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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classic

유작에 남겨진 모순과 과제

 


칸트 정치철학 강의

저자
한나 아렌트 지음
출판사
푸른숲 | 2002-10-2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여자이며 유대인이며 망명객이라는 삼중의 주면인(파리아)의 경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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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 책을 순차적으로 읽은 나로선 그녀의 유작인『칸트 정치철학 강의』는 매우 기대하면서 읽었다. 아렌트의 독해가 칸트를 읽는, 특히『판단력비판』을 읽는 대표적인 독해이기도 했거니와 철학의 횡포에 맞선 정치의 힘을, 철학의 관조적 특징보다 정치의 행위적 특징을 우선시했던 그가 칸트의, 그것도 칸트철학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그것도 미학에 관련된 텍스트『판단력비판』에서 어떤 함의를 읽어내고 대안을 마련해낼 것인지(그것이 윤리적이라 해도 좋다. 대안이라기보다 어떤 ‘조건들’의 변화를 요구할지가 맞겠다.)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나에게 약간의 대답보다 약간의 의문부호, 그리고 과제를 던져주었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의 모습, 그리고 내가 영감을 받았던 정치-철학자로서의 아렌트의 면모와 너무 다른 느낌이 이 칸트 정치철학 강의에서 풍겼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전환과 역설은 ‘사유’에 대한 강조에서부터 비롯된 듯하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노동-작업-행위(이상 세 가지 vita activa)로 분류하고, 이를 관조(혹은 정관)와 대비시키는데 이 때 사유 활동의 위치가 매우 이중적이다.(애초에 관조-노동-작업-행위의 구별이 모호하다는 한계는 있다.)


 

피안의 진리에 도달하려는 관조는 사유를 통해 가능해진다. 한편으로, 비타 악티바가 사유 없이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노동이야 동물적 삶이기에 사유하지 필요하지 않다고 쳐도 관념, 혹은 형상이라는 모델의 사물화인 작업에는 사유가 필요해보이며, 더욱이 행위야 더 말할 것도 없다.(아렌트의 사유 개념을 제작인에게 통용되지 않는 엄격한 것이라 평가한다 해도, 행위는 어쩔 것이냐!) 실제로 아렌트는『인간의 조건』마지막 장에서 행위의 부활을 위해 사유하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전체주의의 비극을 낳았던 아이히만 사건으로 대표되는 평범악 문제는 무사유의 발로였고 그녀가 전체주의를 행위 없는 사회로 정의한다는 점에서, 사유 활동은 행위에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녀가 사유의 역할을 이중적으로 보았다는 점은 사유가 관조의 시녀였다가 행위의 시녀로 변모한다는 『인간의 조건』의 한 구절에서 잘 드러난다.

 

이런 이유로 내가『정신의 삶 1 사유』에서 아렌트가 변모했다는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그녀의 배신을 이해할 수 있다. 오히려 사유가 이중적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녀가 중요시 여긴 사유가 행위 활동을 부활하는 적극적 역할을 담당하고 평범악을 가로막아 전체주의의 재발을 막는 ‘활동적인’ 역할을 한다면, 사유야말로 그녀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일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비환 등『인간의 조건』에서『칸트 정치철학 강의』까지 아렌트 철학을 연속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사유를 비타 악티바의 한 종류로 파악하려고 하는 경향을 지닌다.



 

그러나,『칸트 정치철학 강의』에서 아렌트의 논의는 사실 그 전의 아렌트를 생각해볼 때 납득하기가 어렵다. 그녀는 관찰자적 입장에서 칸트의 ‘무관심한 관심’과 유사한 형태로 ‘판단’하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공공 영역에서의 적극적 참여를 강조한 아렌트의 논의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물론 김선욱, 김비환, 홍원표 등이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가 비판했던 플라톤 류의 ‘관조적 삶’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정지된 순간의 진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판단’을 통해서 되찾자고 주장한다거나, 공공 영역에서 누가 옳고 그르고를 결정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무관심한 관심, 혹은 관찰자적 입장이 정치적 행위의 삶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데, 그것은 그녀가『인간의 조건』에서 행위의 특성으로 그 누구도 우리 삶의 이야기의 저자이거나 연출자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 것과 관련된다. 행위를 억누르려던 플라톤이, 그리고 역사철학이 보여준 ‘무대 뒤 행위자’가 아렌트의 ‘관찰자’와 무엇이 다를까.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사실 아렌트의 이런 한계는 다원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보편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모두가 다르고 모두가 다른 생각을 하는 마당에, 어떤 토론과 합의가 가능해질 것인가? 각자 다른 생각으로 뭉친 인간들이 어떤 이유로 서로 모여 정치할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버마스의 공론 영역이 등장하는 것이다. 아렌트 역시 공통감각common sense를 도입해야만 했다.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이 공통감각이 정치를 하게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원동력이다. 또한 이것의 존재가 아렌트가 칸트의『판단력비판』을 정치철학으로 독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칸트는 취미판단에는 보편성이 가능하며(자연의 웅대함 앞에 누가 숭고함을 느끼지 않을 것인가!) 이 보편성은 인간들의 공통감각에서 기능한다. 아렌트는 이 공통감각을 정치가 가능해지는 요건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아렌트의 공통감각 개념 도입은 하버마스에게 겨누어졌던 칼날이 그대로 그녀에게로 돌아오는 결과를, 칸트에게 겨누어졌던 칼날보다 더 날카로운 칼날이 그녀에게 돌아오는 결과를 가져온다. 형식과 규준을 지키는 자만이 공론 영역에서 우리와 합의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그리하여 포섭과 배제의 정치학을 낳는다는 하버마스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또한, 미적 판단에서는 보편성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 해도 정치적 영역에 그것이 적용될 경우 그 공포는 더욱 심하고, 현실적인 것이란 비판이다. 공통 감각은 그것을 가지지 않는 자들을 배제함으로써 공론 영역을 유지한다. 그렇게 유지된 공론 영역이란, 결국 전체주의와 무엇이 다르냐는 말이다. 다원성이 진정으로 유지되고 있는가, 그 공론 영역에선? 차라리 정치에서의 진리 개념을 인정하고 진리의 복수성에 수긍하는 알랭 바디우의 논의가 더 모순점이 적어 보인다.


 

아렌트가 남긴 한계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모더니스트인 우리들이 해결해야할 과제이다. 서로의 다원성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어떻게 정치를 해나갈 것이고, 그 안에서 배제된 자들을 어떻게 포함하여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룩할 것인가는 굉장히 심각하고도 진지한 그 과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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