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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적 주체로 거듭나기 위한 하나의 모험: 공동생활전선(1)

자음과모음 가을호에 실린 공동생활전선 글 초안. 편집 후는 자음과모음을 찾아보세요.


담론적 주체로 거듭나기 위한 하나의 모험: 공동생활전선(1)

0. 20대 운동의 주체성을 위하여

이 글은 여러분이 지금 읽고 있는 『자음과 모음』 편집부의 제안을 받고 쓴, ‘공동생활전선’이라는 기획을 준비하고 있는 20대들의 모임에 대한 기록이다. 사실 우리는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 단계에 들어서지 못했고, 그저 준비 단계를 거치고 있는 모임인 만큼 이렇게 공개적인 지면을 빌려 자신들을 소개하기에는 좀, 아니 많이 민망한 감이 있다(아마 이 글이 실린 가을호가 출간될 때쯤에야 겨우 시작 단계를 지나갔을 것이다). 게다가 문예 계간지인 『자음과모음』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 평생 문예지라고는 펼쳐보지도 않은 이들이 대부분인 ‘공동생활전선’에 대한 글이 실리는 것도 좀 이상한 일이 아닌가, 하는 고민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에겐 생활의 공간을 마련할 때 원고료가 보탬이 되리라는 현실적인 기대감이 민망함과 멋쩍음보다 더욱 컸기 때문에―원고료는 우리에겐 방 보증금의 1/10에 달하는 상당한 거액이다―호락호락하지 않은 경제적 사정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막상 원고를 쓰려니 그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멤버들 각자가 앞으로의 기획을 실현하기 위해 아르바이트와 이런저런 세미나, ‘공동생활전선’ 준비 모임 등으로 빽빽이 채워진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여름방학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원고를 공동 작업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채찍질(?)하고, 마감 기한을 열흘가량 미룬 뒤에야 겨우겨우 이 원고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초장부터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그리고 아마도 편집부가 원고를 의뢰할 때 염두에 두지 않았을―우리의 사정을 구질구질하게 적어 내려가는 이유는 “따로 별다른 활동도 한 적 없이 평범하게 살아온 20대 대학생들이자, 20대 운동1)을 준비하는 ‘공동생활전선’의 구성원들이 머리를 굴려가며 『자음과모음』이라는 계간지에 자신들에 대한 소개 글을 써야 하는 우리의 상황” 그 자체가 어디선가 마찬가지로 20대 운동을 펼쳐나가고 있는 누군가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위 문장에서 ‘공동생활전선’이나 ‘자음과모음’이라는 고유명사만 다른 이름으로 바꾼다면 이는 분명히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일종의 20대 운동이라 할 수 있을 ‘공동생활전선’을 준비하면서, 또 이 원고를 작성하면서, 몇 년 사이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또 그만큼 많은 수가 좌초되고 있는 ‘20대 운동’에 대한 고민들을 더욱 확장할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20대에 대한 논의에 대표주자격으로 계속 매체에 소환되고 있는 한윤형 같은 경우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88만원 세대’ 담론은 많은 20대들과 출판기획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윗세대 선에서 문제를 지적했으니 이제 20대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자는 착상이 여기저기서 생겼다. 그래서 2008년부터 여기저기서 20대들을 묶어 무언가를 해보려는 시도들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나 자신도 그 시도의 다발 중 어느 한 곳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시도들은, 지금 이 순간까지는 전혀 성과물을 내지 못하고 있다.2)

