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피크제 일단 받자? 뒤에 숨은 꼼수를 보라
퇴출 전에 임금피크제, 취지와 안 맞아… 청년고용 연계 없고 기간제 확대도 못 막아
정부여당이 노동시장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정부와 노동계의 대립이 이어지는 가운데 노동계가 임금피크제를 받아야한다는 ‘현실론’이 진보진영 내부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시장 구조개혁의 핵심 중 하나는 임금피크제다. 정부는 6월 17일 발표한 1차 노동시장 개혁방안에서 ‘청장년 상생고용’의 일환으로 임금피크제를 제시했다. 정년이 60세로 늘어나는 대신 임금을 줄이고, 절감한 비용으로 청년층을 고용한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임금피크제를 통해 노동계의 약한 고리를 건드렸다. 정부가 노동개혁의 대상으로 삼은 한국노총, 민주노총 등 양대노총은 ‘정규직 중장년 노동자’를 대변할 뿐 비정규직 2030 청년 노동자들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임금피크제와 취업규칙 변경, 일반해고요건 완화, 통상임금 등은 2030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들에게는 ‘남의 일’이다.
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은 지난 7월 14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주변부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시장 구조개혁에 대해 절박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며 “문자해고나 계약기간 만료가 일상인 이들에게 정리해고 요건 완화는 와 닿지 않은 문제고, 통상임금과 정년 등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정부가 청년층을 위해 중장년 정규직 노동자에게 양보하라는 프레임을 짜버린 이상, 이를 거부하는 양대노총은 ‘기득권 세력’이 되어버린다. 노동계의 요구를 대변하는 진보진영 내부에서도 “임금피크제는 받아야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정의당 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던 조성주 정치발전소 공동대표는 “임금피크제 수용을 노동계가 적극적으로 고려해야한다”고 말해 화제를 모았다. 조 대표의 제안은 임금피크제를 노동계가 통 크게 수용하고 다른 것을 요구하자는 것이다.
조성주 대표는 6월 23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고령화 사회로 가는 상황에서 임금피크제를 무턱대고 반대할 게 아니다. 정년연장은 하자면서 임금피크제를 반대하면 계속 고립될 것”이라며 “임금피크제를 먼저 수용하고 대신 다른 요구사항과 맞바꾸자”고 밝혔다.
하지만 노동계의 임금피크제 수용에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정부가 주장하는 대로 임금피크제가 청년고용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다. 이미 OECD는 고령자가 노동시장에 머무는 것과 청년 실업이 무관하다는 연구결과를 내놨고 한국의 국책연구기관인 한국노동연구원에서도 세대 간 직종이 분리돼 있기 때문에 임금피크제를 도입해도 신규채용이 늘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청년층 일자리와 장년층 일자리가 대체관계가 아니라 보완관계에 가깝기 때문이다. 임금피크제가 도입될 때 청년고용이 늘어날 수 있는 곳은 정부가 신규채용을 강제할 수 있는 공공부문에 한정된다. 이처럼 청년고용에 대한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노동계가 임금피크제를 받을 경우 정부가 내건 ‘세대 간 일자리 전쟁’ 프레임에 노동계가 휘말리게 되는 셈이다.
관련 기사 ① <청년들 생각해서? 통계가 말하는 정부의 거짓말>
관련 기사 ② <임금삭감이 세대간 대타협? 청년실업은 핑계일뿐>
임금피크제가 노동현장에서 명예퇴직과 정리해고를 대체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도 문제다. KB국민은행이 대표 사례로 꼽힌다. KB국민은행은 2008년부터 정년을 60세로 연장하고 만 55세부터 임금을 5년간 50%만 받도록 하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지난 5월 KB국민은행은 임금피크제 적용 대상자들에게 일반직, 마케팅직, 혹은 희망퇴직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적용대상인 1000명 중 절반에 가까운 468명이 희망퇴직을 신청했다.
