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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글/한겨레 hook

조선일보의 무한도전!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겉으로는 ‘사회주의자’처럼 보이지만 동맹해서는 안 되는 이들의 정체를 밝히고자 한다. 그 중에 한 집단이 바로 ‘봉건적 사회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부르주아지의 등장으로 기득권을 상실한 귀족 세력으로, 부르주아들을 무찌르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되찾기 위해 부르주아지들의 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을 얻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들은 실제로 그렇지 않음에도 ‘사회주의’적인 것처럼 보이려 애쓴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귀족들은 인민을 자신의 뒤에 끌어 모으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의 동냥 주머니를 깃발 삼아 손에 들고 흔들었다.’ 그러나 ‘인민은 그들의 뒤를 따라갈 때마다 그들의 등 뒤에서 낡은 봉건적 문장들을 발견하고서 불손한 큰 웃음소리를 내면서 흩어졌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통찰은 변화에 대응하는 각 정치. 사회세력들의 대응을 매우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개별 인간이나 집단이 저항하기 힘든 사회 전반에 걸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을 때, 이에 저항하는 이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이다. 하나는 변화로 인해 기득권을 빼앗긴 세력들이며, 다른 하나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권리로부터 거리가 먼 세력들이다. 영국, 프랑스와 같은 자본주의 선진국들에서는 일련의 ‘혁명’을 통해 부르주아지들이 귀족들의 권력을 빼앗아 자신들의 ‘질서’를 세우는 부르주아 혁명이 이루어졌다. 이 혁명의 진행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도 함께 성장하여, 부르주아지와 대립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1) 한국에서는 경제발전으로 성장한 계층이 기존 권력을 찬탈하는 혁명이 아닌, 기존 권력관계가 그대로 유지되면서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만 ‘이식’되는 방식으로 근대화가 이루어졌다. 기득권도 그대로 착취도 그대로인 상태에서 기득권의 유지 논리와 착취 논리만 바뀌었다. 심지어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도 바뀌지 않았다. 전근대적인 의미의 공권력, 폭력의 동원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그것이 시장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뿐이다. 한국의 우파들은 냉전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극단적인 정치적 대립을 만들어냄으로써 특정 정치 세력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이를 통해 부의 흐름을 통제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냈다. 즉 한국의 우파들은 이런 ‘정치적 상황’을 통해 본원적 축적을 이룬 세력들인 것이다. 2) 한국의 대기업들은 전근대적인 가족 기업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경영권을 ‘세습’한다. 정부는 치솟으면 안 되는 물가의 목록을 작성하여 물가를 ‘통제’하고, 경기침체로 인해 쏟아지는 미분양 아파트를 세금으로 사들인다. 성장이 필요한 특정 업계에 대해 공적 자금을 쏟아 붓는 일이 무려 ‘우파 정권’ 하에서3) 벌어진다.

한국의 우파 기득권 세력은 말로는 ‘시장주의’를 외치지만 시장주의를 실현할 생각이 없으며 시장주의를 방해한다고 ‘좌파 탓‘을 한다. 국민 세금으로 교육을 받은 변호인들이 거대 로펌에서 활약하는 것이 ‘시장주의와 경쟁력 강화’로 불리는 게 이 나라다. 한마디로 한국의 우파들은 ‘사적 자금으로 사익을 추구’하는 이들이 아니라, ‘공적 자금으로 사익을 추구’하면서 이를 ‘경제성장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다. 그렇기에 가장 ’선진 자본주의‘적인 소액 주주 운동 같은 것이 진보적인 운동처럼 보이는 역설도 한국에서는 가능하다.

그러나 공적 자금을 통해 사익을 채우는 이 강도질과 ‘너희가 하는 건 사회주의야, 왜냐면 너희는 사회주의자니까.’라는 생떼가 언제까지 통할 순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기에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전략’에 따라 강제로 시장주의로 끌려 나오게 된다. 즉 한국은 미국과 같은 패권 국가가 아니기에 패권국 부르주아지의 이윤 창출을 위해 시장 개방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노무현 정권 때 조선일보는 그렇게 욕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민족의 영웅으로 만들며 한미 FTA를 찬양했다. 그러나 한미 FTA는 과연 조선일보에게 유리한 것인가?

