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불사가 협상력 높였다니 보수언론의 위험한 도박
[비평] 일촉즉발의 위기로 몰아넣은 대북강경론, 결국 대안은 대화 뿐
포격 사태와 이어진 남북고위급 회담 과정에서 나타난 보수언론의 논조변화는 한국 보수 세력이 주장하는 대북정책의 곤궁함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북한의 포격 도발 직후인 21일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국민이) 불편과 희생을 각오한다면 북의 도발 습성은 여기서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고 밝혔다. 22일 사설에서는 “국민 모두가 눈앞의 피해나 불편함에 아랑곳하지 않고 결연하게 맞선다면 비로소 북이 우리를 무서워하게 되고 안보 위기도 넘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쟁도 불사하자는 식의 강경론이다.
보수언론이 강경론을 외치는 사이 남북은 고위급 회담을 시작했고, 4일 만인 25일 새벽 합의에 성공했다.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다면 조선일보는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어야 한다.
▲ 8월 21일자 조선일보 31면 | ||
하지만 예상됐던 비판은 없었다. 오히려 조선일보는 25일 2면 기사에서 “북한이 처음으로 의미 있는 사과 표명을 수용함으로써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됐다”며 북한의 ‘유감 표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새누리당도 비슷한 입장이다. 새누리당은 강경대응을 외치며 야당 대표의 고위급 접촉 제안을 무시했으나 막상 문제는 고위급 회담으로 해결됐고 합의에 성공하자 “환영할 일”이라고 반겼다.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설명은 “전쟁도 불사해야 협상에서 유리하다”는 것이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25일 각각 “‘원칙 고수’ 승부수 통했다” “단호한 의지 통했다”를 제목으로 뽑았다. 사설에서 명확한 사과가 아닌 유감 표명이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 동아일보 역시 기사제목은 “명시적 사과 거부하던 북 막판 선회…대북 원칙론 통했다”였다.
이는 보수세력이 단호한 대응을 강조한 덕에 이 정도라도 성과를 낼 수 있었다는 자화자찬에 가깝다. 대화 국면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결과물이 나올 것을 예상하면서 자신들이 요구한 대북강경책이 대화 국면을 이끌어냈다는 순환오류의 보도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 8월 25일자 조선일보 4면 | ||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보수세력이 주장하는 강경론이 실체가 없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번 사건을 통해 보수정권은 말로는 강경론과 ‘대북원칙론’을 내세우더라도 결국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서는 대화 밖에는 방법이 없고, 북한의 요구를 일정 부분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했다.
보수언론의 순환오류식 보도 태도에 따르면, 강경론과 대북원칙론은 햇볕정책에 맞설 만한 정책대안이 될 수 없으며 북한과의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협박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없게 된다.
조선일보는 지난 2002년 7월 26일자 사설에 서 “북한이 서해교전 사태와 관련해 우리 측에 보내온 ‘유감 표명’은 사과라고 보기에는 미흡하기 짝이 없다”며 서해교전 관련 북한의 유감표명이 주체가 불분명하다고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또한 “(이런 통지문에) 현 정부가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 환영의 뜻을 밝히고 나선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난했다.
김대중 정부를 비판하던 이 사설의 몇 글자만 바꾸면 이번 사태에서 북한으로부터 유감 표명을 받아내는 데 그친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는 사설로 바꿀 수 있다. 조선일보의 이러한 이중성은 한국 보수세력의 대북강경론에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을 비난하는 안티테제 이상의 의미가 없음을 반증한다.
즉 보수언론은 원점 타격이니, 전쟁불사니 같은 여론을 확대재생산하면서 정부를 압박하는 모양새였지만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이 24일 협상 마지막 날 북한에 명시적인 사과를 요구하고 유감표명 수준의 합의를 수용한 것처럼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일종의 제스쳐를 취한 셈이다. 그리고 그 결과 박근혜 대통령은 지지율을 높이고 국정운영 동력을 마련했다.
강경책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남북 간 갈등이 전면전으로 비화될 리 없다는 전제다. 그러나 남북관계에서 한순간 잘못된 신호로 인해 최종 정책결정권자들이 정면충돌 여지가 있는 판단을 할 수 있고 이는 돌이킬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보수언론의 보도태도는 무책임한 ‘위험한 도박’이다. 도박은 확실한 카드를 가지고 있어야 할 때 가능한데, 전면전 비화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정부에 강경책을 주문하고 정권의 실익을 추구하게 만드는 태도가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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