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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classic

혁명의 폴리페셔 존 로크

 


통치론

저자
존 로크 지음
출판사
까치 | 2007-06-15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로크의 통치론을 우리말로 옮긴 책. 통치론은 시기를 달리하여 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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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은 언제나 현실정치와 깊은 관련성을 지닌다. 플라톤처럼 정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상 정치에 대한 희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마키아벨리처럼 정치 지도자에게 “나를 고용해주시게”라고 자신의 정치철학을 개진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마도 존 로크야말로 현실 정치에 가장 큰 여파를 미친 정치철학자 중에 한 명이 아닐까 싶다. 그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정치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도 않았고, 그의 책은 홉스나 스피노자의 책처럼 금서가 되지도 않았다. 그는 영국 내전의 한가운데 있었으며 그의 사상은 휘그당의 기본 철학이 되어 많은 정치세력들을 움직였다. 말하자면 그는 17세기 영국의 “폴리페셔”였다.

1.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정치철학자

폴리페셔의 특징으로 존 로크의 성향에 대해 접근해가보자. 폴리페셔란 누구인가, “정치하는 학자”들이다. 아니, 이건 상당히 좁은 접근이고, 넓게 보자면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발언하는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즉 나는 여기서 폴리페셔란 의미를 단지 학자 출신으로 정부 요직을 차지한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그렇다면 최고의 폴리페셔는 라이프니치다.) 그의 정치 철학이 당대의 정치 현실에 큰 변동을 주었고 정치 세력들의 모토나 정체성 확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의미로 사용하려 한다. 폴리페셔의 특징은 무엇인가, 두 가지로 압축된다. 상식적이며 현실적이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조지 세이빈도 잘 지적하고 있지만 로크는 논리보다 상식을 더욱 중요시했다. 즉 그의 정치 철학은 “대중적”이었다. 논리적인 철학 전개는 명확하고 명백한 것을 바라는 대중(여기서 대중이란 엘리트의 반대 개념이 아니다.)들은 지겨워하며 잘 알려고 들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런 논리적 철학들은 대개 “그들만의 잔치”이다. 하지만 로크의 정치 철학은 상식적이며 일반적이었다. 일반 대중에게 뭔가를 어필하기 위해 쓴 느낌이 강하다. 학문적 목적만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그가 만일 학문적 목적을 앞세우고 저술했다면 그의 철학과 정반대되는, 정치적 절대주의를 옹호한 홉스를 주 공격대상으로 삼아야했다. 그러나 그의 공격대상은 필머 경이었는데, 필머는 왕권신수설의 옹호론자로 휘그당과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는 토리당의 정치 철학을 대변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필머의 주장의 여러 가지는 홉스에 기인하고 있기에 그를 공격하는데 홉스를 공격해야했으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홉스의 주장은 왕당파와 의회파 어디에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상이라 그를 공격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별 소득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그의 리바이어던이 금서여서 그를 공격하는 게 “대중적”이지 않아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상식적인 철학은 대개 분석적 철저함을 결여하기 쉽다. 어려운 문제는 피해가기 때문이다. 예컨대 인식론에 대한 그의 입장은 상당히 애매하다. 지식의 모든 자료는 감각적 인식에 의해 주어진다는 점에서는 경험주의자였으나 오직 감각적 표상만 알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면에서 형이상학자였으며 합리적 근거가 있는 판단을 좋아했다는 점에서 합리주의자였으나 이성 너머에 있는 진리에 대한 신의 계시의 가능성을 부인한다는 의미에서의 합리주의자는 아니었다. 코플스턴이 말하듯이 그는 극단적이지 않았고 상식적이었다. 이는 대중적이기에는 좋은 조건이지만 철학자로서는 별로일 수 있다. 확실한 입장이 없이 애매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흄은 그의 “실체” 관념을 비판했다. 로크에 의하면 우리가 감각으로 인식하는 관념들 말고도 이 관념들이 생기게 만드는 어떤 기체가 있는 데 이것이 실체이며 우리는 이것이 현존한다는 것을 알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추론, 상상할 뿐이다. 이에 대해 흄은 관념과 감각을 거의 동의어로 사용함으로써 모든 지식이 감각과 경험으로부터 온다는 주장을 해놓고 왜 또 그 경험 밖의 무엇인가를 상정해놓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의 주장은 “상식적”이긴 하지만 엄밀한 논리성을 가진 철학자들이 보기엔 지나치게 “중용적”이었으며 여러 가지를 결합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2. 휘그당을 옹호하라.

휘그당이 로크를 이용한 것인지 로크가 휘그당을 대변하여 철학을 전개한 것인지 선후관계는 알 수 없으나 로크는 당시에 떠오르는 정치세력, 휘그당의 정치철학을 대표했다. 휘그당은 나중에 자유당으로 발전하는 중소지주(젠트리) 및 부농 계층(요먼)을 대변하는 정당이다. 장미전쟁 이후 급감한 귀족들을 보충하고자 튜터 왕조의 헨리 7세는 젠트리와 요먼을 중용했고, 이들은 혈통이 아닌 자신의 능력으로 의회에 들어선 신흥 계급이었으며 국교회와 청교도였다. 일치하지 않지만 프랑스의 “부르주아”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의회를 장악한 이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반카톨릭. 반왕당파의 기치를 내걸었고 그 과정에서 권리장전. 권리청원. 명예혁명 등을 주도한다.

