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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글/한겨레 hook

민주주의가 밥 먹여줍니다

지난 11월 2일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서울대 법대의 초청을 받아 ‘대한민국의 미래 경기도’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김 지사의 강연이 끝나고 가진 질의응답 시간에 한 학생은 김 지사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을 치켜세운 것에 대해 “민주주의란 권력자가 독단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합의를 통해 결정하는 체제다. 국민을 설득해 이끌어 내는 게 요건 아니겠느냐.”고 되물었다. 이에 대해 김 지사는 “민주주의만 외치면 모든 게 정당화되느냐, 배고픈 사람에게 민주주의가 밥을 주진 않는다.”고 응수했다.1)

‘민주주의가 밥을 주진 않는다.’라는 김문수의 대답은 한국 보수우익의 오래된 화법이자 논리를 대표하는 것이다. 이 논리가 이제 일반 여론에게 더 이상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논의는 논외로 하더라도2) 이 논리가 과연 실제로 타당한 것인지에 대한 검토는 필요한 일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밥을 먹게 해주는’ 행위, 즉 가치의 분배라는 차원에서의 정치와 민주주의의 의미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정치학에서는 경제나 문화의 영역과 구별되는 정치의 특징을 권력 또는 권력과 관계되는 정책 결정과정에서 찾으려는 생각이 일반화되고 있다. 즉 오늘날 정치학의 관심은 사회과정 속에서 정책결정에 관계되는 것, 강제나 제재를 동반한 의사결정의 과정에 쏠리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는 정치학자가 바로 이스턴(David Easton, 1918~)이다. 이스턴은 정치를 ‘희소 자원의 권위적 배분을 둘러싼 활동’으로 정의한다. 예컨대 정치라는 사회현상은 여러 가지 사회적 가치를 둘러싼 분쟁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서 해결하려는 데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사회적 가치는 유한한데 그것을 원하는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므로, 개인의 욕구를 제한하면서 전체적 결정으로써 이러한 사회적 가치를 합리적으로 배분해야만 사회는 유지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가 하나의 집합체로 존속하기 위해서는 가치의 배분을 권위적으로 결정하는 시스템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3)

그런데 문제는 과연 어떻게 해야 사회적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권위적이라는 것은 그 배분행위가(통속적으로 말한다면 이것이 바로 ‘정책’이다.) 정치체계의 구성원들에 의해서 구속력 있는 것으로 인정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전에 이 ‘권위’는 왕에게서, 혹은 몇 몇 귀족들에게서 나왔다. 그러나 수많은 평민들의 피와 땀으로 이 권위는 이제 (특정한 자격을 갖춘) 일반 민중에게서 나온다. 바로 이것이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에는 수 없이 다양한 의미들이 있지만, 적어도 ‘밥을 주는 문제’, 즉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는 관점에서 민주주의란 배분의 권위가 민중으로부터 나오는 정치원리이다. 오늘날 많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대의제라는 민주주의 ‘제도’(시스템)는 이러한 원리에 따라 만들어졌다. 유한한 사회적 가치를 둘러싼 분쟁을 해결하는 규칙을 만드는 권한, 즉 ‘입법권’은 시민권을 지닌 모든 이들의 ‘투표’에 의해 선출된 이들에게 부여된다. 그리고 이법에 따라 정책을 집행할 권한(실제로 사회적 가치를 배분할 권한) 역시 ‘투표’에 의해 선출된 정치세력에게 부여된다.

