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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글/노동당 기관지

밀양 송전탑, 언론은 없고 카메라만 있다.

내 본업이 기자이고 밀양 송전탑 현장을 몇 번 다녀오다 보니 주변 지인들이 만날 때마다 나에게 묻는다. “밀양 송전탑, 뭐가 문제래?” “왜 저러는 거래?” 왜 사람들은 ‘밀양 송전탑’이 화제인 건 아는데 왜 문제가 되는지는 알지 못하는 걸까. 밀양에 카메라는 많지만 언론이 없기 때문이다.

주민들과 공권력이 충돌하는 모습은 기자들에게는 좋은 장면이다. 자극적이고, 화제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밀양처럼 극렬하게 투쟁하는 곳은 더욱 더 좋은 곳이다. 기자들은 사람들의 눈을 끌기 위해 자극적인 장면, ‘그림 나오는’ 모습을 찾아다닌다. 이 그림들은 사람들에게 ‘소비’된다.

행정대집행이 진행되던 4공구 건설현장에 수많은 카메라들이 있었다. 그 카메라 앞에서 리포트를 하는 많은 기자들도 있었다. 행정대집행을 진행하려는 밀양시 공무원들과 주민들이 충돌하자 카메라 셔터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쉬는 시간, 기자는 카메라 앞에 서서 “이렇게 싸우고 있습니다. 블라블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차를 타고 사라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뉴스에는 현상만 있을 뿐 ‘왜’가 없다.

종편보다 못한 방송3사 ‘밀양 송전탑’ 뉴스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밀양 주민들과 연대하기 위해 ‘탈핵희망버스’를 꾸렸고 5일 밀양에 도착했다. KBS의 같은 날 9시 뉴스는 18번째 순서 ‘간추린 단신’에서 밀양 송전탑 문제를 다루었다. “경남 밀양의 송전선로 공사 재개 나흘째인 오늘 주민과 경찰 간 큰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전 측은 송전탑 기초 공사에 착수했고, 공사반대 대책위는 시민 4명에 대한 구속영장 철회를 촉구했다“ 서로 대립하는 모습만 보여주는 형식적인 보도였다.

MBC에 비하면 KBS는 양반이다. MBC 뉴스데스크는 한 꼭지에 걸쳐 밀양 송전탑 문제를 다뤘다. 단, ‘외부세력’이라는 프레임으로 송전탑 문제를 바라보았다. “경남 밀양 송전탑 사태도 팽팽한 대치가 계속되고 있다. 오늘도 외지인들이 버스를 타고 공사현장에 추가로 집결했다” 외지인들이 왜 가깝지도 않은 먼 산골짜기에 가서 주민들과 연대하고 있는지, ‘왜’는 보이지 않았다.

SBS는 또 어땠을까. 절망적이다. 밀양 송전탑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다루지 않았다. 대신 5일 SBS 뉴스는 불꽃놀이 소식으로 가득 찼다. 밀양 송전탑 문제보다 불꽃놀이의 화려한 영상이 더 자극적이고, 사람들이 눈요기하기에 좋기 때문일까.

돋보였던 방송사는 JTBC였다. JTBC 주말뉴스는 ‘[탐사+] 극한 치닫는 밀양 송전탑, 무엇이 문제인가’에서 12분 동안 송전탑 문제를 집중 분석했다. 송전탑이 이미 건설된 충남 청양 정수리에 송전탑으로 인해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 송전탑 인근에 사는 주민들에게 건강문제는 없는지 심층적으로 다루었다. 반대주민들 입장에서는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왜’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방송3사는 JTBC보다 못한 보도 행태를 보였다.


▲ JTBC 5일자 주말뉴스

보도하면 다행, 여전한 왜곡보도

그래도 몇몇 언론의 보도행태를 보면 '카메라‘만 들이대는 것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뉴시스와 조선일보는 통합진보당 당원들이 밀양 송전탑 공사현장에서 무덤(구덩이)을 파고 목줄을 걸어놓았다는 무시무시한 소식을 전했다. 주민들과 관계없는 외부세력(그것도 ’내란음모‘의 통합진보당!)이 극렬 투쟁을 부추긴다는 내용이었다.

“송전탑 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무덤처럼 생긴 구덩이는 통합진보당 당원들이 판 것으로 전해졌다” “구덩이를 파는데 힘을 보탠 주민은 2명으로 이들 역시 전 과정을 돕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목줄을 메는 것 역시 통진당 당원들이 한 것으로 전해졌다” “(주민들이) 노끈을 전달해 주거나 일부 거들기는 했지만 목줄을 건 사람은 당원이었다”(‘전해졌다’로 가득찬 뉴시스 기사)

“당원들이 3~4명씩 교대로 두 시간가량에 걸쳐 구덩이를 팠다…올가미를 건 것 역시 통진당원들이었다”(조선일보 기사)

하지만 이 보도는 오보였다. 주민들이 구덩이를 파고, 연대하러 왔던 통합진보당 당원들이 구덩이를 파던 주민들을 도와줬던 것이다. 심지어 무덤인 줄 모르고, 그냥 움막 터잡기 정도의 작업인 줄 알고 도와줬다는 통합진보당 당원들도 있었다. 이에 밀양 765kV송전탑 반대 대책위(대책위)는 7일 기자회견을 통해 사실관계가 왜곡 과장됐다며 언론중재위 조정신청과 민‧형사 고발을 동시에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 7일자 조선일보 1면

갈등‘만’ 보여주는 언론, 갈등 부추기는 언론

언론의 역할은 공론장이다. 입장이 다른 이들이, 갈등하는 집단들이 언론이라는 공론장에서 만나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고, 그 안에서 합의점이나 대안을 발견한다. 하지만 밀양 송전탑 소식을 전하는 많은 언론은 공론장으로서의 기능을 전혀 못하고 있다. 합의점이나 대안을 모색하려면 갈등을 있는 그대로만 보여줘서는 안 된다. ‘왜’ 한전은 기를 쓰고 송전탑을 지으려는 것인지, ‘왜’ 주민들은 기를 쓰고 이를 막으려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몇몇 언론들은 ‘외부세력’ 운운하며 밀양 주민들을 고립시키고, 이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한다. 거기다 내란음모로 지탄을 받고 있는 통합진보당까지 끌어들여 밀양 송전탑을 둘러싼 찬성-반대의 갈등을 더욱 부추긴다. 언론은 외부세력들이 갈등을 부추긴다고 말한다. 하지만 갈등을 부추기는 건 언론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