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했을 당시 한 독일인 사업가가 독일인 점령지인 크라코우에 찾아온다. 기회주의자이며 돈에 혈안이 된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는 폴란드계 유태인이 경영하는 그릇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나찌 당원이 되어 SS요원들에게 여자, 술, 담배를 바치는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한다. 그는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독일군 장교들에게 뇌물을 바치며 유태인들을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게 하고 덕분에 임금 한 푼 주지 않고 공장을 운영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다 유능한 유태인 회계사 스턴을 비서로 고용하게 된다. 그런데 그 뒤,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돈 밖에 모르던 사업가 쉰들러는 유태인들을 강제 노동 수용소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노동수용소 장교에게 거의 전 재산을 뇌물로 바치고 스턴과 함께 크라코우로부터 쉰들러의 고향으로 탈출시킬 유태인 명단을 만든다.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의 수용소로부터 1,100명의 유태인들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다. 1945년 전쟁이 종식되고 나찌당원을 잡아들이던 연합군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도망가기 전 쉰들러는 자신의 차와 나찌 배찌를 보며 오열한다. “나는 왜 차를 팔지 않고 이 금배찌를 팔지 않았지? 이걸 팔았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해낼 수 있었을텐데......”
왜 쉰들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나치에 가입하고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유태인을 고용하던 이기주의자에서 유태인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아끼지 않는 이타주의자로 변화했을까? 이 영화가 주는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가장 기회주의적이던 인간조차 변화시킬 수 있는 힘.”
혹자는 쉰들러가 단순히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유태인이 불쌍해서 도와줬다고 애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모르는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 양심에 가책을 느껴서, 불쌍해서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심지어 자신조차 위험한 상황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더욱이 가장 이기적이던 인간이 말이다.
왜 쉰들러가 유태인을 구해냈는가에 대한 답은 영화 속에 있다. 영화 속에서 쉰들러가 자신의 비서 스턴과 함께 강제 수용소로부터 구해낼 유태인의 명단을 작성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명단 안에 인물들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쉰들러가 그들의 이름과 얼굴, 그리고 그들의 간단한 특징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름을 안다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알고 있는가? 이름은 단순히 대상을 지칭하는 수단만이 아니다. 사람을 알아나가는 과정의 기본이다. 그 사람의 얼굴과 이름이 기억되는 순간 나의 기억 속에 그 사람은 하나의 대상으로써, 하나의 주체로서 자리 잡는다. 모르는 사람이 위험에 처해있다.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상황이어도 도와줄 것인가? 조금 고민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름을 알고 있고, 얼굴도 알고 있으며 내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한 사람이 나에게 도와달라면? 아마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경우와는 확연히 다를 것이다.
쉰들러에게 1,100명의 유태인들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쉰들러의 공장에서 열심히 일했던 사람들이며 악덕한 기업주인 자신을 생명의 은인이라 생각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모두 알고 있다. 쉰들러를 변화시킨 힘은 단 한 가지다. “이름을 안다는 것.” 이 힘은 이렇게 강력하다.
이 영화는 이름을 안다는 것의 중요성을 알려주었을 뿐 아니라 나의 세계관을 바꿔주었다. 이전까지 나는 구조주의자에 가까웠다. 사회의 구조가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주변의 환경이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고, 개인의 문제들은 대부분 삐뚤어진 사회에 기반해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가장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이 인간을 살릴 수 있다는 것, 인간이 어떤 삶을 사느냐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것. 이 사실을 오스카 쉰들러 그의 삶이 나에게 보여주었다. 구조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다. 환경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인간이다. 어떤 삶을 살 것이냐는 인간의 선택이다. ‘현실이 나를 변하게 만들었어. 주변 상황이 어쩔 수 없잖아? 나는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고, 나는 이럴 수밖에 없었다고.’ 나는 내 인생을 살면서 이런 변명을 하지 않게 될 것 같다. 왜냐면 오스카 쉰들러의 삶이 나에게 보여주었으니까.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오스카 쉰들러는 1,100명의 유태인들에게 꽃이고 잊혀지지 않는 눈짓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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