한윤형의 증언처럼 “20대의 목소리를 들어보자”는 명목으로 여기저기 기획이 생겨나고, 이런저런 20대들을 모아내고, 이것저것 글들을 묶어서 쏟아져 나온 책들이 그동안 한두 권이 아니었다. 3) 출판물 형태뿐만 아니라, 20대들의 사회적 기업이나 문화 생산자 조합, 청년 노조, 인터넷 방송, 웹진이나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20대 운동’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움직임들이 있었다. 그러나 ‘88만원 세대’의 후광을 업고 동세대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은 정작 ‘20대들의 목소리’가 아닌, ‘20대들을 향한 목소리’4)였다. 결국 ‘20대 운동’은 새롭고 흥미로운 소재를 찾아다니는 언론이나 출판계의 인기를 얻긴 했으나, 오히려 그 수신인이어야 할 20대들 자체에게는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동세대들에게 급격한 반응과 어느 정도의 성과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20대 운동’이라는 것이 등장한 지 겨우 3년 남짓이기 때문에 벌써부터 실망하고 좌절한다면 처음부터 하나마나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바로 어떤 형태로든 20대 운동을 기획하고 꾸려가고 있는 당사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조급하게도, 그리고 늘 같은 방식으로 20대들을 야단치고, 훈계하고, 지레 기대하고, 금세 실망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은 ‘어른들’이다. 지방선거가 끝나자마자 “도무지 패기가 없는 놈들이라며 요즘의 20대를 깔봤던 저의 교만을 사죄드립니다. 공연 무대에서 무릎 꿇고 사과하겠습니다”라며 자신의 트위터에서 ‘오바’하던 뮤지션 신해철의 모습이 그 전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때때로 이렇게 ‘오바’하는 어른들이 알아서 뭔가 해보려는 젊은이들에게 괜히 충고하고, 허세를 떨고, 도우려는 제스처로 멀쩡한 기획들을 교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뭔가 있구나 싶으면 달려와서 이런 운동을 홍보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달라붙는 언론들(그것도 경험적으로 보았을 때는 대부분 그나마 나름 개혁적인 축에 속한다고 자부하는 경향, 한겨레, 시사IN, MBC 등이 특히 그러하다), 이런 걸 하는 데 날 빼놓으면 섭섭하다는 듯 꼭 어디선가 끼어들어서 아무런 의미 값도 찾을 수 없는 칭찬이나 격려 또는 충고를 던지는 몇몇 ‘선생님’들, 젊은 애들을 어떻게 좀 써먹어볼 수 없을까 싶어서 접근해오는 정당이나 정파 들……. 정작 20대 당사자들은 차근차근 사업을 진행하고 뜻을 함께할 동료들을 모으기에도 바쁜 차에, 이러한 과잉 친절(혹은 교란 작업?)이 끼어들면서 운동의 동력이 분산되고, 또 상황에 따라서는 그것이 모임의 내외적 분란으로 번지는 경우까지도 있다.5) 그러나 그러한 실제적인 방해들을 제외한다면, ‘20대 운동’에서 ‘어른들’의 적절하지 못한 개입이 가져오는 가장 큰 폐단은 무엇보다도 ‘20대 운동’이 그 자신의 목소리를 갖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대 운동’의 의의는 20대들을 둘러싼 현실들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그것에 맞닿아 있는 20대 자신들이 주체성을 가지고 발언하고, 또 그것을 바꿔나가기 위해 행동에 나선다는 데 있다. 그때 ‘20대의 주체성’이란 20대 본인들이 스스로 사회적 현실을 인식하고, 또 그것을 자신들의 언어로 정식화해서 20대 자신들이 발언할 때에야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20대 담론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88만원 세대’라는 규정 자체가 어느 ‘선생님’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생각해볼 때, ‘20대의 주체성’은 담론의 출발에서부터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지금의 ‘20대 운동’이 계속해서 그 근거를 어느 ‘선생님’의 규정에 둔다면, 그리고 활동가 본인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유형무형으로 ‘선생님들’의 개입이 지속된다면, ‘20대 운동’은 결국 자기 뿌리를 굳건히 하지 못하고 단지 그 선생님들을 추종하는 팬클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20대 운동’에게 현재 필요한 것은 어른들에 의해 규정된 지금의 20대 담론 자체를 새롭게 규명해내는 작업과, 그것을 ‘선생님’의 언어가 아닌 우리의 언어로 재정식화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그러한 작업을 ‘담론적 주체로 거듭나기’라고 부를 것이며, ‘공동생활전선’의 당면 목표도 바로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당장 동세대의 반응을 얻어내긴 어렵더라도 공론 공간에 자기주장을 담은 글들을 생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지금 이렇게 글을 쓰게 된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억압과 규율의 공간에서 자립과 저항을 말하다

우리의 첫 만남은 2009년 9월, 군대 내부 전산망인 인트라넷을 통해서였다. 당시 인트라넷에는 ‘책마을’이라는 인문사회 독서 커뮤니티가 존재했다. ‘책마을’은 언제부터 있었는지, 몇 명이나 그곳을 거쳐갔는지 알 수 없는 그런 공간이었다.6) 군인들로 구성되어 있던 만큼 아무리 오래 ‘책마을’에서 활동했던 회원도 전역을 하면 다시는 접속할 수 없었고, 인트라넷에 별다른 검색 포털이 없는 만큼 한 번 즐겨찾기를 해놓지 않는 이상 다시 찾아내기 어려웠다.


