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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 /단상

자기계발서는 모두 내다버려

평소 나는 독서에 편식을 하지 않는 편이라 자부한다. 자부하면서 마음에 걸리는 유일한 게 소설인데, 내 소설 편식 역시 도대체 여가시간에 뭘 하는지 궁금한 대부분의 아이들에 비하면 사회적으로 ‘과다섭취’라고 생각한다. 그런 내가 과감하게 전혀 손도 대지 않는 책이 있다.(어느 순간부터) 그리고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찢어버려”라거나 “내다버려.”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그것이 자기계발서이다.

 

자기계발의 주체

 

서동진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인간은 자기계발의 인간이라고 매우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자기계발서는 신자유주의, 혹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맞물려서 함께 발전한다. ‘자기 계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보자. 바로 ‘사회화’에 다름 아니다. 사회화된 인간. 자본주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혹은 이 시대에 안 짤리는 법! 인간관계 좋게 만들어서 안 짤리기! 그래서, 결론은? 성공하기! 성공한다는 건 결국 뭐냐? 이 시대에 ‘성공’은 객관적으로 설명되어 진다. 바로 ‘돈’ 많이 벌기. 대박 나기다. “여러분 부자 되세요”의 신화가 바로 자기계발이다.

자기 계발서들의 결론을 한 번 살펴보라. 그들은 도대체 왜 ‘그렇게’ 행동하고, ‘그런’ 목적의식을 가지라고 충고하는가? 그리고 왜 ‘그렇게 사는 것이’ 좋다고 말하며, 듣기 좋은 말을 하고 보기 좋은 용모를 갖추고 원만한 인간 관계를 형성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가. 내가 자기계발서 류에 속하는 책들 중에서 유일하게 재미있게, 그리고 끝까지 읽은 책이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이다. 이 책은 매우 놀라울 정도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연상시킨다. 이 책은 차라리 다른 속물적인 자기 계발서보다 솔직하다. 가난한 사람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 자세히 설명해준다. 노동자의 삶이란, 끊임없는 굴레 속에서, 자본주의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임을 적실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그러면 어쩌라고? 이 부분에서 <자본론>과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는 극명하게 대립한다. 마르크스는 말한다. 자본주의는 거짓이라고! 노동자의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구조라고! 그래서 그는 결국 혁명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는 다르다. 가난한 자는 비참하다. 고로, “부자가 되시게, 모든 아빠들이여.”


문제는 자본주의 구조 자체다. 자본주의는 10%를 위한 사회다. 이제 ‘파이를 키우자’는 말 대신, ‘어떻게 거지 없는 세상이 있겠냐!’며 스스로를 자위하는, 뻔뻔함만 늘어가는 자본주의 옹호론자들도 이미 이를 인정한다. 그런데, 부자가 되시라고? 10% 안에 들어야지, 그럼!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지? 피나는 노력이 요구된다. 끊임없이 자신을 담금질하는 극단의 고통. 그것이 바로 ‘자기계발’의 실체다. 그렇다면, 자기계발의 행위인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개인들인가? 그 주체가 그 주체인가?

subject는 is subjected to 되어 있다! 그 욕망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져,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개인들에게 주입되는 타자의 욕망이다.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욕망이요, 자본주의의 승리자들의 욕망이다. 스스로 원하고 있다고? 자본주의는 자기계발서에서, 각종 매체에서 승리자들의 성공 신화를 들려주며 사람들의 도전 정신을 촉구하며 열정을 가지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제발 닥치시라. 효율적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학원에서 밤늦게까지 고생하는 초등학생들, 국제중을 가기 위한 그 몸부림, 그리고 그들을 내몰아치는 수많은 나쁜 엄마 아빠들. 너도 나도 경영학과 아니면 공무원이 꿈인 학생들. 스펙 자원봉사 알바 토익 학점, 슈퍼맨이 되어야 하는 대학생들. 그들의 눈물과 고통 앞에서 좀 닥치란 말이다. 그들이 원한 거라고? ‘주체적’으로 하고 있는 거라고? 저들이 자기계발의 주체인가, 과연. 사회가 만들어낸 욕망 아래 개인들을 가두고 몰아치면서 ‘어쩔 수 없다.’고? 비겁한 걸 넘어서 역겹고 치가 떨린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 우리를 위해 행복해질까?