한미 FTA 협정이 발효되면 공적 자금으로 사익을 추구하던 그 강도질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시장주의를 외치면서 ‘독과점’으로 이윤을 극대화하던 그 위선을 계속할 수 있을까? 조중동은 노무현 정부의 신문법 개정안이 언론 탄압이라며 극렬하게 저항했고, 결국 개정안의 17조 ‘시장 지배적 사업자’ 규정이 위헌 결정을 받아 신문법 개정은 무산되었다. 그러나 신문법 개정이 실패한 이후 조중동은 불법적인 거래 행위로 신문시장에서의 지배권을 더욱 넓혀갔으며4) 최근에는 이를 확대하기 위해 케이블 종편, 지상파, 보도전문 채널로 진출하려 한다. 한나라당이 작년에 통과시킨 미디어법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제 한미 FTA 이후 미국의 미디어산업체들이 한국의 미디어 시장으로 진입한다. 엄청난 자본력을 지닌 미국우파 언론들이 개방된 미디어 시장으로 물밀듯이 들어온다. 한미 FTA 협상단이 미디어 산업과 관련하여 협상한 결과를 보면, 미국의 미디어산업체들은 유료 방송 시장, CA – TV, VOD 콘텐츠, IPTV 등 신규 방송통신융합시장, 통신서비스 시장 등으로 진출할 수 있다.5)

마이너 언론들은 안 그래도 수익성이 떨어져 종이신문들이 재정 위기인데, 엄청난 자본력의 미국 미디어 산업체들이 미디어 시장에 진출할 경우 한국 언론들은 죽어나가 언론 다양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과연 ‘죽어나가는 한국 언론들’ 안에 조선일보는 포함되지 않을까? 신문 구독하면 자전거도 주고 현금도 주면서 공정위에 적발되면 과징금이나 몇 푼 내던 관행을 한미 FTA 이후에도 지속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방송 시장에서도 이런 짓을 반복할 수 있을까? 정부가 조선일보의 이런 행위를 눈감아 주거나 소량의 과징금만 부과했다간, 미국 기업들은 투자자 국가 소송제도6)를 이용해 이런 시장 개입에 대한 피해의 대가를 요구할 것이고, 정부는 본전도 못 차리고 미국 기업들에게 엄청난 배상금만 물어주게 될 것이다.(이는 조선일보에만 해당하는 사항은 아니다. 정부가 미분양 아파트를 세금으로 사들이거나, 특정 기업들을 공적 자금으로 지원할 때 미국 기업들이 가만히 있을까?) 아니 꼭 투자자 국가 소송제도를 떠나서라도, ‘자본력으로 승부해왔던’ 조선일보가 자신들 보다 더 거대한 자본력 앞에서도 ‘자본력으로’ 승부할 수 있을 것인가?

한윤형은 레디앙에 기고한 글에서 “조선일보가 미디어 법을 따라 방송계에 진출하면, 저 섹시한 케이블 방송국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 YTN이 맘에 안 들면 좌파라고 몰아 부칠 수도 있겠으나, 방송 장악 이후에도 장사가 안 되면 TVN의 예능 프로그램들이 좌파적이라고 우길 텐가?(왠지 그럴 것 같다.)”고 말했다.7) 조중동이나 한국경제 같은 신문들이 케이블TV와 종편에 뛰어드는 이유는 기술진보라는 ‘개별 인간이나 집단이 저항하기 힘든’ 변화 앞에서 점점 떨어지는 수익성을 보장받기 위해서이다.8) 조선일보로서는 더 이상 기득권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상황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셈이다. ‘진짜로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한미 FTA는 조선일보 입장에서 인터넷 매체의 발달보다 더 엄청난 ‘변화’일 것이다. 마을에서 대왕 노릇을 하던 이무기 앞에 진짜 용이 나타난 셈이다. 아직 자신은 용이 되려면 멀었는데 말이다. 마을의 토끼들은 이무기에게 말한다. “이무기야, 너희의 적은 우리가 아니야.”