대부분이 20대인 군인들이 모여 있는 ‘책마을’에서도 역시 몇 해 동안 뜨거운 반응을 얻었던 ‘88만원 세대’ 담론이 불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책마을에서 ‘88만원 세대’론이 뜨겁게 달아올랐던 것은 2008년 『문학동네』 겨울호에 실린 ‘청춘의 종언’ 좌담회7) 내용이 책마을에 옮겨진 뒤부터였다. 워드프로세서 18쪽에 달하는 좌담회를 한 글자 한 글자 타이핑해서 올린 이 글을 보고 누군가는 슬픔을 느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답답함을 느꼈으며, 엄청나게 분통을 터뜨린 이도 있었다. ‘불안한 20대’라는 규정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이는 없었고, 따라서 스스로도 슬픔과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좌담회는 꼭 그만큼의 꺼림칙함을 가져다 주기도 했는데, 요즘의 이십대들은 ‘반항, 도발, 상상력, 순수, 열정 등의 낭만주의적 (청춘의) 특질’들을 상실하여 ‘노회하기도 하고, 영악하기도 하고, 젊은 고유의 패기나 무모함이 부족’해지는 20대와 청춘의 분리 현상을 겪고 있다는 전제, 그리고 그로부터 이어지는 ‘특징이 없다, 겁에 질려 있다, 계급적 열등의식을 완전히 내면화하고 있다’ 등등의 규정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과연 ‘우리들’이 스스로 그러한가에 대한 의문부터,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될 때까지 너희 어른들은 과연 무엇을 했느냐는 책임론, 우리는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이냐는 질문까지 다양한 말들이 근무 시간 틈틈이 쓰인 텍스트들을 통해 튀어나왔고, 논의들은 꼬리를 물고 책마을이 없어지는 그날까지도 지속되었다.


오랜 기간 동안 책마을에서 진행된 ‘88만원 세대’에 대한 논의는 거칠게 보아서 세 가지 정도의 문제의식으로 좁혀졌다.

(1) ‘88만원 세대’론에 대한 20대의 반응은 “너희들은 한 달에 88만 원 받기도 힘드니까 죽어라 공부하고 위에 개기지 마!”라는 보수적 프레임에 갇히거나, 또는 “20대들의 목소리를 팔아보자”는 (어른들의) 진보적 상업주의에 포섭되었다. 이때 20대들은 자기 목소리를 가진 담론적 주체가 아닌, 세대론에 의한 호명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사실 20대들의 자기주장이 이제까지는 마치 없었다는 듯이 ‘짱돌을 들 것’을 요청하는 우석훈이나, 20대들의 정치적 보수화를 비판하는 김용민이나 모두 20대를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본다는 점에서 동일한 의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에 대해 안타까워하건 혹은 그것을 비판하건, 이들에게 20대는 지금 당장 담론의 주체가 될 능력이 없는 무능한 세대로 인식된다. 이러한 상황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역사가 언제나 증명해왔듯이) 20대 스스로가 20대들의 생각과 행동이 가장 급진적이고 또 예리하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이는 ‘20대 운동’이 20대 스스로의 문제에 대한 인정 투쟁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상황을 재생산하는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로 이어져야 할 필요를 보여준다.