임금피크제가 있는데도 희망퇴직을 선택하는 이유는 임금피크제 대상자들이 일선 현장업무에서 배제돼 서류 감사나 물류관리 등 ‘뒷방’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KB국민은행은 이러한 점에 근거해 일선 창구에 배치시키려 했으나 노조는 ‘나가라는 말’이라고 반발한다. 지점장 하던 이에게 출납 업무를 맡기는 것이 퇴직을 유도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관련 기사 : <‘속 빈 강정’ 안에 세대 갈등만 채워가네>
정이환 서울과학기술대 사회학과 교수는 4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원칙적으로 임금피크제를 수용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내용이 문제”라며 “임금피크제의 의도는 정년을 늘려서 고령화 시대에 맞게 장기근속을 하고, 다만 인건비 부담이 크니 부담을 줄여주자는 것이다. 임금피크제 도입 전 임금 100%를 받다가 도입 이후 2년, 3년차에 90%, 80% 정도로 임금이 줄어든다면 그런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하지만 요새 도입되는 임금피크제는 ‘나가라’는 임금피크제다. 4년이 지나면 30%, 40% 밖에 못 받게 되는데 이것이 임금피크제 취지와 맞는 지 생각해봐야 한다”며 “그 정도 임금을 주면서 어떤 일을 시키는지도 중요하다. 정년연장이라는 취지와 맞지 않게 과도하게 임금을 깎으면 임금피크제가 퇴출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정년 60세 시대, 임금피크제가 청년고용 해법인가’ 보고서에서 임금피크제 대상자에 적합한 직무를 개발해한다고 강조했다. 김 연구원은 “임금이 저하된 상태에서 기존의 직무를 수행할 경우 업무 의욕과 만족도, 동기부여 수준이 떨어지기 쉽다. 새로운 직무를 수행하는 경우에도 개인의 경험과 노하우를 살릴 수 없는 직무일 때는 전반적으로 업무만족도나 생산성이 저하되기 십상”이라며 “그동안의 경험과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적절한 직무를 개발하고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김 연구원은 또한 “직무의 성격이나 임금수준에 따라서 근로시간 축소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지급받는 임금이 피크임금의 80%라면 주4일제, 60%라면 주3일제로 노동시간을 단축해서 정년 이후 은퇴생활을 중비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다른 변수는 정부가 노동시장개혁의 여러 방안 중 임금피크제를 ‘키포인트’로 여기는지 여부다. “임금피크제를 수용하고 다른 것을 요구하자”는 제안이 성립하려면 정부가 다른 사안보다 임금피크제를 더 중시한다는 전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가 사실 임금피크제 도입보다는 임금피크제 도입을 위한 수단으로 내세운 취업규칙 변경, 해고요건 기간제 및 파견노동 확대를 더 중시한다는 정황이 여럿 발견되고 있다. 한국노총은 최근 일반해고요건 완화와 취업규칙 변경을 협상에서 제외할 경우 노사정위원회에서 복귀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임금피크제 도입 등 ‘5대 수용불가 사항’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던 것에 비하면 한발 물러선 입장이다.
하지만 한국노동연구원은 지난 2일 공정한 인사평가에 기초한 합리적인 인사관리’라는 제목의 자료를 공개했다. 직무능력이나 성과가 떨어지는 노동자의 해고나 임금삭감이 적법한지를 판단한 대법원 판결 등의 내용을 담은 자료다. 이를 두고 일반해고 요건 완화에 대한 정부 가이드라인을 마련한 것이며 정부가 한국노총의 제안을 사실상 거부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올해 4월 6일 새누리당 산하 여의도연구원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정규직 고용보호 완화는 기간제 근로자 계약기간 연장과 더불어 정부가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추진하는 주된 이유다”라는 내용이 있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은 “정부가 일반해고요건을 완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안을 패키지로 들고 나온 상황”이라며 “정부가
취업규칙 변경과 저성과자 해고를 핵심적으로 추진하고 이를 지렛대 삼은 파견과 기간제 확대로까지 나아가려 한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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