그렇다면 그 권위는 어찌하여 ‘왕’이나 소수 뛰어난 자질을 지닌 ‘귀족’이 아니라 일반 민중에게로 옮겨졌는가? 위기의 시대에 영웅을 찾는 많은 민중들의 희망처럼, 뛰어난 통찰력과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위대한 지도자가 우리 민족을 역사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고, 굶주리고 헐벗은 민족을 삼시세끼 쌀밥 고깃국을 먹을 수 있는 번영의 길로 이끌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경제성장’과 ‘조국 근대화’의 지도자 박정희를 높게 평가하고 그의 독재 체제를 ‘한국식 민주주의’라고 옹호하는 것을, 그리고 한국의 대통령 역시 이러한 지도자여야 한다는 은밀한 주장을 ‘위험한 생각’이라고 비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나는 공화주의 이론가들의 입을 빌려 대답하고자 한다. 15세기 말에서부터 16세기까지 근대국가의 모델로 군주제가 아닌 공화제를 주장했던 마키아벨리, 존 홀, 존 밀턴, 시드니 등은 자유 국가-국민과 노예 상태의 국가-국민을 구별한다. 이들의 노예제에 대한 견해는 로마의 법적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로마인들은 노예가 자유롭지 못한 본질적 이유를 물리적 힘 혹은 그것의 협박에 의해 강제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찾지 않았다. 노예가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타인의 관할권에 종속되어 있고 따라서 결과적으로 타인의 권력 안에 있기 때문이다. 노예들이 실제로 자신들의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해도 그것은 언제나 주인의 너그러운 처분 덕분이다. 이러한 분석은 시민적 결사체가 자유를 향유, 상실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진술하는 기초이다. 그렇기에 모든 형태의 왕정은, 그리고 독재는 공공의 자유와는 양립할 수 없다.

공화주의 이론가들은 이를 공적 노예 상태라고 부른다. 실제로 ‘성군이 지배한다 해도’, ‘법이 지배한다 해도’ ‘헌정적 권리를 박탈당하지 않았다 해도’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능력이 그 시민들의 정치체가 아닌 그 어떤 인간의 ‘의지에 의지해’ 있기 때문에 노예 상태에 있는 것이다. 밀턴은 이런 이유로 왕의 거부권을 비판하며 의회의 결정이 한 사람의 유일한 판단에 의해 거부될 수 있다면 국민은 자유 안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공적 자유를 파괴하는 것은 그러한 대권의 ‘행사’가 아니라 그러한 대권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이런 이유로 공화주의 이론가였던 오스본은 왕들은 언제나 자의적 권력만의 확충을 추구하고 그 어떤 왕이라도 언제나 약탈적이고 불성실한 것이 드러나게 된다며 왕정에 반대했다.4)

역사가 왕이나 귀족의 ‘실제로 뛰어날 수도 있는 자질’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무지할 수도 있는 민중’이 다스리는 통치로 발전해 온 이유는 공화주의 이론가들이 언급했듯이 왕이나 귀족의 통치가 대다수 민중의 자유를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제 억압당할지 모르는 상태’, 즉 주인의 너그러운 처분에 의존하는 자유란 자유가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민주주의가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지는 않는다.”라는 김문수 지사의 주장에 이렇게 반론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그 밥을 나누어줄 수 있는 권위를 특정한 개인에게서 빼앗아 일반 민중에게 부여하는 원리다.” 고로, “민주주의가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지는” 않을지라도, “민주주의가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줄 가능성이 ‘일반적으로’ 독재보다 높다.” 그래서 우리는 귀찮고 복잡하더라도 민주주의를 선택한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이런 이유로 탄생한 대의제 민주주의는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대표자들은 자신들에게 권위를 부여해준 사람들을 대표하지 못한다. 대표자들은 민중들의 일반의지를 계산하여 입력하면 그에 따라 행동하는 로봇이 아니라 대표되는 자들과 똑같이 사적 이익을 가진 인간이다. 그렇기에 오늘날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는 시민5)들은 불행하게도 그렇게 타파하고자 했던 불확실성, ‘지도자의 덕성에 의존해야 하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몇 달 전 진보신당 조승수 의원의 홈페이지에 쏟아진 네티즌들의 격려는 이러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2월 25일 65세 이상 전직 국회의원들에게 평생 매달 130만원 씩 수당을 지급하는 법안이 다른 법안들과는 달리 싸움 하나 없이 제적의원 191명 중 187명 찬성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통과되었다. 시민들은 법안이 통과된 지 한참 지난 후에야 이 사실을 알 수 있었고 – 그것도 반대표를 던진 한 의원이 라디오에서 이 사실을 언급하면서 알려졌다 – 이에 대해 분통을 터트리는 댓글을 달거나 ‘국회의원 놈들 다 똑같다.’라며 술자리에서 그들을 씹는 것 외에는 달리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혹은 법안에 반대표를 던진 2명 중 한 명인 조승수 의원의 홈페이지에 가서 격려 글을 남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시민들을 대변한다면 해야 하는 당연한 반대를 ‘훌륭하다.’고 치켜세우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덕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서글픈 현실의 반증이 아닌가? 오늘날 우리가 투표를 통해 뽑고 있는 건 ‘대통령’과 ‘국회의원’인가? 아니면 ‘왕’과 ‘귀족’인가?