(2) 물론 ‘당사자 운동’의 측면에서 의미 있는 시도들이 없었던 것이 아니나, 운동이 지속성을 가질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 갖춰지지 않는 이상 결국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20대들이 독자적으로 자신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경제적 비용을 감당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회적 현실 속에서, 부모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운동’에 투신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반발에 부딪힐 수밖에 없으며 또한 그것을 몇 년 이상 지속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20대가 자신이 처한 사회경제적 현실을 바꿔내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가족의 품을 떠나 ‘자립’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3) 설령 물질적 조건이 충족된다 하더라도, 이제는 찾기 어려워진 ‘연대’와 ‘투쟁’이라는 상실된 가치를 되살려내지 않는 이상 20대 운동은 마치 지금 학생운동이 처한 상황처럼 일부 특이한 애들의 소란으로 여겨질 뿐이다. 단순히 20대의 정치적 참여를 독려하는 것을 넘어서, 구체적인 상황을 다루면서 일반적으로 공감할 수 있을 주제를 다뤄야 할 것이며 그 문제제기 방식 역시 단순히 ‘글’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20대들에게 더욱 일반화된 매체를 통한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첫 단계로 주장된 것이 ‘가출’이었다. 사실 한국사회의 거의 기본적인 합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부모가 자식이 독립할 때까지 데리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적인 합의가 오히려 20대 문제를 심화시키는 원흉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우리들이 ‘가출’을 생각하게 된 원인이었다. 오늘날의 20대 대부분은 (학교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이상) 부모와 함께 살며 등록금과 생활비를 지원받는다. 그러나 불과 20~3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많은 젊은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가족과 눈물로 이별 후에 도시로 상경하여 돈을 벌며 자립하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부모 세대의 이야기다. 그러나 오늘날 20대 초반의 젊은이 대다수는 대학생이며, 따라서 경제적 활동을 몇 년간 유예받은 축복받은 존재들이다. 적지 않은 등록금을 부모들이 부담하며, 자취생의 경우에도 대부분의 경우 부모의 지원으로 생활해나간다. 여기에 과외나 알바를 한다면 생활비 정도는 제가 벌어 쓰기도 한다. 그러나 용돈을 받지 않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기본적으로 20대 대학생들은 집에서 ‘부양’받는 존재인 것이다. 경제가 어렵고 취업이 어렵고 미래가 불안해서 학점과 스펙 관리에 열중하지만, 일단 그것은 ‘미래’의 문제다. 적어도 현재 20대들 자신에게 돈이란 현실적으로 나를 짓누르는 문제는 아니다.


한국의 경우와 다르게, 성인이 되면 집에서 독립하는 경우가 많고 친구랑 같이 살든 연인과 동거를 하든 어쨌든 나름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경제적 자율성을 갖추려는 유럽 젊은이들은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와 닿는 경제적인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까? 그들은 등록금과 취업 문제로 수만 명이 거리로 나선다. (물론 한국과 유럽의 정치적 경험의 유산이 다르긴 하다. 그러나 바로 몇 년 전에 한국 젊은이들 역시 촛불을 들지 않았는가?) 그러나 한국 젊은이들이게 돈 문제란 ‘막연한’ 불안과 공포의 대상일 뿐이다. 부모라는 방패가 나를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20대 문제’란 나의 일이면서도, ‘지금’ 나의 일은 아닌 것이다. 적극성이 결여된 것은, 어쩌면 가정이라는 온실에 갇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현재 20대 문제의 큰 축을 이루는 것은 대략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고(노동권), 높은 부동산 가격 때문에 독립된 주거 공간을 찾을 수 없으며(주거권), 너무나 높은 등록금과 생활비를 자율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교육권). 그리고 그것은 ‘부모가 자식을 독립할 때까지 데리고 사는 한’ 반복적으로 지속될 문제인지도 모른다. 만약 성인이 된 자식을 무조건 독립시키는 사회적 관습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등록금과 학교 주변 집값이 치솟을 수 있었을까? 분명 굉장한 반발이 있었을 것이다. 자식을 독립시켜야 할 부모 세대 또한 이에 호응해주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반발은 자연스레 젊은이들을 ‘연대’하게 했을 것이고, 이러한 ‘연대’의 경험은 단지 20대 문제에 한정된 것이 아닌, 큰 사회적 자산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20대 초중반의 한국 젊은이들에게 ‘독립’과 ‘경제적 자립’이란, 단지 소설이나 드라마 속에나 등장하는 가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남성 소설가들의 비아냥거림에 맞서, 그들과 달리 여성이 소설을 쓸 수 있으려면 1년에 5백 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오늘날 무기력하고 야심이 없다고 어른들에게 비난받는 20대들에게도 마찬가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20대가 소설을 쓰거나, 밴드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려면, 혹은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년에 천만 원 이상의 자기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이것은 거꾸로 이러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는 이상, 그러한 활동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3. 함께 가난해지기를 두려워하지 않기

