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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 /이집트 여행기

2023 이집트 여행기 ④ 알렉산드리아도서관과 이집트 3무(無)

83일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아침은 전날보다 상쾌했다. 카이로에서 강제 기상을 하게 만든 자동차 경적소리는 확실히 줄었고, 눈 앞을 가리던 시큼한 매연은 지중해의 바닷바람이 걷어내 주었다.

숙소 발코니에서 바라본 지중해

 

아침 7시에 아직 덜 깬 상태로 호텔 6층으로 조식을 먹으러 갔다. 부킹닷컴 같은 사이트를 보면 호텔 조식을 되게 중요하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나에게 조식은 숙소 평가에서 가장 중요하지 않은 기준 중의 하나다. 조식이란 그저 여행을 나서는 데 필요한 연료이고, 조식 식당은 그저 주유소일 뿐.

그렇게 주유를 하러 식당에 올라와서 다시 한번 느꼈다. 이 호텔은 진짜 뷰가 개간지다. 지중해를 마주한 채 몸에 연료를 주유하고 있자면 부자가 된 기분이다.

조식 뷰.
호텔 조식으로 나온 오믈렛. 오믈렛 담당 할아버지한테 말하면 취향에 맞게 요리해준다. 난 치즈랑 토마토만 넣었다 .

 

든든하게 연료를 채운 뒤 길을 나섰다.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꼭 가야겠다고 생각한 곳이 딱 두 곳이 있는데, 한 곳이 세계 최초의 공공도서관이라는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이고 다른 한 곳이 바로 지중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콰이트베이 요새다.

내가 있는 숙소에서 동쪽으로 20여 분을 걸으면 알렉산드리아도서관, 서쪽 방향으로 30여분을 걸으면 콰이트베이로 갈 수 있다. 드럽게 더운 이집트였지만 산책 겸 한 번 걸어보기로 하고 오늘은 알렉산드리아도서관 쪽으로 향했다.

 

그래도 기분 나쁜 더위를 선사하는 카이로에 비하면 알렉산드리아는 걷기 꽤 괜찮은 동네다. 온도는 높아도 이집트의 더위는 대한민국과 다르다. 습도가 높은 게 아니라 작열하는 태양이 문제이기에 그늘에 들어서면 선선한 편이다. 특히 알렉산드리아 지중해 바다 길을 따라 걸으면 바닷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한강 산책 때처럼 지중해를 따라 걸으면 발견할 수 있는 낚시족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을 향해 걷던 중 정말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바로 신호등과 횡단보도였다! 뭐야? 너네 신호등 만들 수 있었던 거야? 횡단보도 만들 수 있는데 무단횡단 마스터들하고 급정거 마스터들이 목숨을 건 대결을 펼치고 있었던 거야?

 

이집트에서 처음 본 신호등이었다. 나는 신문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신호등을 건너는 이집션들을 몇 분 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오~신호등 색깔 아네?) 원래 나는 '신호등' 잔돈’ ‘맛있는 맥주(이제와 고백하지만 전날 먹은 이집트 맥주, 맛없었다)를 이집트 3()로 선정하려고 했었다. 아쉽게도 신호등은 탈락.

알고 보니 신호등 바로 옆에 ‘Alexandria Traffic Dept’(알렉산드리아 교통국)이라는 관청이 있었다. 교통 경찰들 모여 있는데 다 같이 무단횡단 게임을 즐기기엔 민망했던 걸까? 아니면 경찰들은 죽기 싫었던 것일까?

그렇게 처음 본 횡단보도를 건너 알렉산드리아도서관으로 향했다.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은 오전 10시에 개관했기에 조금의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근처에 보이는 실린트로라는 카페로 들어갔다. 디저트와 커피를 파는 곳이었다.

알렉산드리도서관 근처의 카페 실린트로

 

참고로 알렉산드리아는 디저트 카페로 유명한 도시다. (그래서 더욱 여긴 이집트가 아니고 유럽 같다.) 알렉산드리아 디저트 실력 좀 볼까? 하는 심정으로 작은 조각 케잌 하나랑 달아보이는 커피를 시켰는데 생각보다 맛있었다.

 

합쳐서 110파운드길래 거슬러 달라고 200파운드를 냈더니 잔돈 없냐고 물어본다. 앞서 이집트 3무(無) 중 하나로 소개했듯 이놈들은 도통 잔돈/거스름돈이란 걸 모른다. (아랍어로 잔돈은 바끼라고 한다. 하도 안 줘서 이 단어는 외웠다.) 그래서 120파운드를 냈다. 그랬더니 10파운드 없냐고 물어본다. 없다고 했더니 알겠다며 그냥 120파운드를 받아 간다. 거슬러 줬냐고? 아니, 그냥 내 돈 10파운드 박시시로 먹은 거다.