자기계발서가 가르치는 것들은 대부분 이런 것들을 지향하고 있다. 그 역겨움. 무한히 창조할 이들의 잠재성을 사회 안에 가두고, 사회가 원하는 대로 살라고 그렇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고. 그렇게 살면 ‘행복’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명료하게 밝혀냈듯이, 근대 사회는 사적 영역의 문제들이 공적 영역을 침입한, ‘사회적’ 영역이 이제 다시 가장 개인적인 내밀한 영역까지 파고 드는 사회이다. 우리는 결혼할 때, 사랑의 제도화인 결혼을 준비할 때, 상대방의 ‘직업’이 뭐냐고 묻는다. ‘연봉’이 얼마냐고 묻는다. 자기계발서는 이 역겨움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야한다고, 그렇게 살아야 성공한다고. 그리고 그 성공은 당신의 행복이 아니라 바로 타자들의 욕망이다. 당신들이 뭔데 내가 행복해지는 길까지 정해준단 말이냐, 이 건방진 것들아.

문제는 자본주의 구조 자체다. 자본주의는 10%를 위한 사회다. 이제 ‘파이를 키우자’는 말 대신, ‘어떻게 거지 없는 세상이 있겠냐!’며 스스로를 자위하는, 뻔뻔함만 늘어가는 자본주의 옹호론자들도 이미 이를 인정한다. 그런데, 부자가 되시라고? 10% 안에 들어야지, 그럼!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지? 피나는 노력이 요구된다. 끊임없이 자신을 담금질하는 극단의 고통. 그것이 바로 ‘자기계발’의 실체다. 그렇다면, 자기계발의 행위인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개인들인가? 그 주체가 그 주체인가?

subject는 is subjected to 되어 있다! 그 욕망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져,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개인들에게 주입되는 타자의 욕망이다.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욕망이요, 자본주의의 승리자들의 욕망이다. 스스로 원하고 있다고? 자본주의는 자기계발서에서, 각종 매체에서 승리자들의 성공 신화를 들려주며 사람들의 도전 정신을 촉구하며 열정을 가지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제발 닥치시라. 효율적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학원에서 밤늦게까지 고생하는 초등학생들, 국제중을 가기 위한 그 몸부림, 그리고 그들을 내몰아치는 수많은 나쁜 엄마 아빠들. 너도 나도 경영학과 아니면 공무원이 꿈인 학생들. 스펙 자원봉사 알바 토익 학점, 슈퍼맨이 되어야 하는 대학생들. 그들의 눈물과 고통 앞에서 좀 닥치란 말이다. 그들이 원한 거라고? ‘주체적’으로 하고 있는 거라고? 저들이 자기계발의 주체인가, 과연. 사회가 만들어낸 욕망 아래 개인들을 가두고 몰아치면서 ‘어쩔 수 없다.’고? 비겁한 걸 넘어서 역겹고 치가 떨린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 우리를 위해 행복해질까?

자기계발서가 가르치는 것들은 대부분 이런 것들을 지향하고 있다. 그 역겨움. 무한히 창조할 이들의 잠재성을 사회 안에 가두고, 사회가 원하는 대로 살라고 그렇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고. 그렇게 살면 ‘행복’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명료하게 밝혀냈듯이, 근대 사회는 사적 영역의 문제들이 공적 영역을 침입한, ‘사회적’ 영역이 이제 다시 가장 개인적인 내밀한 영역까지 파고 드는 사회이다. 우리는 결혼할 때, 사랑의 제도화인 결혼을 준비할 때, 상대방의 ‘직업’이 뭐냐고 묻는다. ‘연봉’이 얼마냐고 묻는다. 자기계발서는 이 역겨움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야한다고, 그렇게 살아야 성공한다고. 그리고 그 성공은 당신의 행복이 아니라 바로 타자들의 욕망이다. 당신들이 뭔데 내가 행복해지는 길까지 정해준단 말이냐, 이 건방진 것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