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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글/미디어스 칼럼

[올림픽 특집] 누구를 위한 올림픽인가?

[올림픽 특집] 누구를 위한 올림픽인가?

'국익'의 신화를 넘어, 서커스가 아니라 빵을 요구하자

조윤호 / 자유기고가, <개념찬 청춘> 저자


편집자 주 : 올림픽에 대한 열광이 다른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시즌이다. 하지만 그런 기간에도 지구 반대편의 소식에 귀를 쫑긋 세우는 대부분의 사람들에 적응하기 힘들어 하는 이들이 있다. 1989년생 조윤호씨는 자신의 경험과 여러 사회적 맥락을 근거로 활용하여 우리에게 올림픽이 아닌 다른 것이 필요한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중계를 즐기는 짬짬이 남들의 ‘올림픽 이야기’도 즐겨보면 어떨까.

 

▲ 한 SSM은 올림픽 중계가 새벽에 있단 걸 착안하여 오륜기 모양 그릇에 담긴 야식세트를 출시했다. 올림픽 기간은 요식업에도 중요하다. ⓒ연합뉴스


처음에 미디어스로부터 “‘우리’에게 올림픽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글을 기고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대체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때문이었다.


언론은 올림픽 같은 국제 스포츠 행사가 있을 때마다, 대한민국 대표팀의 금메달 획득과 승리에 기뻐하는 국민들의 모습에 대해 보도한다. “전 국민이 환호했습니다.” “전 국민이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김연아의 경기가 있는 시간이면, ‘온 국민’이 숨을 죽이고 그녀의 턴을 지켜본다. 박태환의 기록 하나 하나에 ‘전 국민’의 희비가 갈린다. 마침내 박태환이 금메달을 획득하면, 스포츠 캐스터는 “국민 여러분 우셔도 좋습니다.”라고 외친다. 쓰러지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핸드볼 대표 팀을 보며 ‘온 국민’이 감동한다. 올림픽은 ‘온 국민’이 하나 되어 나라를 응원하고 사랑하는 축제이다.


나에게 올림픽은.......


나는 89년 겨울, 상계동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기 5개월 전,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우리 부모님도 날 낳기 전부터 상계동에서 살았다. 아시안 게임이 열린 86년부터 서울 올림픽이 열린 88년까지, 상계동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한파가 몰아쳤다. 국가는 그들을 내쫓았다. 노점상들이 쫓겨나고, 원주민은 하루아침에 철거민이 되어 삶의 터전을 잃었다. 87년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상계동에서, 철거민의 자녀인 오동근이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언론은 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치러졌으며,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이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했다고 떠들어댔다. ‘전 국민’이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나와, 우리 가족과, 같은 시기 같은 공간을 살아갔던 상계동 원주민들도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웠을까?


2년 전 2010년 케나다 벤쿠버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렸다. 내 동생은 그 때 돈을 벌기 위해 치킨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치킨집 입장에서 올림픽은 대목이다. 동생은 대한민국 대표 팀의 경기가 있던 날마다 치킨 냄새에 쩐 채로 집에 돌아왔다. 언론은 온 국민이 대한민국 대표팀의 경기에 밤잠을 설쳤다고 보도했다.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밤새도록 환호하는 국민들에게 치킨을 제공하느라 밤을 샜다. 언론은 대한민국 대표팀의 선전에 ‘전 국민’이 기뻐했다고 말했다. 동생도 대한민국 대표팀이 선전해서 좋았을까?


국익 증진 프로젝트, 올림픽


왜 국가들은 올림픽을 개최하려고 하는 걸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이유를 종합하는 하나의 키워드는 ‘국익’이다.


지난 날 올림픽은 집권세력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당하기 일쑤였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군부정권의 정당성을 아시안게임/올림픽 등 국제대회 개최를 통해 확보하고자 했다. 대한민국 대표팀이 다른 나라와 경쟁하는 동안, 대한민국은 독재자와 민중으로 구분되지 않는 ‘하나’가 된다. 대한민국 대표팀의 경기에 나타나 손 한 번 흔들어주고, 박수 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면서, 그들은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지도자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이는 집권세력의 정치적 의도에 불과하지 않은가? 올림픽 개최를 위해, 보다 광범위한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더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하다. 선진국으로의 도약 혹은 국제사회에서의 지위 상승과 같은 ‘국익’이 그것이다. 국제사회에서 지위가 높지 않은 후진국이나 중진국의 입장에서, 올림픽이나 월드컵 개최 여부는 그 국가가 선진국으로 인정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와 비슷한 문제다. 한국의 위정자들은 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통해 대한민국이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2002년 월드컵을 거쳐 대한민국은 그 이름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 2008년의 베이징 올림픽은 이제 중국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2강으로 올라섰다는 신호탄이었다.