주문하는 동안 가게 사장은 내가 들고 있던 캡틴아메리카 손풍기를 유심히 바라보며 그게 뭐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카이로에서부터 십수 명의 이집션들이 나의 손풍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처음엔 동양인인 내가 신기해서 쳐다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내 손풍기가 이집션들의 시선을 빼앗은 것이었다. 이집트 3무(無) 중 하나로 손풍기 선정!

가게 주인은 내 손풍기를 칭찬하더니 갑자기 자기는 더 큰 거 있다며 가게에 있던 선풍기를 가리켰다. (뭐 어쩌라고..)

느 집엔 손풍기 없지?

 

카페에 앉아 있는데 아래로 지나가던 이집션 잼민이 무리가 나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손을 흔들고 난리를 피웠다. ‘헤이헤이’ ‘니하오거리면서 계속 내 시선을 끌려고 했다. 이집트에 처음 왔다면 손 감자 큰 거 하나 먹여주던지 아니면 탁자에 있던 재떨이로 손이 갔겠지만 이집트산 X신들에게 익숙해진 나는 그냥 개무시했다. 관심 종자들이기에 관심을 안 주면 시무룩해서 사라진다.

카페 뷰

 

잼민이들도 꺼지고 시간이 다 돼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은 고대 이집트 때 알렉산드리아에 지어진 도서관으로 세계 최초의 공공도서관으로 유명하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파라오가 된 후 무세이온의 부설기관으로 도서관 건립 계획을 세웠다. 무세이온은 인류사 최초의 고등학문연구기관이다. 말하자면 대학을 세우고, 대학의 학문연구를 도울 도서관까지 건립한 셈이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시기에 완성된 이 도서관은 인류의 모든 지식을 모으겠다는 엄청난 목표를 갖고 있었다. 전 세계 학자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연구를 할 정도로 엄청난 기관이었으나 정확히 원인을 알 수 없는 여러 차례의 파괴로 인해(화재라는 설도 있음)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 뒤 한참이 지난 2002년 이집트가 고대의 도서관을 기념하는 의미로 일명 신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을 개관했다. 참고로 도서관은 금요일에 열지 않으니 혹시 방문할 일 있다면 참고하길 바란다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은 이렇게 생겼다.

10시 오픈런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입장료 70파운드를 내면 자유롭게 도서관을 견학할 티겟을 살 수 있다. 오픈런 줄은 10여 분만 기다리면 금방 빠진다. 수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아마 그중에 동양인은 나뿐인 것 같았다.

 

알렉산드리아도서관 티켓.

 

여느 도서관과 다르지 않게 열람실이 갖춰져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분야별로 책도 구비되어 있고 많지는 않지만 도서관을 기념할 만한 유물들도 있어서 천천히 둘러보았다.

혹시 책 대출이 가능한가 궁금해서 데스크에 “책 빌릴 수 있나요?”라고 물어봤더니 바로 “어디서 오셨냐?”고 묻는다. “아나 민 꾸리야"(한국에서 왔다)라고 했더니 “내년쯤 반납하시게요?”라고 되묻는다. 2024년 또집트 여행 저주의 복선..? 섬뜩해서 대출 생각이 싹 사라졌다. 
 

공부 잘 될 것 같은 열람실.

 

폰이 울리면 벌금 10파운드를 내야 한다고 써 있다. 그러나 폰 벨소리보다 더 시끄럽게 떠드는 놈들을 많이 봤다.

 

바로 눈에 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세계 각국의 여행책자. 한국은 없다. 더 분발하자 코리아.

 

꼭 공부한다고 와서 도서관에서 유튜브 보는 놈들, 여기도 있다

 

여기는 의자도 책이다.

 

도서관 입구 쪽에는 북숍이 있다. 이집트 관련 책과 여러 기념품을 파는 곳이다. 이것저것 많이 팔길래 구경은 했지만 구매는 안했다.

위쪽은 계단식 피라미드, 아래쪽은 이집트에서 유명한 상징물인 스카라브

 

이집트 냥신 '바스테' 기념품

 

오랜 시간 돌아다니다보니 목이 말라 물과 콜라를 15파운드 주고 산 뒤 다시 걸어서 숙소로 돌아갔다. 바보같이 보조배터리와 충전기를 모두 들고 나오지 않아서 핸드폰 배터리가 없었기에..게다가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씻고 조금 쉬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 목적지는 걸어서 30분 거리의 알렉산드리아국립박물관. 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알렉산드리아가 새삼 이집트의 여의도, 강남 같은 곳임을 깨달았다. 백화점도 있고 여러 유명 기업들의 간판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여기도 있는 삼성

 

설상가상으로 구글 지도까지 터지지 않아 오기 전에 봤던 지도를 떠올려가며, 또 지나가는 이집션들에게 물어물어 박물관에 도착했다. 입장료는 120파운드인데 여기도 ‘Only visa’였다.

알렉산드리아 국립박물관

 

국립박물관 티켓.

