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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는 속보, “너 누구냐”는 단독, 언론만 신났다

“어허”는 속보, “너 누구냐”는 단독, 언론만 신났다
뉴스 없는 막장 드라마, 롯데 일가 경영권 승계다툼… 본질 사라진 옐로 저널리즘

“연합뉴스 앱 삭제 해야겠다”

기자의 지인이 계속 울려대는 연합뉴스의 롯데 일가 관련 ‘속보’에 짜증을 내면서 한 말이다. 짜증을 내며 핸드폰을 보여준다. 경영권 분쟁 중인 롯데 일가의 동정을 전하는 ‘긴급뉴스’ 알림이 가득했다. 

지난달 28일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 이사 회장에서 해임된 사실이 알려졌다. 신 회장의 장남인 신동주 전 일본롯데 부회장이 아버지를 앞세워 동생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해임하려 하자 이를 알게 된 신동빈 회장이 아버지를 해임시킨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형제 간 벌어진 롯데 일가의 경영권 후계구도 싸움이 격화될수록 이를 전하는 언론의 보도도 늘어났다.

롯데 “신동주·신선호 회동 참석여부 확인 안돼” / 신격호·신동빈, 오후 3시30분부터 5분간 대화 / 신동빈 “잘 다녀왔다” 보고에 신격호 “어허…” 대답 / 신격호·신동빈 롯데 회동 종료 / 신격호·신동빈, 롯데호텔서 회동중, 신동주 동석여부는 미확인 / 신격호·동주·동빈 3부자, 롯데호텔서 전격 회동 / 신동빈, 신격호 머무는 롯데호텔 도착, 신선호도 도착 / 신동빈 “형, 아버지 가까운 시일에 만나게 될 것”/ 신동빈 “해임 지시 법적인 효력 없는 소리” / 신동빈 “롯데는 한국기업, 매출 95% 한국서 발생”/ 신동빈 “사태 해결·정상화 위해 혼신의 노력할 것” / 롯데 신동빈 회장 경영권 분쟁과 관련 입장 표명 / 신동빈, 일본서 귀국, 김포공항 도착

위의 기사 제목들은 약 3시간 동안 쏟아진 연합뉴스의 롯데 신씨 일가 관련 속보들이다. 다른 언론사들도 연합뉴스와 마찬가지로 속보를 쏟아내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언론들은 마치 롯데 일가 소식밖에 없는 것처럼 롯데 일가 소식으로 지면과 인터넷을 도배하고 있다. 

급기야 언론은 신격호·신동주·신동호 등 롯데그룹 주요 인사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와 발언 하나하나를 기사로 쓰기 시작했다. 신격호 회장과 신동빈 회장이 롯데호텔서 회동을 한다, 회동을 위해 호텔에 도착했다, 회동 중이다, 회동이 끝났다, 신동주 전 부회장이 호텔에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잘 다녀왔다”는 말에 “어허”라고 대답했다 등등이 모두 제각각의 기사로 탄생한다.  

기사가치가 의심스러운 기사들도 많다. 아주경제는 4일 신동빈 회장이 제2롯데월드 107층에서 결심을 굳혔다는 소식을 보도했다. 신 회장의 얼굴에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내용이다. 아주경제는 “신 회장은 이날 아버지와 짧은 면담을 가진 후 공사 중인 제2롯데월드 타워 101층에 올라 상황을 살펴보고 107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간 것으로 전해졌다”며 “최근 일련의 사태와 관련해 어떤 식으로든 결단을 내렸음이 직감되는 대목”이라고 전한다. 결단을 내렸는지 아닌지 기자는 어떻게 아는 걸까. 

확인되지 않는 94세 신격호 회장의 건강이상설을 다룬 신변잡기식 보도도 쏟아진다. 뉴스1은 7월 31일 신격호 회장의 주치의가 신 회장의 건강이상설을 일축했다는 내용을 단독보도했다. 신 회장이 정상적인 판단력을 보이지 못한다는 주장과 배치되는 것으로, 주치의가 “숫자 파악하는 게 명료해서 사람들이 깜짝 놀란다. 내가 봐도 놀랍다”고 말했다는 내용의 기사다.

   
▲ 7월 31일자 TV조선 갈무리
 

반면 TV조선은 2일 신격호 회장이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에게 “너 누구냐”고 호통쳤다는 소식을 ‘단독’보도했다. 7월 31일 신격호 회장이 신동주 전 부회장을 발견하고 “너 누구야”라고 소리를 질렀다는 내용이다. TV조선은 “롯데 그룹 후계구도에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94살의 신격호 총괄회장, 건강을 둘러싼 논란은 일파만파 더 커질 전망”이라고 설명했다.

언론은 롯데 일가의 공방을 전하며 ‘옐로 저널리즘’의 전형을 보여줬다. 신동주 전 회장은 KBS와 단독 인터뷰를 통해 ‘신격호 지시서’를 공개하며 신동빈 회장 직위해제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MBN을 통해서는 신동빈 회장이 신격호 회장의 육성녹음파일을 통해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 

가십거리를 전하는 보도는 이어진다. 연합뉴스는 3일 <귀국길 기내에서 식사하는 신동빈 롯데 회장>이라는 제목의 포토뉴스를 내보냈다. 신동빈 회장이 도쿄 하네다 공항 발 귀국 여객기 안에서 기내식을 먹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포털 기사에는 “이젠 밥먹는 것까지 기사로 봐야하냐?”는 댓글이 달렸다. 

동아일보 강재원 도쿄특파원은 4일 신동빈 회장의 귀국 ‘동행취재’기에 서 “이 항공기의 일등석은 모두 6개. 이 중 절반인 3개가 본보를 포함해 도쿄 특파원들로 채워졌다”며 “도쿄~서울 편도 요금이 112만 원이 넘었지만 롯데 경영권 분쟁의 핵심 인물인 신 회장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 위해 일등석에서 취재경쟁이 벌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 8월 4일자 동아일보 4면
 

이런 보도가 이어질수록 재벌가의 경영권 승계 다툼은 공공의 문제가 아니라 ‘가십거리’가 된다. 롯데그룹의 지배구조, 그리고 이러한 형제간의 다툼을 가능하게 만든 재벌의 문제는 언론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 대신 롯데 일가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아다니는 보도로 도배되기 때문이다. 언론이 ‘형제의 난’ ‘궁정쿠데타’ 등의 표현을 써가며 재벌의 경영권 승계다툼을 가십으로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