이들이 로크의 정치철학을 신봉한 이유는 그가 왕권신수설에 대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로크는 통치론 서론에서부터 혈통에 의한 지배를 거부한다. 이 논리는 필머의 “모든 군주는 아담의 후계이기에 그 지배는 정당하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었다. 로크는 아담에겐 자식과 세계에 대한 지배권이 없으며 있다 해도 그의 상속자들에겐 없으며 상속자들에게 있다 해도 누가 정당한 상속자인가를 결정하는 자연법이 없으며 누가 상속자인지 알 수 있다 해도 누가 아담의 직계인지 알 수 없으므로 그 누구도 상속권을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왕권신수론자들의 부권과 군주권의 동일시 역시 반박한다. 왕권신수론자들은 군주의 절대적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절대적 지배를 언급하며 이런 한 사람에 의한 타인의 지배(가족 형태의)는 자연적 현상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로크에 의하면 자식들에 대한 지배권은 아버지 뿐 아니라 어머니에게도 있으며 이 지배권이란 자식이 법과 도덕을 알지 못하는 시기까지에(미성년)만 해당할 뿐이며 그 이후에 자식은 아버지로부터 독립적이 된다. 하지만 자식에겐 양친을 존경하고 존중할 의무가 여전히 있기 때문에 흔히 이 존경의 의무와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지배를 혼동하는 것이다. 더불어 아버지의 지배권은 재산 상속에 따른 자식의 자발적 복종의 결과이며 설사 그런 식으로 아버지의 지배가 인정된다 해도 그 지배는 매우 한정적이다. 그러나 왕권신수설이 주장하는 왕은 국민의 생명여탈권을 비롯한 신적이고 제한 없는 권력을 누리지 않는가! 세상 어느 아버지가 그 같은 권력을 누린단 말인가? 부권과 군주권은 명백히 다르다. 로크는 국가의 설립에 모든 이들의 자연권이 양도되는데 군주만 혼자 자연 상태의 권력을 그대로 누리는 것은 모순이며, 절대군주제와 정치사회는 공존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왕권신수설에 대한 반대 말고도 로크는 휘그당의 계급적 이익을 대변했다. 바로 소유권에 대한 그의 생각 때문이었다. 로크에 의하면 소유권의 보장은 주어진 자연물에 대한 개인의 노동에 의해 보장되며 생산물을 썩게 놔두지 않기 위한 교환 역시 정당화된다. 자본주의의 발달 시기에서 성장한 젠트리와 요먼은 자신의 능력을 이용한 노동과 교환을 통해 성장한 신흥 계급이고, 소유권의 보장은 그들에게 필수적이었다. 왕이나 귀족이 마음대로 자신들의 소유물에 손대어서는 안되었다. 로크는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 저항권의 발동의 조건으로 사적 재산권, 즉 소유권의 침해를 전제한다. 그 누구도, 설사 정복 전쟁을 일으킨 왕조차도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토지와 재산을 함부로 빼앗을 권리가 없다. 휘그당에게 얼마나 마음에 드는 논리였을까. 로크에게 사유재산권이란 생명과도 같았고 휘그당도 마찬가지였다.

3. 세상을 변화시킨 정치철학

물론 내가 단언하건데 철학적 엄밀성의 관점에서 로크는 “상당히 찌질”하다. 앞에서 소개한 흄의 비판을 제외하고서라도 통치론에선 “사회”, “정치사회”, “시민사회”, “국가”와 같은 개념의 혼동이 절정에 달하고 있다. 홉스에게선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허술함이다. 또한 그가 제시하는 “사회”를 만드는 계약과 “국가”를 만드는 계약 사이의 구별은 굉장히 모호하며 결국 자연 상태가 그냥 저냥 살만하다면서 결국 나쁜 인간들이 있기에 국가를 만든다는 일관성 없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그래서 레오 스트라우스는 로크를 “양의 탈을 쓴 홉스”(자연 상태가 좋다고 말하는 척 하면서 결국 사적 이익과 인간의 사악함에서 국가를 도출해내는)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리고 그의 저항권에 관한 논의는 저항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의문이 간다. 오직 재산권의 침해로 저항할 수 있다면, 그 재산권이란 공적 이익이라기보다 사적 이익이기에 이해관계가 셀 수도 없이 다양하므로, 저항이란 씨알도 안 먹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소유권자들을 결국 “인민”이란 이름으로 묶어버리는 그의 허술함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이다. 그를 인민의 권리를 주창한 “저항권의 아버지”라고 내세우는 건 확실히 “심각한 오버”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상당히 의미”있는 정치철학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정말 조금은 천박하게 조금은 현실적으로 현실을 바꾼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현실에서 동떨어지고 “그들만의 잔치”로 끝나기 십상인 철학이 무언가 세상에 보다 노골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세상을 바꾸었다는 그 의미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나는 로크처럼 세상을 바꾸는 철학보다 더 엄밀하면서도 세상을 바꿀 철학이 나왔으면 좋겠다! 너무 허점이 많아서 그 훌륭한 유의미성이 파묻혀버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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