지난 12월 8일 한나라당이 309조의 새해 예산안을 날치기한 사건은 ‘공익 대신 사익을 추구하는 대의제의 한계’와 ‘민주주의가 밥 먹여 줄 가능성이 높다.’는 진실을 동시에 입증한다. “국가 예산을 어디에 쓰느냐”라는 문제야말로 ‘사회적 가치의 배분’을 결정하는 가장 직접적인 요소인데, 이번에 날치기 처리된 예산안은 ‘권위적’ 배분이기를 완전히 포기했다. 당과 청와대에서 약속하고 여야가 복지위에서 합의한 각종 ‘서민 예산’이 죄다 삭감된 데에 반해 합의와 논의 한 번 없이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에게 특혜를 주는 예산들이 증액된 것이다. 취업 후 학자금 상환제(ICL) 이자 대납 예산이 올해 3015억 원에서 1989억 원 줄어든 1117억 원으로 편성되었고, 학자금 대출 이자율을 낮출 수 있는 한국장학재단 출연금 1300억 원도 전액 삭감되고, 차상위 계층 대학생 장학금 역시 805억 원에서 517억5000만원 줄어든 287억5000만원으로 책정되었으며 올해 29억 원이었던 청소년공부방 예산은 전액 삭감되었다.6) 거기다 상임위 단계에서 책정한 영·유아 예방 접종비 예산 400억 원도 전액 삭감되었고, 541억 원이었던 방학 중 결식아동급식 지원 예산은 내년도 예산안에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7)

반면에 예산안 강행 처리 막판 증액 심사과정에서는 4600여억 원의 예산이 밀어 넣어졌는데, 이 예산은 한나라당이 막판 증액 심사과정에서 증액을 요청한 사업 151개에서 증액된 4613억이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계수조정의원 중 한 명인 김광림 의원이 총대를 메고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의 지역구인 포항 관련 사업을 증액시켰다. 김 의원은 포항~삼척 철도와 울산 복선전철과 관련, 신규로 2000억 원 씩 요청해 각각 700억 원과 520억 원을 따내는 등 4건에서 1340건을 증액시켰다. 그는 이 4건을 제외하고 그의 지역구인 안동 관련 예산으로 6건 285억 원을 따냈다. 그 외에도 권성동 의원이 지역구인 강릉 예산 11건 170억 원을 따냈고 이주영 예결위원장이 지역구인 마산 관련 사업 6건을 직접 요청해 대법원 마산지원 증축 예산 72억 원 등 187억 원의 증액을 끌어냈다. 또한 경납 합천 출신인 강만수 위원장의 요청으로 고현·하동IC 확장·포장 사업 등 경남 예산 5건 82억 원이 증액되기도 했다. 이처럼 한나라당 계수조정수위는 위원들이 각각 각자의 지역을 맡는 방식으로 예산을 따내, 결국 영남지역 예산 증액이 전체 증액 예산의 66.8%를 차지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8) 게다가 증액된 예산중에는 뉴욕에 한식 식당을 건설하기 위해 배정된 예산 50억도 있다. 이 예산은 김윤옥 여사가 주도하는 한식 세계화 사업의 일환으로 배정된 것으로, 이 사업을 맡고 있는 한식재단은 정운천 전 농·식품부 장관이 이사장으로 있다. 이 예산은 국회 예결위에서 보류가 결정 났으나 기습 단독처리 과정에서 그대로 통과 되었다.9) (이번 예산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진보신당 정책브리핑 참조 : http://www.newjinbo.org/xe/bd_news_comment/933835)