혹자들은 올림픽과 월드컵 등 국제 스포츠 행사들의 목적은 ‘원래 순수’(각국 스포츠 선수들의 교류와 선의의 경쟁)했는데, 각국의 위정자들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아니다. 근대에 올림픽을 다시 부활시킨 사람은 프랑스의 쿠베르탱 남작이다. 쿠베르탱은 IOC(국제올림픽위원회)를 만들고, IOC의 초대 회장을 지냈다. 그가 고대 그리스에서 열렸던 올림픽을 부활시킨 이유는 체육/스포츠 교육을 통해 강인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어릴 적 조국 프랑스가 프러시아에게 맥없이 당하는 광경을 목격한 애국자 쿠베르탱은 영국, 미국 등 강대국은 체육교육을 중시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프랑스 교육에도 반영하고자 했다. ‘체력이 국력이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각 국가의 국력이라 할 수 있는 체력을 시험하고 경쟁하는 올림픽이 탄생했다. 올림픽은 원래부터 ‘국익’ 추구의 일환이었다. 올림픽은 그 기원부터 ‘순수’하지 않았다.


오늘날 올림픽 추진의 근거였던 국익이 업그레이드 하는 중이다. 더 이상 ‘가난한 대한민국이 어느새 올림픽을!’과 같은 감동전략은 잘 먹히지 않는다. 보릿고개와 한국전쟁을 겪은 어르신들에게는 아직 이러한 감동전략이 먹혀들지 몰라도, 요즘 젊은이들에게 이것만으로는 2% 부족하다. 그들은 대한민국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기에 태어나고 자란 세대다. 국내총생산 세계 11위, 월드컵 4강 진출에 빛나는 대한민국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세대인 것이다. 그들에게 맞는 새로운 버전의 국익이 필요하다. 그래서 언론과 민간 연구기관들은 우리나라가 국제 행사만 개최한다고 하면 앞 다투어 어마어마한 경제적 효과와 장밋빛 미래를 제시한다. 언론들은 평창 올림픽 개최가 확정되자 그 경제적 효과가 40조니, 65조니 하며 떠들었다.


▲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평창 올림픽 시장으로 이름을 바꾼 평창 전통시장. 지역주민들은 '올림픽 특수'를 기대하지만 그 효과보다는 지출이 더 많은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지금 올림픽은 일종의 경제개발, 경기부양책으로 업그레이드 하는 중이다. 강원도 도의회 의원들은 평창의 동계올림픽 개최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며, “실패하면 강원도는 낙후된다.”고 말했다. 대선주자 중의 한 명인 김두관도 자신의 책에서 남해군수 시절 덴마크 국가대표팀의 훈련캠프를 남해에 유치해, 지역경제를 살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그 외 각종 국제 행사는 이제 4대강이나 핵발전소 유치와 비슷한 지역발전 사업이 되어버렸다. 도지사와 군수들은 국제 행사 유치를 자신의 치적으로 내세우고, 도민과 주민들은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홍보활동에 참여한다. 국가 역시 올림픽을, 어려운 국가경제를 살리고 국익을 증진시킬 사업으로 이용한다.


국익? 누구의 이익인가?


나는 지난 2010년 G20을 며칠 앞두고 내가 자주 접속하는 사이트들에 G20에 반대하는 내용의 글을 써서 올렸다. 그러자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G20 한 번 열면 국익에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는데.” 나는 대답했다. “국익이요? ‘누구’에게 이익인지 명확히 말하시죠.”


올림픽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국익’은 정말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까? 진보언론에는 종종 올림픽을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나 사설이 실린다. 그럴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국민들이 보고 좋아하면 되는 거 아니냐.” “꼭 국가적 행사에 찬물을 끼얹네.”라고 응수한다. 아니, 그렇지 않다. 그 ‘국민’에 올림픽으로 인해 삶을 빼앗기고 엄청난 부담을 지는 이들은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 그들의 입장에서 올림픽은 찬물이 아니라 뜨거운 물을 끼얹는 한이 있더라도 막아야 할 생존이 달린 문제다.


