문이야!”라는 원리로 모든 것이 해결되던 시대에 살던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도 아니었다. 그는 분열되고 갈라져서 이미 통일국가를 이룬 스페인 왕국과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의 위협 속에 살고 있던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국가, 피렌체의 외교관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가 탄생한다. 이 격변하는 시기, 각국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서로 집어삼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시기, 피렌체의 군주들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메디치가여, 나를 고용하고 내 조언을 따르시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소. 이것이 군주론의 집필 의도이다. 두 번째, 플라톤식의 사유방식은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이론적이어서 이 시기의 빠른 변화를 따라가기 역부족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무엇인가의 ‘원리’를 찾아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마키아벨리가 주목한 것이 역사다. 역사는 변화에 주목하면서도 공통의 원리를 찾아낼 수 있다. 그는 국가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바로 이 역사, 특히 고대의 패권을 장악한 동시에 가장 오래 지속되었던 제국, 로마의 역사에 주목한다. 그것이 로마사 논고의 집필의도이다.

2.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의 다른 점 같은 점

마키아벨리 연구자들이 가장 큰 난점에 처해 있는 마키아벨리의 모순 중 하나는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의 차이다. 군주론에서 군주제도를 옹호하던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는 공화정을 찬양하는 공화주의자로 변모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마키아벨리 연구자들은 메디치가에 헌사하기 위해 썼던 군주론보다는 나름의 로마사 연구를 거쳐 그의 고민이 어느 정도 확립된 시기의 로마사 논고가 마키아벨리 본연의 생각에 더 가깝다는 점에 대체로 동의한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이 두 가지 저서의 차이에 대한 설명은 네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첫 번째, 군주제건 공화제건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군주론은 메디치가에게 조언을 하기 위해서, 로마사 논고는 당시 공화제가 필요했던 국가에게 바쳐진 책이라고 본다면 마키아벨리에겐 어떤 방식으로든 국가를 위하여 그에 합당한 이론과 정치 기술을 제공한다는 그 자체가 중요했지 그 방법은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조지 세이빈이 주장하듯이 마키아벨리가 공화제를 궁극적인 이상향으로 보고 군주제를 그 과도기 형태로 보았다는 지적이다. 세 번째는 군주론을 하나의 일탈로 보는 입장이다. 기본적으로 공화주의자인 마키아벨리가 당시 공화제에 절망을 느껴서 잠시 군주제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돌아선 적이 있는데 이 때 집필된 책이 군주론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군주론이 자신을 고용해달라며 메디치가에 바친 책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더욱 명확해진다. 마지막으로 기본적으로 공화주의자인 마키아벨리가 군주는 나쁜 인간이라는 것을 까발리기 위해 군주의 비열하고도 비도덕적인 면을 부각시킨 것이 군주론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럼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의 마키아벨리는 그렇게도 분열적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거칠게 말해서 공화제를 이상으로 보느냐 군주제를 이상으로 보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두 저서에서의 마키아벨리는 상당한 일관성도 보이고 있다. 가장 우선적으로 그의 “마키아벨리즘”에는 변화가 없다. 즉 국가이익을 위해 수단의 도덕성은 생각하지 말자는 그의 생각은 두 저서에 변함이 없다. 군주가 국가 유지를 위해 어떤 술수를 부려야하는가라는 방법을 설명하는 군주론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로마사 논고 중에서도 이런 대목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직접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절대적으로 자기 조국의 안전이 걸린 문제일 때, 정당하지 않은가, 자비로운가 잔혹한가, 칭찬을 받을 가치가 있는가 치욕스러운가는 전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양심의 가책을 제쳐놓고 인간은 모름지기 어떤 계획이든, 조국의 생존과 조국의 자유를 유지하는 계획을 최대한 따라야한다.”

이런 마키아벨리즘의 실현을 위해 가장 필요한 핵심이 바로 군주의 “비르투나”(덕이라는 번역은 한국어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완전한 번역을 할 순 없으나 보통 “역량”으로 번역하는 게 맞다.)이다. 명예와 명성을 유지하는 군주의 비르투나는 공화제건 군주제건 모두 중요하다. 로마사 논고에서 마키아벨리는 전체적으로는 인민의 자유를 중시여기며 공화정을 옹호하지만 개혁이나 공화국의 발전에서 군주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다. 1권 44장의 “지도자가 없는 다중은 무력하다”거나 54장의 “흥분한 대중을 억누르는 데 사용되는 영향력 있는 인물의 강한 위력이 필요하다”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인민의 자유를 옹호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유지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군주의 비르투나인 것이다. 이 인민의 지지를 통해 군주는 국가 발전을 이끌어나갈 수 있다.

여기서 바로 플라톤의 그림자가 보인다. 마키아벨리는 플라톤의 철인왕과 유사하게 뛰어난 역량을 지닌 군주를 강조하고 있다. 그 군주의 역량에 따라 참주정으로 변화할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점 등에서 플라톤처럼 지도자의 자질(플라톤에겐 영혼의 자질이었다.)을 중요시하는 면이 보인다. 다만 그 역량은 플라톤이 말한 “선의 이데아”에의 도달이 아니라『국가』에서 글라우콘이 이야기한 “appearance(외양)”이다. 실제로 그러한 것보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군주는 명예롭게 보여야하고 인민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여야하며 도덕적인 것처럼 보여야한다. 실제로 그러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도덕적으로 보이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마저 포기하는 사태는 홉스에 이르러 나타난다. “어찌되었건 안전 보장만 해다오!”

3. 이것도 정치철학인가?

마키아벨리가 단지 무자비한 인간은 아니었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 먼 길을 돌아왔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도 정치철학인가?” 코플스턴이 마키아벨리와 홉스의 차이를 밝히며 말했듯이 마키아벨리는 정치의 기원, 근원을 밝혔다기보다 정체를 유지하는 방법, 즉 그 역동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정치와 철학의 대결의 한 축을 차지한다. 안토니오 네그리가『야만적 별종』에서 홉스-루소-칸트-헤겔에 대비되는 스피노자 사상의 한 축에 마키아벨리를 존재시킨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아렌트가 잘 지적했듯이 플라톤 이래 정치철학들은 정치를 철학 아래에 두었다. 정치가 작동하는 그 공적 영역이라는 장에 주목하기보다 철학이 정치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이 철학에 의해 정치체가 어떻게 변화해야하는지를 서술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홉스, 마르크스 등이 제시한 정치체제의 이상적 모델들이 이런 연유로 탄생한 것이다. 이 흐름은 마지막으로 철학의 우위를 주장하고 합리적 의사소통의 모델로 “통합”을 강조한 하버마스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상탈 무페, 라클라우, 랑시에르, 지젝 등의 현대철학자들은 이 통합의 철학, 혹은 이상모델의 제시(랑시에르가 원정치라고 부른) 대신에 간극과 균열, 틈의 정치를 제시한다. 이상국가의 제시와 이를 위한 다른 의견들의 통합은 철학-정치이다. 대신에 그 대립과 균열이(칼 슈미트의 논의에서도 이어지는) 곧 정치라는 주장은 정치-철학이 아닐까. “권력이 있다는 데는 모두 동의하잖느냐? 그럼 권력이 무엇인지 파헤치지 말고 그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주목해보자!”라며 정치의 역동성에 주목한 푸코의 방법론처럼 마키아벨리 역시 권력의 잔혹한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 역동성에 주목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물론 푸코와 같은 방법론의 세련됨은 떨어질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런 것도 “정치-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