그러나 과연 20대의 ‘자립’은 정말 환상에 불과한 것인가? 일상 속에서 공상적으로, 또는 낭만적으로 많은 20대들이 집에서 독립하기를 꿈꾸지만, 많은 경우 경제적 문제나 가족 간의 유대 등을 이유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정말로, 지금 현재 우리가 가진 현실적 조건에서 자립이 불가능한지 따져볼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재기 넘치는 젊은이 마쓰모토 하지메가 쓴 『가난뱅이의 역습』이라는 책이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20대 문제가 심각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으며, 비정규직이 확산되고, ‘프리터족’들이 늘어만 가는 일본의 현실에서, 젊은이들에게 가난하게 살아가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한 ‘가난뱅이 전략’을 펼칠 것을 주장하는 책이다. 마쓰모토 하지메는 오늘날 자립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취해야 할 행동은 ‘가난뱅이 전략’임을 알리고, 책을 통해 그 스킬들을 하나하나 전수하고 있다. 싼 값에 주거지 구하기, 노숙의 원칙, 걸식의 전략, 교통수단을 싸게 이용하는 법, 히치하이킹을 이용하기, 싼 값으로 인쇄물 만들기 등의 실용적인 ‘가난뱅이’ 스킬들. 그러나 이 책은 단지 웃고 넘길 만한, ‘가난뱅이로 사는 실용서’에 그치지 않는다. 마쓰모토 하지메는 무엇이 우리를 ‘가난뱅이’로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지, 그리고 그것에 저항하는 법이 무엇인지 고민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과잉 소비적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다. 물론 학점, 스펙, 인맥 등을 쌓아나가고, 무한 경쟁에서 승리한다면 덜 가난하게 살 수도 있고, 어쩌면 ‘엄친아/엄친딸’로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소수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대다수의 우리는 ‘잉여’나 ‘루저’라는 유행어가 표상하듯이 자학적인 패배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20대 문제'는 언론이, 정치인들이 문제라고 떠들어댄다고 해서 쉽게 제거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가 품고 있는 근본적인 모순 중 하나인 것이다. 유럽의 ‘천 유로 세대’나 일본의 ‘프리터 세대’가 등장했듯이, 정도는 다르지만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세대적 가난의 문제는 어디에서나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쓰모토 하지메는 『가난뱅이의 역습』을 통해서 기본적으로 상품의 생산과 판매(소비)를 원칙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뱅이’로서 소비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가난뱅이 전략’은 그 개인적인 실천 중 하나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은 상품이 된다.’ 그러나 모든 상품이 팔리는 것은 아니다. 상품은 팔릴 때에만 자본으로 전환되고, 또 그 자본이 상품으로 생산됨으로써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진다. 만약 팔리지 않는 상품이 늘어나면, 그만큼 체제는 위기를 겪게 된다. 만일 우리가 자발적으로 ‘가난뱅이 전략’을 실천하여 상품이 팔리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소비 양식의 변화를 통해 소비자본주의 사회의 존재 양식 그 자체에 구멍을 내는 것일 수 있다.


또 다른 ‘가난뱅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20대들이 마쓰모토 하지메의 주장처럼 ‘가난뱅이 전략’을 통해서 ‘독립’과 ‘저항’ 모두를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 마쓰모토 하지메의 지침 중 하나는, ‘공동으로 생활할수록 소비는 줄어든다’는 것이다. 물론 (사립대를 기준으로) 한 달에 100만 원에 달하는 등록금 전액을 당장 자가 부담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적어도 공동생활을 통해 독립된 주거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사실 이미 전혀 모르는 사람끼리도 인터넷을 통해 룸메이트/하우스메이트를 구하는 일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20대 문제’, 더 나아가 ‘체제에 구멍 내기’를 고민하는 이들끼리 같은 목적을 공유하며 ‘공동(가출)생활’을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마쓰모토의 책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것이다. 만약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공동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경제적으로 자율적인 독립생활에 한발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은 버지니아 울프가 제안한 ‘자기만의 방’을 상징적이고, 낭만적인 공간이 아니라, 정말로 20대들의 실질적이고 물질적인 토대로서의 공간으로 마련하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주체로, 물질적·정신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가출’이라는 생활양식의 전면화. 이때의 가출은 단순히 물질적으로 부모의 집에서 뛰쳐나와야 한다는 의미에서 더 나아가, 20대들을 쥐고 있는 ‘어른들’의 담론을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20대들이 먼저 20대가 속해 있는 ‘부모〓어른’들의 영향권 밖에서 설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20대 운동’이라는 것이 정말로 20대 당사자들에게서 촉발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바로 그 생각에서부터 이 글을 쓰는 ‘우리들’, 공동생활전선이라는 기획이 시작되었다.


4. 무엇을 위한 공동생활전선인가?

‘공동생활전선’이라는 이름은 기본적으로 공동생활을 통해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한 전선을 형성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때의 ‘전선’이란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20대들의 연대성을 지향하며, 그러한 상황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사회적 모순에 대한 저항과 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고자 하는 개인이나 모임 모두가 따로, 또 같이 행동하며 특정한 장소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길고 긴 투쟁의 연쇄를 만들어가길 소망하는 마음을 담고 있기도 하다.


