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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라시 같은 언론, 언론 같은 찌라시

찌라시 같은 언론, 언론 같은 찌라시

[리뷰] 영화 ‘찌라시’, 언론에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들의 외압이다

* 스포일러 있습니다.

‘찌라시’라는 말을 처음 들어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증권가 사설정보지를 뜻하는 찌라시는 온갖 연예계 루머의 근원지이자 사람들의 원초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미지의 정보지다. 최근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내용을 찌라시에서 봤다고 밝혀 파문이 일기도 했다.

그동안 미지의 영역이었던 사설정보지, 찌라시의 실체를 추적하는 영화가 나왔다. 김광식 감독의 신작 <찌라시 : 위험한 소문의 실체>는 찌라시에 나온 소문 때문에 자살한 연예인 미진(고원희 역)의 매니저 우곤(김강우 역)이 소문의 근원을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찌라시의 출처와 유통, 배급과정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전체적인 플롯은 독특하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식상하기까지 하다. 우곤은 연예인의 죽음을 파헤치다 그 죽음의 배경에서 청와대로 대표되는 정치권력, 대기업으로 대표되는 경제권력의 거대한 음모를 발견한다. 이는 기자나 경찰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나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스토리 구성이다. 2012년 여름 방영된 SBS 드라마 ‘유령’이 대표적인 사례다.

캐릭터도 독특하지 않다. 정의감에 불타는 주인공 ‘우곤’과 찌라시 업자이면서 주인공을 돕는 조력자 박사장(정진영 역), 진실을 돈으로 감추는 대기업 홍보실장 오본석(박원상 역)과 행동대장 차성주(박성웅 역) 등. 캐릭터 각각이 맡는 역할은 매우 전형적이며, 인물의 성격에도 큰 변화가 없다.

   
▲ 영화 ‘찌라시’ 포스터

플롯도 캐릭터도 단순한 이 영화에서 주목할 대목은 찌라시와 언론의 관계다.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찌라시와 언론은 상호적인 관계다. 많은 기자들이 찌라시에 나온 내용을 보고 추가 취재를 해 기사를 쓴다. 조선일보가 보도한 채동욱 혼외자 설은 찌라시에 먼저 올라왔고, 이후 기자들이 추가 취재를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기자들의 입에서 나온 정보가 찌라시에 실리는 경우도 있다. 영화 속에서는 기자들이 참여한 ‘정보회의’에서 나온 정보들을 토대로 찌라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나온다. ‘정보회의’가 아니라 기자들의 ‘정보보고’가 찌라시에 흘러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SBS 기자가 연예인 손호영씨의 숨진 여자친구의 신상정보를 다른 기자에게 보냈다가 이 정보가 찌라시로 유출된 적이 있다.

<찌라시>의 배경은 언론이 죽어버린 상황에서 찌라시가 언론 노릇을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찌라시 업자 박사장은 최고의 대기업 ONC를 ‘조지는’ 기사를 쓰려다 실패하고, 기자 생활에 회의를 느껴 찌라시 업계로 왔다. 박사장의 기자 동기였던 오본석은 ONC 홍보실장으로 영입된다. 그는 기자들을 관리하고 ONC에 불리한 보도를 틀어막는 역할을 한다.

<찌라시>에 등장하는 기자들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경제권력에 놀아나는 무능한 모습을 보여준다. ONC는 기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사에 부정적인 보도를 하지 못하게 막고, 기자들은 이 지시를 따른다. 어떤 기자들은 오본석에게 전화를 걸어 보도를 해도 괜찮은지 묻고, 오본석은 ‘비보도’라며 기자들을 윽박지른다. 오본석은 ONC의 비리가 드러나자 부하 직원들에게 “광고 더 줘서 막고, 안 되면 광고 전부 다 내린다며 막으라”고 지시한다.

기자들은 정치권력에게도 놀아난다. 미진의 죽음에 청와대가 연루되어있다는 소문이 돌지만, 기자들은 청와대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불편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박영진 청와대 실장이 미진의 ‘섹스 동영상’ 이야기를 꺼내자, 기자들은 일제히 섹스 동영상 기사를 쏟아낸다. 다른 사건으로 사건을 덮는 물타기에 놀아난 것이다. 박사장은 이 상황을 보고 놀라는 우곤에게 찌라시들이 흔히 하는 ‘물타기’라고 설명한다.

언로가 막힌 상황에서 주인공들은 진실을 알리기 위해 ‘찌라시’를 선택한다. 찌라시를 통해 정보를 흘리는 방식으로 여론을 이끌고,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며 진실을 추적한다. 언론이 해야 할 일을 찌라시가 하는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 영화 ‘찌라시’의 한 장면
더욱 기막힌 것은 이것이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점이다. 한국의 많은 언론이 언론을 표방하며 사실은 ‘찌라시’ 노릇을 하고 있진 않은가. 국정원 대선개입이 발생했을 당시 보수언론과 공영방송 등은 사건을 추적하는 대신, ‘여직원 감금’ 등 집권세력이 내놓은 프레임을 그대로 따라가기에 바빴다. 국정원사건에 관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던 와중 국정원은 NLL 대화록을 꺼냈고, 통합진보당 내란음모사건을 꺼냈다. 수사를 이끌던 검찰총장이 혼외자 논란에 휘말렸고, 수사팀장은 ‘항명 파동’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국정원사건에 침묵하던 다수 언론은 NLL 논란과 내란음모사건 엔 앞 다투어 ‘특종’과 ‘단독’을 쏟아냈다. 한 공영방송은 타사의 검찰총장 혼외자 단독보도를 그대로 인용하는 등 적극적으로 보도에 앞장섰다. 국정원 사건을 수사하던 검사가 수사에 외압이 있었다고 폭로했으나 많은 언론은 외압의 실체를 밝히는 대신 ‘항명’이라는 프레임으로 사건을 다뤘다. 영화 속 기자들처럼 한국의 많은 언론은 권력의 ‘물타기’에 그대로 놀아난 건 아닐까.

전직 국정원 요원이자 ONC의 행동대장인 차성주는 진실을 파헤치려는 우곤의 손가락을 여러 차례 부러뜨린다. 손가락이 부러지면 기사를 쓸 수 없다. 차성주는 진실을 알리려는 언론의 필봉을 꺾는 권력을 대표한다. 우곤은 손가락이 부러진 상태에서 “너희가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게 하나 있다. 사람들의 손가락”라고 말한다. 진실이 담겨진 동영상은 언론이 아니라 유투브로, 카톡으로 확산된다. 차성주는 진실을 알리려는 움직임에 손가락을 부러뜨리는 것으로 대응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을 부러뜨릴 수는 없었다.

손가락들에 의해 영상이 확산되자 ONC도 더 이상 막을 방법이 없다. 기자들도 그제야 “이미 너무 퍼져서 우리도 보도를 안 할 수 없다”며 관련 보도를 시작한다. 이 영화는 언론에게 정치권력도 경제권력도 아닌 다른 종류의 ‘억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것은 진실을 요구하는 수많은 ‘손가락’들의 외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