80년대 한국의 독재/군부정권은 올림픽을 위해 도시 미관을 깨끗이 하고, 거리를 청소한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노점상들을 몰아내고, 원주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정권의 사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은 국민이 될 수 없었으며, 올림픽을 향유할 자격조차 가질 수 없었다. 이들을 배제하고 나서, 자기네들끼리 애국심 쩌는 국민 놀이하면서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고 낄낄거리며 좋아했다. 2008년의 중국은 세계2강으로 도약하기 위해 150만 명의 빈민들을 말 그대로 ‘청소’했다. 청소에 반대하는 주택환경운동가를 구금하고 고문했다. 자랑스러운 중국의 국민이 되려 하지 않은 죄였다. 96년 미국의 애틀란타는 올림픽을 기회로 삼아 흑인들의 밀집거주지역인 다운타운을 재개발했다. 언론과 위정자들이 자랑스러운 조국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하고 있을 때, 어디에선가 늘 고통의 비명이 들리고 있었다.


그래도 동계올림픽 한 번 하면 65조를 번다는데! 많이 벌어서 쫓겨난 철거민들한테 나눠주면 되지! G20으로 벌었다는 450조, 혹시 받아본 적 있으신가? 백 번 양보해서 올림픽을 개최하면 수십조의 경제적 이익이 창출된다고 치자. 미안하지만 그 돈, 당신들에게 안 돌아간다.


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면 투기꾼과 토건족들이 몰려들어 땅값이 잔뜩 올라간다. 올림픽이 끝나고 남은 경기장들을 유지하기 위해 지역 주민들은 엄청난 세금에 시달린다. 강원도는 평창 올림픽을 겨냥하고 강원개발공사를 통해 1조 6836억을 투자하여 강원 알펜시아를 건설했지만, 지금 하루 이자만 1억 2천 만 원을 내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치른 그리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치른 중국도 올림픽을 치르느라 엄청난 돈을 쓰고, 그 비용을 세금으로 다 메워야했다. 런던시도 올림픽으로 인한 재정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영국의 런던 올림픽 장관 테사 조웰은 2008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때 우리가 (비용에 관한) 진실을 알았더라면 올림픽 유치 신청을 했을까요? 확실하게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 철거민들의 시위 모습. 올림픽은 우리나라에서도 다른 나라에서도 재개발의 훌륭한 명분이 되었다. ⓒ연합뉴스


우리는 화려한 올림픽 앞에서 환호하고, 그 경제적 효과에 다시 한 번 환호한다. 우리는 곳곳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를 듣지 못한다. 올림픽이 끝나고, 막대한 세금을 부담해야 하는 지역주민들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70억 흑자를 기대하고 F-1 자동차 경주 대회를 개최한 전라남도 전남은 지금 1200억 원의 손해를 예상하고 있다. 아시아게임을 개최하려 했던 인천에서도, 막대한 예산 부담을 이유로 많은 시민들이 대회 반납을 원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비명소리도 들린다. 런던올림픽 공식 후원기업인 아디다스가 올림픽 용품을 만들기 위해 캄보디아의 노동자들을 저임금 고강도 노동으로 착취하고 있다. <가디언>은 런던올림픽의 마스코트인 웬록과 맨더빌이 중국의 노동착취공장에서 만들어졌다고 보도했다. 자연의 비명소리도 들린다. 강원도는 평창올림픽을 위해 가리왕산에 스키활동코스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가리왕산은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지역이다. 잠깐의 올림픽을 위해 보호구역까지 개발해 자연을 파괴하겠다는 것이다.


서커스가 아니라 빵을!


우리는 애매모호하고 확실하지도 않은 ‘국익’을 앞세워, ‘온 국민’의 축제니 뭐니 하는 말로 올림픽을 포장하는 짓을 그만둬야 한다. 국익이 아니라, 누군가의 이익이다. 토건사업자들과 투기꾼들의 이익이자, 자본가와 초국적기업의 이익이며,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엄청난 수익을 거둬들이는 IOC의 이익이다. 우리는 올림픽을 감싸고 있는 국익이라는 포장을 뜯어내고, 그 안에 숨은 ‘누군가의 이익’을 폭로해야 한다. 국민 안에 포함되지 못하는, 올림픽의 환희에서 배제된 이들을 ‘우리’로 호명하고, 그들에게 올림픽이 필요한지 되물어야 한다.


지난 2008년 캐나다 토론토 시는 하계올림픽 유치를 추진했다. 그러자 시민들이 앞장서서 올림픽 유치에 반대했다. 올림픽에 반대하던 토론토의 시민단체 이름은 ‘서커스가 아닌 빵을’ 이다. 자본가와 IOC, 토건 사업자들, 그리고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은 올림픽이 우리에게 빵을 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빵을 먹고 싶다면 그 돈을 빵을 사는 데 써야 한다. 올림픽 개최할 돈이 있으면, 그 돈으로 복지, 문화, 교육에 투자해야 한다. 올림픽은 필요 없다.

 

<미디어스>에 기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