사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공동생활’이라는 아이디어 자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대학가에서만 하더라도 주거 비용을 분담하기 위한 룸메이트의 형태부터, 고시 준비생끼리 생활 패턴을 함께하는 이른바 ‘생활 스터디’나 ‘토플 합숙’ 등, 전혀 모르는 타인끼리도 목적과 필요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공동생활을 이루고 있다. 그러니까 ‘나름의 이유가 있다면’ 공동생활이란 전혀 20대들에게 낯선 형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경제적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전제가 추가되면, 아주 낮게 잡아 1인당 40만 원 정도의 월세와 생활비용을 부담한다고 볼 때 1년에 500만 원에 가까운 경제적 부담이 생긴다. 결국 문제는 이것인데, 대학생의 경우 학업을 지속하면서, 또 동시에 1년에 500만 원 이상의 소득 활동을 병행하고, 또 공동생활에 수반하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우리가 공동생활을 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만약 그 분명한 이유가 제시되지 못한다면, 공동 가출을 시도하더라도 그것은 갈등과 불편함만을 남긴 채 곧 무산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공동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 그러니까 공동생활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좁게는 ‘20대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데 따르는 실천적 방안으로서, 또 넓게는 ‘20대 문제’를 낳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생산 관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에 대한 대안적 방안을 도출해야 한다는 것, 다르게 말해서 우리들의 ‘대의(大義)’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20대 문제는 단순히 특정 세대가 우리 세대를 억누르고 착취했기 때문에 촉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세대 관계를 넘어서, 특정한 세대, 지역, 계층을 착취할 수밖에 없도록 작동하는 체제 자체의 문제이다. 이는 또한 한국이라는 한 나라에 국한된 문제도 아니다.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 자체가 국가, 인종, 민족, 성, 지역, 세대, 계급을 끊임없이 차별적으로 위계화하고, 또 그러한 차별적 체계가 착취와 또 다른 착취를 재생산하는 것이 ‘20대 문제’의 궁극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20대 문제’를 고민한다면, 마땅히 이러한 착취의 재생산 자체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또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고민 없이 ‘20대 문제’가 단순히 20대의 이익을 옹호하고 권리를 주장하는 인정 투쟁에 지나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착취와 고통의 재생산에 눈감는 일에 불과할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윤리의 문제이다. 우리의 삶이 조금 더 풍요롭기 위해 다른 이의 풍요로울 권리를 박탈할 수 있을까? 그것이 우리의 뒤 세대 혹은 우리의 자식들이 된다 하더라도? ‘20대 문제’는 결국 우리에게 윤리의 문제를 일깨워준다. 우리의 이전 세대가 의식적으로 지금의 20대들을 불행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도적이건 그렇지 않건, 지금의 체제 안에서 살아간다면 결국 비윤리적인 삶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미래의 다음 세대가 되었건,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누군가가 되었건 간에, 우리는 누군가의 불행을 빚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에게 닥친 불행은, 이전의 누군가가 누린 삶에 대한 채무를 대신 이행하는 것이다. 그것에 고통받는 우리가 다른 이에게 다시 빚을 지울 수는 없지 않는가? 따라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분명하게도 이러한 윤리에 충실한 삶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동생활’은 바로 그 시작점에 있다. 공동생활은 단지 경제적인 이유에서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실천해야 할 ‘대의’와 ‘윤리’가 무엇인지 명확히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어렴풋이 ‘바꾸어야 한다’라고 생각할지라도,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지 생각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대의’와 ‘윤리’는 공부와 행동을 통해서 규명하고 또 실천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공동생활’은 그에 가장 적합한 방법일 수 있다.


5. 전망과 과제를 품고 새로운 시작으로

‘공동생활전선’의 기획은 책마을 내에서 논의를 거듭하며 점차 구체적인 목적을 가진 형태로 발전해나갔다. 여기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일단 이 기획에 관심을 가지고 의견을 냈던 사람들이 주로 서울 동북부에 위치한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었다는 점이며, 이들 모두가 좌파적인 정치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논의가 구체화될수록 공동생활전선의 형태는 ‘좌파 대학생들의 공동생활’로 좁혀졌다.8) 모임의 형식이 이렇게 정리되자 공동생활전선의 멤버인 박가분은 ‘공동생활전선’이 앞으로 마주쳐야 할 몇 가지 쟁점들을 지적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과연 20대들이 자력으로 담론의 주체로서 담론 공간의 전면에 나서는 것이 가능한가?