물론 조선일보가 둔해서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한미 FTA를 찬양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서글픈 일이다. 정치권력, 경제 권력과 함께 용의 머리를 차지하며 ‘밤의 대통령’으로까지 불렸던 조선일보가 이제 대기업들이 주는 광고가 없으면 먹고 살기 힘든 용의 꼬리가 되었다. 그래서 살길을 찾아 기업이 되고자 시장 경제에 뛰어들었으나, 기업들의 투자가 없이는 단독으로 방송 시장에도 진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은 삼성과 같은 몇 몇 초국적 기업들의 시장을 넓혀 주기 위해 무모한 도전을 무릅쓰고 자신들에게 손해를 입힐 지도 모르는 사안에 찬성하며, 반대자들을 좌빨로 몰아가야 한다.

조선일보가 변화의 시대에서 성공할 수도 있다. 부르주아 혁명의 시대, 어떤 귀족들은 부르주아지가 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냥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을 이제는 노력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기득권층 입장에는 매우 서글픈 노릇인 것만은 사실이다. 조선일보가 청와대의 대포폰 사건을 비판하고, 삼성의 MBC 사찰을 비판하는 것이 ‘나는 너희들이 종이 아니야! 나는 아직 살아 있어!’라는 발버둥처럼 보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내가 조선일보가 ‘조금 불쌍하다.’는 이야기를 하면 주변에서는 “누가 누굴 불쌍하다고 하느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당연히 나는 조선일보의 폐간을 간절히 기원한다. 다만 이 폐간이 기쁘지만은 않은 이유는 조선일보가 만일 폐간된다면, 그것이 대안세력의 운동과 절독 때문이 아니라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 때문일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1) 물론 한국만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발전과정 자체가 몇몇 자본주의 국가들에 의한 자본주의 질서의 ‘이식’이었기 때문이다.
2) 이택광, “당신들의 특권, 국가”,한겨레21,제816호
3) 아니 오히려, 우파정권이기에 가능할 지도 모른다. 노무현이나 김대중 정부 같은 자유주의 세력이 추진했으면 ‘사회주의자’라고 색깔 공작에 시달렸던 일을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면 ‘서민정책’으로 둔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명박 파이팅!
4) ”신문법 위헌 판결 이후 조중동 불법 기승“, 민중의소리(http://wwwga.vop.co.kr/plus/A00000047369.html) 참조
5) 자세한 내용은 김영재, “한미 FTA와 미디어 산업”(인물과 사상, 통권109호)를 참조하라.
6) 투자자 국가 소송제란 한마디로 외국 투자자가 안심하고 투자를 할 수 있도록 투자가와 상인들이 주권 국가와 동급의 법적 지위로 올라서서 그 주권 국가의 행위를 상행위의 관점에서 시비를 걸고 맞장을 뜰 수 있는 틀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희한한 제도는 ‘간접 수용’의 개념을 채택하고 있다. 간접 수용이란 국가가 실제로 사적 소유권을 가져가지 않았다고 해도 일련의 조처와 정책을 통해 개인 자산의 수익성 등을 ‘자산 가치’를 심하게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으니 응당 그 피해액만큼 배상해야 한다는 원리이다. 즉 기업들은 한국의 국가 정책이 간접적으로 자신의 소유권을 침해, 정확히는 ‘더 많이 벌 수 있는 자신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여길 때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자세한 것은 홍기빈, “투자자-국가소송제의 발톱을 보았는가.” 참조(한겨레21, 제655호)
7) 한윤형, “조선아, 미안해 우리 땜에 너 망하겠어 좌파는 네 적이 아니란다…누구냐고?”, 레디앙(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8404)
8) 언론 시장의 지배 구조와 언론사들의 수익성 구조에 관해서는 오마이 뉴스의 기사 “조중동, 전국 종합지 60.8% 점유…그래도 독과점 아니라고?”를 참조하라.(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75524)


<한겨레 훅>에 기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