이번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 ‘국민의 대표’ 국회의원들은 서민들을 위한 복지관련 예산을 대거 삭감하고, 권력의 실세들이 관련된 예산은 증액하는 노골적인 사익 추구를 보여주었다. 공적 자원을 사적으로 전유하는 이러한 행태를 눈감고 지나가야 하는 것, 대부분이 이런 마당에 이런 짓을 하지 않는 ‘엄청난’ 도덕성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 한국의 대의제가 처한 현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반대로 민중이 스스로의 의지와 결정에 따라 통치한다는 의미에 충실한 ‘민주주의’만이 우리에게 밥을 먹여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김문수 지사의 말과는 달리 민주주의는 밥도 먹여줄 수 있을뿐더러, 예방 접종도 하게 해주고, 대학 등록금도 낼 수 있게 해준다.

각주

1) “김문수, 서울법대생 질문공세에 진땀”, 연합뉴스, 2010.11.02.
2) 김문수 지사에게 민주주의에 입각한 박정희 비판을 제시했던 학생의 질문이, 그리고 이 질문에 공감하고 김 지사와 설전을 벌인 강연회의 학생들이 이러한 여론을 대표한다. 한국 보수우익의 ‘민주주의가 밥을 주진 않는다.’는 논리는 사실상 박정희를 좋게 평가하기 위해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3) 이극찬,『정치학』, pp.109-111.
4) 이상의 내용은 퀜틴 스키너의『자유주의 이전의 자유』를 요약한 나의 블로그 글(http://blog.aladin.co.kr/jobonzwa/3891938)을 재인용한 것이다.
5) 이 글 안에서 나는 의식적으로 ‘민중’과 ‘시민’의 용어를 구별해서 사용하고 있다. 민중들이 그 의지와 이익이 아직 민주주의 제도에 의해 집(集)화되어 나타나기 이전의, 복잡한 운동 영역에서 나타나는 주체들이라면 시민이란 민주주의 제도와 시스템을 통해 자신들을 대변할 정치인들과 정당을 통해 자신들의 의지를 집화하여 드러낼 수 있는 주체들이다. ‘좀 더 민주적인’, ‘좀 더 뛰어난 정당정치’, ‘좀 더 완벽한 대의제’를 희망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 최장집 교수의 저서 제목이 이러한 이분법을 대표한다.:『민중에서 시민으로』(최장집, 돌베개, 2009.)
6) “날치기 통과 때문에···등록금 예산도 대폭 삭감”, 뉴시스, 2010.12.12, “속속 드러나는 ‘날치기’ 후유증, 어디까지?”, 프레시안, 2010.12.12.
7) 홍희경, 안석, “[여야, 예산안 난투극 처리 이럴려고···] 아이들 볼모로···영·유아 예방 접종비 400억 전액 삭감”, 서울신문, 2010.12.10.
8) 김진우, 이인숙, “형님 예산·강만수 예산… 막판 4600억 밀어 넣었다”, 경향신문, 2010.12.11.
9) 김하영, “뉴욕 한복판에 나랏돈으로 한식당?···점점 커지는 날치기 후폭풍”, 프레시안, 2010.12.12.

<한겨레 훅>에 기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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