현재 대학생은 대학 사회를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인력 풀이자 자원의 공급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에서 전혀 하나의 학문적 주체, 담론적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일단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담론 공간 자체가 적어도 박사학위 정도는 받아야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 인정받고, 또 그만큼 ‘발언’할 수 있는 틈이라도 생긴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원리상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에는 지적으로 평등한 관계가 수립된다는 전제9)를 끝까지 밀고 나가며, 우리 대학생들 또는 학교에 적을 두지 않는 20대 역시 대등한 지적 주체로 교수-지식인 사회에 마주 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이것이 형식상으로나마 가능했을 때―이를테면 68 혁명이나 87년 6월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필연적으로 사상적 전환과 이에 따른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음은 역사를 통해 입증된 바 있다.

(2) 20대들이 자본에 의지하지 않을 때 어느 수준까지의 경제적 독립을 이뤄낼 수 있을까?

공동생활전선은 경제적 자립을 기본 원칙으로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소비에 대한 제한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당장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믿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공동으로 생활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은, (아무래도 자본에 의해 강제될 수밖에 없었던) 방종한 소비생활에 끼어 있던 거품들, 결국은 자기착취로 귀결되는 이 악순환 구조, 불필요한 삶의 비용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일정 정도 소비사회에 익숙해진 개인의 습관을 바꾸는 실천을 해나가면서, 또한 더 높은 경제적 자립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대학 사회에서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일정 부분 생산자의 역할을 맡게 되는 우리의 상황을 어떻게 급진적으로 전화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지속해나가야 할 것이다.

(3) 어떻게 하면 20대 운동을 ‘개인의 심미화된 삶의 형태’와 무관한 수준에서, 이미 오래전에 상실된 ‘집단적인 삶의 형태’로 재구성해낼 것인가? 이때, 새로운 삶의 형태란 무엇인가?

‘학생 운동의 위기’가 이야기되는 시점에, ‘좌파 대학생’들은 학생 사회에 대한 정치적 개입을 해야 할 의무를 갖고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여기서 공동생활전선은 기본적으로 ‘학생 사회에 대한 개입’이라는 목적을 가지며, 이를 위해서는 ‘개인의 심미화된 삶’을 거부하고 ‘집단의 정치화된 삶’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학생 사회에서 ‘정치적 대의’를 대표해왔던 학생운동마저 오늘날에는 일정 부분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들의 심미적 운동으로 치환되는 모습10)을 보면서, 또 많은 20대 운동들이 그 당사자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적 시선에 의해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낭만화하고 심미화되는 것에 대해 우리는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 공동생활이라는 형태는 20대의 정치 사회적 의식이 ‘개인적 감수성-취향의 문제’로 환원되는 현재 상황에 대한 적극적 거부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4) ‘학생의 본문은 학문’이라는 저 고전적인 관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정치적으로 첨예화시킬 방안이 존재하는가?

학생 운동에 대한 냉소적 태도 중 하나가, 학생이면 일단 공부를 하는 것이 본업이며 그것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운동’을 하는 것은 학생 본연의 자세를 포기한 것이라는 비난이다. 이러한 태도에는 자신들은 본업을 충실히 이행한, 혹은 이행하고 있는 ‘학생’이며, 너희는 ‘학생’이 아니라 '운동권'이라는 구별 짓기가 내재되어 있다. 우리는 여기에 맞서, 각자의 전공 수업에 대한 학업 성취를 포기하지 않고, 또 이것을 정치화하여 우리의 이론적 자산으로 이끌어가야만 한다. 우리는 같이 생활하면서, 자신의 삶을 주권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 때 학문은 운동의 일부로서 정립될 수 있다는 가설을 가지고, 학문과 운동이 대립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해내는 것을 목표로 삼을 것이다.

