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classic

홉스처럼만 되어도 좋겠다!

 


리바이어던. 1

저자
토머스 홉스 지음
출판사
나남 | 2008-08-2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완역한 책...
가격비교

 


리바이어던. 2

저자
토머스 홉스 지음
출판사
나남 | 2008-08-2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완역한 책...
가격비교

홉스의 리바이어던의 표지에는 우리가 많이 들어본, 그러나 막상 잘 모르는 한 괴물이 그려져 있다. 인간의 형상을 한 그 괴물은 한 손에는 칼은 한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있다. 욥기에 나오는 괴물 리바이어던을 형상화한 이 그림은 일반적으로 홉스를 아는 사람들(리바이어던을 안 읽은)이 홉스에 대해 갖는 대표적인 이미지이기도 하다. 절대 군주제의 정당화 혹은 국가권력의 무한적 권력 행사에 대한 논리적 근거. 그것이 홉스를 상징해온 것일지 모르겠다. 물론 홉스가 절대 권력을 정당화하려고 했다는 것은 일정 부분 사실이다. 실제로 조지 세이빈이 지적하듯이 홉스는 일정 부분 영국의 왕당파를 옹호하기 위해 리바이어던을 저술했다. 그러나 홉스의 이론은 왕당파로부터 오히려 공격을 받은 건 물론이거니와 왕당파와는 어울리지 않은 자유주의 이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나 역시 리바이어던이란 텍스트를 읽으면서 홉스의 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이 점에 대해선 박홍규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나는 혼자 생각했다. “홉스가 이야기한 것처럼만 되어도 좋겠다!”

1. 최초의 정치과학자 홉스

나는 홉스를 내가 아는 한 최초의 정치과학자라고 부르고 싶다. 물론 의미 있는 정치철학에 대해 언급한 학자들은 많았으나, 그 연구를 가설 설정과 논증과 같은 과학적 방식으로 접근한 이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확실히 입증되지 않은 과거의 권위나 경험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 데카르트주의와 가설을 설정하고 명제를 증명하는 갈릴레오 식의 근대과학의 연구방식, 가쌍디로 대표되는 유물론을 종합하여 정치 체제의 성립과정을 설명한 정치과학자였다. 그리하여 그는 정치 체제의 성립과정을 조금 다른 식으로 접근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니까 혹은 아퀴나스처럼 “사회적 동물”이라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게 정치 체제가 아니다. 그는 정치 체제의 성립과정을 추적하기 위해 정치 체제가 없던 상태를 가정하고 그 때 어떤 일이 발생할지 생각한다. 홉스의 결론은 하나였다. 오, 끔찍한 자연 상태!

국가는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던가 우리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그 이치를 인간법에 적용시키기 위해 살아간다는 게 플라톤의 주장이다. 그러나 홉스에 의하면, 자연 상태는 오히려 너무나 끔찍하다. 자기 보존의 욕구를 지닌 인간들은 저마다 지닌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서로를 불신하고 경계하며 노리고 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 개인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만인은 상호 계약을 맺는다. 그리하여 남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자유를 제약당하면서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고, 그 계약을 어길 자를 처벌할 폭력의 독점자, 코멘웰스commonwealth를 성립한다. “실제로” 국가가 그렇게 탄생했는가에 주목하지 말자. “마찰이 없다면” 운동은 계속된다는 갈릴레오의 주장처럼 “국가가 없다면”에 의한 논리적인 결론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본 가설 아래서 19가지 자연법을 도출해낸다. 기본 가정으로부터 도출되는 명제들. 이것이 홉스가 정치과학자라 불릴 수 있는 이유다. 홉스의 주장이 실제로 옳으냐 안 옳으냐를 떠나서, 그는 그 이전의 어떤 정치철학자들보다 “논리적”이었다.

2. 무서운 홉스

홉스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매우 무섭다. 표지를 장식하는 괴물에서 알 수 있듯이 리바이어던이 상징하는 것은 절대 권력이다. 국민들은 권력을 코멘웰스에 양도했기에 코멘웰스의 모든 행위는 곧 국민 개개인의 행위와 부합한다. 국민들은 통치 형태를 변경 할 수도 없고 주권은 절대적으로 박탈될 수 없으며 주권자의 행위를 국민이 비난할 수도 주권자의 어떤 행위도 처벌할 수 없다. 주권자는 법의 위에 존재하며 개인의 안전 보장과 복리를 위하여 모든 수단을 사용할 권한을 지닌다.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리 역시 근본적으로 주권자에게 있다. 심지어 당대의 진리와도 같았던 종교권력마저 코멘웰스 아래서만 존립할 수 있다. 성서를 해석하는 일도 코멘웰스의 권리이며 교회는 어떠한 정치적 세속적 권력도 지닐 수 없다.

