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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 /단상

대체 왜 당신들이 발끈하나이까

2년 전에 우석훈 박사의 <88만원 세대>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그리고 아직도) 이 <88만원 세대> 담론이 큰 유행이 되면서 세대론, 혹은 20대 자질론이 일었다. 88만원 세대에서 발전한 형태의 논의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바로 가장 근본적인 질문, ‘세대’라는 주체 설정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사회현상을 연구하고 통찰하는 방식에 있어서 행위 주체의 설정은 늘 중요하고 일반적이다. 국가. 계급. 세계체제 등이 그 주체들이다. 이 주체 설정의 차이는 현상의 해석, 가치 판단, 대안 제시 등의 측면에서 굉장한 차이를 불러일으킨다. 예컨대 프리드만의 <세계는 평평하다>와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의 차이가 바로 이 주체 설정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론이라 볼 수 있겠다. 세계화라는 공통현상을 놓고 벌어지는 프리드만과 장하준의 시각 차이, 혹은 가치판단의 차이는 주체 설정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프리드만의 문제의식은 기존의 경제 주체, 혹은 행위 주체였던 국가, 민족이 세계화라는 지각변동으로 인해 개인들로 갈라지는, 행위 주체의 전환에서 시작된다. 이제 국가, 민족 같은 타이틀이 더 이상 당신들을 보호해줄 수 없기에, 홀로 생존해야만 한다. 사자와 가젤은 모두 달려야만 한다. 그렇기에 세계화를 왜 이렇게 긍정적으로 보느냐고 프리드만을 비판하는 것은 논점을 놓치는 것이 된다. 그가 가정한 세계화는 자연 재해, 천재지변이다. 주체는 주체적이지 않고 종속적이다.

반면에 장하준의 행위 주체는 진정으로 주체적이다. 세계화는 결국 강대국들이 만들어낸 패러다임이며, 강대국이 유리할 때만 취사선택하는 주체적 행위이다. 국민국가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행위 주체이다.

프리드만과 장하준의 주체 설정에서의 문제점을 종합해보면 이러하다. 세계화에서의 개인의 주체 설정은 현실적으로 너무 비관적이다. 프리드만은 희망을 던져주고 노력하라고 계속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 재해와 같은 이 지각변동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특별하거나, 특별한 능력을 갖추거나,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 되거나,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라! 그 뒤에는 한 가지 말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지 못한 사람은 죽는다고. 반면에 장하준은 대안의 마련에서 특별한 한계에 직면한다. 국민국가라는 주체 설정 앞에서, 미국이 아닌 나라에 사는 대한민국의 우리는 어찌해야할 것인가? 장하준이 박정희 시대의 재벌국가로 회귀한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이러한 이유로 인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프리드만은 개인을 주체로 설정함으로써 그 개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려는 시도만을 번복했고, 장하준은 국가를 주체로 설정함으로써 대안 경제체제에 있어 결국 개발 국가 모델로 회귀해야하는가 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둘의 문제의식을 좀 더 긍정적으로(혁명 가능성의 토대 위에서)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장하준의 말대로, 세계화는 강대국들이 주도적으로 취사선택하는 짓이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낸 세계화는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지각변동을 일으켰고 결국 국가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 사이의 균열을 초래한다. 그리하여 국가의 세계화 추진에서 나가떨어지는 개인들은 국가의 통제 하에 있을 수 없게 되고 이들의 힘이 혁명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 아래서 파편화된 개인들이 혁명이라는 조직적이고도 협동적인 힘을 창출할 수 있을까 라는 과제가 선결과제로 남는다.

이처럼 사회현상을 탐구하는 데 있어 주체의 설정은 분석과 대안 제시에서 굉장한 차이를 초래한다. 그리하여 주체 자체를 가장 파편화시킨 프리드만의 논의는 매우 손쉬운 것이지만, 혁명을 꿈꾸는 좌파들의 입장에선 욕먹기 딱 쉬운 주체 단위이다. 게다가 프리드만은 겉으로 보기에 주체를 집단화하지 않는 것 같지만, 세계화라는 조건 아래서 공동으로 반응하는 주체를 설정함으로써(아니, 그렇게 반응해야만 하는 주체를 설정함으로써) 결국 같은 이익과 관심사를 가진 인간들만을 여러 명 만들어냈을 뿐이다. 반대로 장하준은 세계화가 필수불가결하다는 담론을 여전히 국민국가가 중요하다는 주장으로 막아냈지만, 세계화를 추진할 대상도 국가요 세계화를 막아낼 대상도 국가라는, 모순적 결론을 이끌어냈다. 물론 누구의 국가냐에 따라 다르다는 논의를 펼 수도 있지만, 그건 결국 개인들에게 달려있다는 이야기로, 다시 국가가 과연 세계화 시대의 주체인가 라는 근본적 질문으로 회귀하게 된다.