(5) 어떻게 하면 종교 공동체의 도덕적 강박으로 퇴행하지 않고 대의를 삶 속에서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기본적으로 공동생활전선을 이끄는 것은 우리가 공유하는 정치적 지향, 좌파적 이상의 한 형태가 될 것이다. 이것을 ‘대의’라고 말하겠다. 우리 모두 어느 정도 각자 다른 ‘대의’의 상을 가지면서, 또 그것을 향한 방향성을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각자의 지향과 노선에 따른 내부 충돌과 논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몇 가지 원칙을 통해, 이러한 논쟁과 충돌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교조주의적 태도나 감정적 비난을 배제하고 서로의 갈등을 통해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단지 ‘친분’과 ‘우정’ 등의 감정적 울타리가 아닌, 시작부터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합리적인 규율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제들을 남기고, 공동생활전선에 대한 고민과 기대를 함께 나누던 책마을에서의 시대는 끝났다. 함께 논의를 나누던 멤버들은 하나 둘 제대했고, 다시 만난 각자의 현실에서 ‘공동생활전선’의 기획은 본격적인 준비와 실천의 단계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각주

1) 사실 ‘20대 운동’이라는 표현만큼 애매모호한 것도 없다. ‘20대 운동’은 20대들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운동이라는 의미도, 20대들의 운동이라는 의미도 가질 수 있다. ‘20대’ 또한 단순히 생물학적 나이로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한 규정이며, 또 어떤 성격을 ‘운동’으로 보아야 할 것이냐에 대해서도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이 글에서 ‘20대 운동’이라고 했을 때는 엄격한 규정 없이 그저 “20대들이 주 구성원으로, 본인들이 느끼는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모색해보려는 움직임” 정도를 의미한다.
2) 한윤형,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 텍스트, 2009.
3) 인터넷 서점에서 ‘88만원 세대’라는 태그로 검색하여 대략 20대 저자들이 쓴 책들을 찾아보면 『혼돈의 20대, 자신을 말하다』, 『이십대 전반전』, 『100% 스무 살』, 『요새 젊은 것들』, 『청춘대학』, 『김예슬 선언』 등등 이렇게나 많은 책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책들이 나온다.
4) 정작 팔리는 것은 『20대, XX에 미쳐라』 유의 자기계발서, 혹은 ‘인생의 선배들이 들려주는, 88만원 세대를 위한 88개의 질문들’ 같은 ‘착한 상품’들이다. 특히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은 후자와 같은 책들에는 빠짐없이 이름을 올리며, 그의 문제 제기에 동감했던 많은 20대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5) “어디는 누구 따라다니는 애들이고, 누구는 어느 조직의 영향 아래 있다더라.” “아니, 나는 전혀 그렇게 행동한 적 없는데 누가 그래? 그러는 저들은 방송 나와서 뜨고 싶어 한다며?” 사실 유사한 문제의식을 갖고 고민하는 20대들 사이에서 이런 식의 대화가 등장할 때가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6) “가치 있는 책, 가치로 매길 수 없는 사람들”을 슬로건으로 삼았던 책마을은 적어도 2005년 이전부터 존재했던 자생적인 인트라넷 커뮤니티였다. 적을 때는 수십 명, 많을 때는 수천 명의 군인들이 책마을에서 활동했으며, 정치적 중립 의무와 군사 보안 규칙에 따라 글쓰기의 주제와 성격에 대해 상당히 엄격한 자기검열이 이루어졌고, 많은 경우 은유적 표현으로 조심스럽게 논의가 진행되었다. 책마을은 라이트노벨부터 정치철학에 이르기까지 군인들의 다양한 관심을 공유하는 공간이었지만 2009년 11월 행정상의 이유로 사이트가 폐쇄된 후 더 이상 안정된 장소를 구하지 못하고 2010년 6월경 최종적으로 해산했다.

7) 우석훈, 백가흠, 김현진, 김홍중, 기획 좌담 「‘청춘의 종언’―2008년, 불안한 이십대를 위한 소고(小考)」, 『문학동네』 57호(2008년 겨울호).
8) 그러나 우리는 공동생활전선의 모든 형태가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공동생활전선이라는 기획 자체는 “공동생활을 통해 자립해 사는 20대”라는 문화를 확산시키는 것이며, 따라서 앞으로 진행될 논의는 지금 우리가 당장 준비하고 있는 공동생활전선의 첫번째 조직에 한정된다.
9) 이러한 전제는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에서 빌린 것이다.
10) 이미 오랜 역사를 지닌 이러한 경향에 대해 90년대부터 쏟아져 나온 운동권 후일담 소설들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좌파들의 낭만성을 비꼬는 말이었던 “젊은 시절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가슴이 비어 있는 사람이고 나이가 들어서도 공산주의자라면 머리가 비어 있는 사람이다”라는 문장을 요새는 “1학년 때 학생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가슴이 비어 있는 사람이고, 복학한 후에도 학생운동을 한다면 머리가 비어 있는 사람이다”로 바꿔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3학년이 되는 순간 운동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