나치의 법학자였던 칼 슈미트가 홉스를 매우 좋아했음은 물론이다. 그는『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정치 체제의 운영을 물리적 “운동”의 법칙으로 설명하는 홉스의 방법론을 이어받았다. 방법론은 물론 칼 슈미트의 결정적인 주장에는 홉스의 정신이 녹아 있다. 바로 칼 슈미트의 “주권” 개념이다. 칼 슈미트는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라고 정의한다. 즉 주권자는 법이 멈추어지는 순간과 발동되는 순간을 결정짓는 자이다. 이는 홉스의 주권자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홉스는 자연 상태에는 선악의 개념조차 없으며 코멘웰스가 성립되고 코멘웰스에 의해 법이 제정되는 순간부터 선악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이 순간 코멘웰스는 선악을 결정하는 존재이며 법의 상위에 존재한다. 칼 슈미트의 이런 주권자 개념은 나치의 행위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나치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을 정지시키고 군국주의 정부를 성립했다. 나치가 주권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홉스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주는 이가 바로 아감벤이다. 조르지오 아감벤은 홉스를 토대로 삼아 “수용소 정치”를 주장한 정치철학자이다. 그에 의하면 홉스, 그리고 슈미트와 같이 주권자는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가 맞다. 그러나 아감벤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런 예외상태가 현대사회에서는 너무나 일상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한 장면에는 수용소 간수들이 일하는 유대인들을 심심풀이로 쏴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그 안에서는 선악도 법도 없다. 수용소 간수들의 기분이라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불규칙적인 원칙이 곧 법이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죽어가는 중동 사람들, 그리고 검문대에서 법도 원칙도 없이 잡혀가는 테러 용의자들, 질병 치료라는 목적으로 실험실 위에서 “자발적으로” 자행되는 임상실험. 푸코에 의하면 근대국가가 국민을 규율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사람 살리는” 권력이다. 슈미트가 예외상태라고 표현한 법의 정지와 새로운 법의 발동은 주권자에 의해 너무나도 많이 자행되는, 그리하여 일상화되는 것이 현대사회의 모습이라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3. 홉스처럼만 되어도 좋겠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푸코나 아감벤이 이야기하는 현실을 보고 홉스는 이것이 정당하다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국가의 절대 권력 행사에 하나의 전제조건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코멘웰스의 목적은, 이에 의해 코멘웰스가 성립했기 때문에, 개인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권리를 양도했어도 양도될 수 없는 권리는, 개인의 자기 보존과 관련된 권리이다. “코멘웰스는 개인에게 자살을 강요할 권리는 없다!” 우리에게 직면한 현실로 설명해보겠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짓밟히는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가 아닌’ 것인지 ‘민주주의적인 필연’인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접어두더라도, 이것이 현실이다. “법치”라는 명분에 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인권은 짓밟히고 미란다 원칙은 적용되지도 않으며 무죄추정의 원칙은 박살난다. 국가권력은 시위하는 사람들은 무자비로 끌어내고 야간집회금지라는 조항을 자의적으로 적용하여 국민 일부를 “범법자”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나는 말하고 싶다. 적어도 “홉스는” 그렇게 하라고 한 적 없다고 말이다.

홉스에 의하면 국가가 국민을 위협할 경우 국민은 이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 홉스가 인정하는 거의 유일한 저항권이다. (시위를 하나의 예로 들었을 뿐이다. 시위 말고도 다른 예는 많다. “홉스는 국가에 저항하는 시위를 허용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면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렇기에 경찰이 나를 폭력으로 진압할 경우 나는 그 경찰에 저항할 수 있다. 왜? 나의 안전 보장을 하라고 만든 국가가 나를 폭행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 현실은 어쩌면 홉스가 말한 것보다 더 못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홉스가 말한 절대 권력이 치가 떨리는가? 어쩌면 우리는 홉스가 말한 절대 권력보다 더 절대적인, 어떻게 보면 더 무서운 절대 권력 하에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아감벤이 지적한 상황의 대안으로 홉스로 되돌아가자고 말하는 건 결코 아니다. 아감벤의 논의는 논리적으로 홉스에서 도출된 것이므로 그 대안이 홉스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위기는 기본적으로 공적 영역이 사라진 채 사적 이익만을 위해 행위하는 개인들에게서 비롯된 것이기에, 사적 이익으로부터 국가 성립을 도출해낸 홉스의 논의에는 분명 한계가 담겨 있다.(이런 비판은 한나 아렌트의 논의를 참고하면 된다.) 또한 홉스의 “저항권”이 굉장히 협소한 것은 사실이므로, “자기 보존”의 범위를 어디까지 정할 것인가에 따라 논쟁이 발생할 수 있다.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에서처럼 국가가 나를 직접 살해하려 할 때만 이 ‘자기 보존을 위한 저항권’이 발동하는가, 아니면 화염병을 던졌다며 나에게 중형을 선고함으로서 법적 폭력이라는 폭력을 행사할 경우에도 이 저항권은 발동할 수 있는가?

다만 중요한 것은 아감벤이 지적한 근대국가의 폭력적 현실은 홉스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홉스에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다. 근대국가 초기, 개인들이 파편화되어 세계에 던져졌다면 지금 개인들은 세계화 시대에서 국가라는 방패막을 잃고 파편화되어가고 있다. 홉스는 당대의 불안하고 공포에 질린 개인들의 안식처를 찾아주고자 절대 권력이라는 모델을 제시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개인들이 세계화라는 공포스러운 파도에 직면한 오늘날, 국가의 역할은 국민의 이 불안감과 공포심 달래주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국가의 의무는 아닐까. “미국산 소고기 안 사먹으면 됩니다.”의 문제가 아니라, 적어도 “안심하세요.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 정부가 검증합니다.” 정도의 말은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정말 개같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