세대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과연 우리는 세대를 하나의 주체로 설정할 수 있을까? 20대가 공동으로 가지는 관심사나 그들을 결집하게 만들 동력이 있을까? 세대라 함은 “당신들은 앞으로 88만원 벌게 될 거야. 그러니 당신들은 88만원 세대야.”라고 규정할 만큼 쉬운 것이 아니다. 적어도 그들이 결집할 동력이 있어야 하며, 동력이 있을 때 뭉칠 수 있어야한다. 그리하여 세대론의 첫 번째 문제, 20대를 하나의 세대로 하나의 주체로 설정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는, 20대에게 자신의 세대 문제를 혁명으로 이끌 자질이 있는가, 라는 20대 자질론의 문제로 이어진다.

계급의 필수요소는 계급의식이다. 계급의식 없는 계급이 계급인가?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계급의식 없는 계급이 혁명을 꿈꿀 수 있는가? 그람시가 이야기했듯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혁명을 꿈꾸라”고 가르칠 것인가, 아니면 “부르주아가 되라.”고 가르칠 것인가? 내가 이 집단에 속해서 혁명을 일으켜야한다는 그런 능동적 혁명의식, 혹은 이것보다는 약하지만 내가 이 집단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이기에 나는 이 계급의 일원으로 혁명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는 계급의식 없이 혁명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수많은 맑시스트들은 모두 그렇게 계급의식을 고취하려고 했고, 그래서 지식인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혁명의 가능요건은 계급의식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88만원 세대에게 이런 세대 의식이 있을까? 먼저, 세대라는 균열보다 다른 균열들이 세대보다 더 크게 상존한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88만원 세대 담론을 캐취하고 그것에 발끈하여 분개하는 이들은, 88만원 세대가 아니다. 서울대, 연대, 고대 혹은 88만원 세대가 될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그 미래의 인재들이 88만원 세대론에 발끈한다. 정작 88만원 세대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이 사회의 진정한 취약계층들은 그 담론을 모르거나, 신경 쓰기 힘들고, 신경 쓴다 해도 혁명에 고취되지 않는다. 대체 왜 당신들이 발끈하나이까.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대체 왜 당신들은 발끈하지 않나이까.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들도 사실 이런 문제의식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기본 소득 논의는 기본 소득이 필요한 이들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기본 소득과는 거리가 먼 이들이, 계급이익이 없는 이들이 기본 소득에 대해 논의한다. 맑시즘을 열심히 공부하는 이들은 프롤레타리아트들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적 생존권 문제와 거리가 있는 학생, 교수들이다. 68혁명 당시 모든 학생들이 공동으로 대중파업을 진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과는 달리 그들은 20대에 자립하여 생활하기 때문에, 등록금 인상 문제에 엄청나게 민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88만원 세대는 일자리를 내놓으라면서 일자리를 가진 부모들에게 얹혀살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립할 순 없다. 우리는 88만원 세대이기 때문이다.

이 고민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가장 큰 고민이다. 내가 공부하는 건 어쩌면 사치이고, 이런 식의 공부가 무언가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라는 고민 말이다. 생활에 지장 없이 사는 나는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는 논문과 사회를 비판하는 글을 쓰면서 잘 먹고 잘 살면서 대중들이 왜 이렇게 무식하냐고 욕하게 될 런지도 모르겠다는 걱정 때문이다. 많은 논의들을 어렵게 아무도 이해 못하게 써대면서, 영화와 드라마를 정신분석적으로 분석해서 대중은 읽지도 못하게 써놓고 똑똑한 놈들끼리 훌륭하다고 박수쳐주고, 들뢰즈와 발리바르 알랭 바디우가 어떤 의의가 있는지 써놨는데, 아무도 이해 못하고. 내가 학자가 되면 그 짓을 반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걱정 때문이다.

이 걱정의 심화는 얼마 전 내가 속해 있는 한 집단에서 벌어진 일련의 논쟁(이라고 할 수도 없는) 아닌 논쟁에서 비롯되었다. 누군가 그 집단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자, 그 집단의 몇몇 이들이 넌 뭘 했냐, 해보고 말해라, 왜 괜히 문제 일으키냐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거기다 내가 그와 관련되어 좀 아포리즘적인 글을 하나 올렸더니 그것이 또 문제가 되었다. 무슨 말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그냥 대놓고 말해라, 등. 대학생이 아포리즘적인 글 하나를 올린 것이 뭐가 문제가 된다고 그런 반응을 하는 열등감에 빠진 노예 같은 이에 대한 연민보다도, 논의 전반에서 벌어진 반응들과 관련해 “왜 대체 당신들이 발끈하나이까.”라는 문제의식이 나를 지치게 했다. 정작 그렇게 반응하고 발끈하는 이들은(그 반응과 발끈함이 과연 정당한 것이었느냐의 문제는 떠나서) 그 비판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름 그 집단 안에서 노력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이들이었다. 진짜 88만원 세대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무관심했다. 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게 내가 슬펐던 진짜 이유였다.

아무래도, 혁명은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행위의 대상인 거 같다. 혁명을 사유하지 말고 혁명를 해야겠다. 이 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