 

고대 알렉산드리아에서부터 이슬람 제국 지배기, 그리고 무함마드 알리 이후 현대의 알렉산드리아까지 역사를 다룬 박물관이다. 그런데 사실 30땀 파티를 하고 걸어서 온 것치고 볼 게 많지 않아서 좀 실망스러웠다. (카이로 국립박물관 때문에 눈이 높아져서 그런가?) 유물도 많지 않고 2층이 전부라서 1시간~1시간 반이면 충분히 둘러볼 만하다. 일정이 빡빡하면 굳이 안 들러도 될 것 같다.

 

프톨레마이오스 시기의 왕비 조각상. 머리 장식 등은 이집트식인데 몸의 굴곡 등을 표현한 방식이 전형적으로 그리스 스타일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 문화와 이집트 문화가 뒤섞였음을 알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과 도서관에서 탄생한 여러 연구 작품들을 열거해놓았다.

 

알렉산드리아가 아랍/이슬람제국의 지배를 받았을 시기의 유물

 

조식을 많이 먹고 디저트까지 먹어서 배가 안 고팠는데 졸라 걷다 보니 허기가 져서 늦은 점심 겸 저녁을 구하러 향했다. 15분을 걸어 시리아 음식을 판다는 ‘KARAM EL-SHAM 19509’라는 테이크아웃 음식점을 향했다. 인스타 계정을 보고 찾아낸 음식점이다.

 

외국인인 내가 메뉴판 앞에서 기웃거리자 영어가 가능한 직원이 등장했다. 사실 시리아 음식이라고 해서 특별할 건 없고 케밥이나 치킨, 감자튀김 등을 세트로 파는 곳이었다. 하지만 인스타 사진으로 봤을 땐 군침이 싹 돌게 생겼다.

90파운드짜리 세트메뉴를 시키고 받아서 기대감에 부푼 채 15분을 걸어 숙소로 향했다. 35도의 한낮 이집트를 1시간 반째 걷고 있는 중. 너무 힘들어서 기운을 내고자 이어폰을 귀에 꽂고 미리 오프라인 저장을 해둔 유튜브 음악을 들으며 걸었다. 한국 노래니까 흥얼거려도 아무도 못 알아듣기에 너무 편했다.

그런데 몇몇 이집션들이 내가 노래 부르는 걸 쳐다보는 게 아닌가? 아니, K-POP이 여기에서도..? 'K-POP부심'이 차오르려는 찰나에 수수께끼가 풀렸다. 한 이집션이 다가와 인사를 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내 플레이 리스트에 무한도전에서 나온 아프지마 도토 잠보라는 노래가 있었다. 7년 전 노래인데 가사 중에 앗살라무 알라이쿰이라는 대목이 있다. 아랍어로 안녕하세요라는 뜻이다. 그것도 이슬람 교도들끼리 주고받는 종교적 인사말에 가깝다.(당신에게 평화가 깃들기를!)

 

전혀 이슬람교도 같지 않은 동양인 놈이 이집트 거리를 걸으면서 안녕하세요~안녕하세요~당신에게 평화가 깃들길~안녕하세요~’ 이ㅈㄹ하면서 (그것도 흥얼거리며) 돌아다녔으니 아마 이집션이 빙의한 미친놈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집트에서 펼쳐진 K식 생활 뮤지컬

 

그렇게 갑분 길거리 뮤지컬을 마친 뒤 호텔로 돌아와서 씻고 기대감에 부풀어 테이크아웃 해 온 식사를 열었다. 근데 기대보다 너무 부실했다.

 

아니 인스타 사진이랑 너무 다르잖아?

 

인스타 음식사진은 이랬는데 이거 사기 아님?

 

역시 이래서 인스타 보정은 믿을 게 못 되나 보다. 그래도 배가 고프니 음료수랑 같이 맛있게 먹고 발코니에 나가 지중해 경치를 감상했다.

자기 전까지 개인적 문제 몇 가지들을 해결했는데 역시 이 호텔은 서비스가 매우 좋다는 점을 실감했다. 이집트에서 온 이후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아무래도 그냥 옷을 가져갔다간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옷이 생화학 무기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laundry service를 맡겼다.

참고로 이집트 호텔에 가면 laundry service를 한 번 써볼 것을 추천한다. 어떤 용품을 쓰는지 모르겠는데 냄새까지 싹 빼버릴 뿐더러 거의 새 옷을 만들어놓는다. 당연히 별도의 비용을 내야하지만 건조까지 해서 갔다 준 옷의 산뜻한 냄새를 맡으면 기분이 절로 행복해진다.

또 하나 더, 면도기를 안 가져온 것이 생각나 프론트에 문의했는데 공짜로 면도기도 갖다주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서비스였다. 단 하나, 곧 벌어질 어떤 날강도 놈의 잔돈 박시시만 빼면 말이다.

다음 편은 이집트의 잔돈 박시시와 지중해가 한눈에 보이는 콰이트베이 이야기다.

▶다음편 : <콰이트베이 요새와 샤와르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