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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글/한겨레 hook

지속가능한 복지국가의 조건

복지’가 시대정신이긴 시대정신인 모양이다. 최근 ‘복지’를 둘러싼 정치권과 시민사회 내의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2009년 지방선거 당시의 ‘무상급식’ 의제로 본격적으로 막이 오른 복지논쟁은 2012년 총선과 대선의 핵심 이슈가 될 듯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신년 연설에서 “한정된 국가재정으로 무차별적 시혜를 베풀고 환심을 사려는 복지 포퓰리즘은 문제의 해결책이 결코 아니다.”라며 보수 세력이 감세와 작은 정부, 시장주의를 추구한다는 점을 확실히 했고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문수 경기도지사 역시 야권이 주장하는 각종 복지제도의 확충을 ‘포퓰리즘’이라며 공격에 나섰다. 한나라당 역시 포퓰리즘 논란에 가세했고, 최근에는 민주당의 복지정책에 대해 노무현 정부를 공격하는 데 사용했던 ‘세금폭탄’론과 색깔론까지 이용해 대응하고 있다. 복지국가에 대한 한나라당의 공격과는 약간 다르게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박근혜 의원은 ‘한국형 복지’를 내걸고 이슈 선점에 속도를 붙이고 있다. 야권의 입장에서 ‘복지 담론’은 야권 전반을 아우르는 우산이자 연대의 근거가 되었다. 민주당은 작년 10월 전당대회에서 강령에 ‘보편적 복지’라는 문구를 넣을 것을 결정했고, 1월 6일에는 실질적 무상의료 정책을 당론으로 확정한 데 이어 13일에는 저출산 극복을 위한 무상보육과 대학생 반값 등록금 정책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역시 각자 자신들의 복지정책을 이미 내놓았으며, 복지국가담론을 주도해 온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등의 시민사회단체들은 야권의 정치세력들이 ‘복지국가동맹’을 결성하여 하나로 뭉쳐 2012년에 정권을 갈아치우자고 주장하고 있다.

민주당이 매우 급진적으로(?) 좌클릭을 하는 바람에 떨떠름해진 것은 그동안 민주당과 거리를 두며 복지국가담론을 전유해왔던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등의 ‘진보정당’들이다. 진보정당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밀어붙였으며, 복지제도를 확충했다 해도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보편적 복지’가 아니라 ‘시혜적 복지’ 혹은 유시민 참여정책연구원장이 주창하는 것과 같은 ‘사회투자국가’ 수준에 머물렀다며 자신들과 민주당 및 국민 참여당 등 과거 집권세력과의 차별화를 시도해왔다.1)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한나라당이 민주당의 복지정책을 ‘포퓰리즘’이라고 공격하는 것처럼 노무현 정부 시절에 열린 우리당은 민주노동당의 부유세를 비롯한 복지정책을 ‘포퓰리즘’이라고 공격했다.) 그러나 민주당이 보편적 복지를 수용하고 내세우자 진보정당과 민주당 사이의 차별점이 없어져 버렸다. 차별점이 없어져 버림으로써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각 당이 독자적으로 생존할 명분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MB심판의 대의 앞에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2) 민주당과 국민 참여당을 포함한 반MB진보대연합에 동참할 것을 요구받게 된다. 두 당의 차별점이 줄어들수록 당 내의 독자파들은 국민적 열망이라는 대의 앞에 자신들의 주장을 계속 이어나가기 힘들어질 것이다. 보편적 복지국가(혹은 역동적 복기국가) 담론을 주도해 온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 등의 시민사회 인사들과 민주당 내에서 보편적 복지국가 담론을 주도해 온 이인영, 정동영, 천정배 의원 등이 동시에 가장 확고한 ‘통합론’자들이라는 점이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진보정당들이 취할 수 있는 차별점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증세’문제이다. 민주당은 아직 보편적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증세’를 공식적인 당론으로 정하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당 내부에서 일고 있는 증세를 통한 복지 시리즈 재원 마련 움직임에 대해 17일 서울 관악에서 열린 100이리 희망 대장정 시민토론 마당에서 “가장 쉬운 것은 세금을 때려서 하는 것이지만 세금을 낸다고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밝혔다. 그는 이어 “세금을 무조건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세수와 세출) 제도를 정착시키고 보완하면 2015년까지는 특별한 증세 없이도 민주당이 제시한 복지정책을 실천해 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는데, 즉 민주당의 (주류라 불리는) 대다수는 아직 복지국가를 위해 증세를 하기보다는 MB정부 시절에 낭비한 토건 예산을 아끼거나(4대강 예산은 22조나 된다!) 부자 감세를 철회하는 방식으로 재원 마련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이는 여당 시절에 겪었던 한나라당의 ‘세금폭탄’론 공격을 피해 나가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진보정당은 이와 달리 복지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증세가 불가피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는 12일 신년기자회견에서 “복지재원 마련을 위한 정책방안이 진짜복지-가짜복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한 데 이어,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2015년까지 증세 없이 세원관리 지출구조 개선으로 복지재원을 마련하겠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비판했다.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도 한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서 “재원확보 없는 복지확대는 거짓말”이라고 지적했다. 표면적으로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겨냥한 말이나 민주당도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그러나 조승수 대표의 말대로 과연 증세로 진보정당과 민주당의 차이점이 드러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만일 민주당이 ‘증세’를 주장하면 어쩔 텐가? 실제로 민주당 내에서는 세입세출 구조의 개혁 등 복지를 위한 증세 논쟁이 시작될 기세이다. 정동영 최고위원은 민주노동당의 정책이기도 했던 부유세를 들고 나왔다. 그는 16일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보편적 복지가 구호에 머물지 않으려면 확실한 재원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며 “세금 신설이나 증세문제를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한 데 이어,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는 보편적 복지에 드는 재정수요를 부자감세 철회, 비과세감면축소, 낭비성 토목예산 전환, 세입 세출구조 개혁 등을 통해서만은 해결할 수 없기에 증세는 필수적이며, 시행하는 데 최소 3-5년이 걸리는 부유세 말고도 법만 만들면 당장 시행할 수 있는 사회복지목적세(조승수 대표가 제안하기도 했던)를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누진적 소득세와 법인세 강화(즉 근로소득과 사업소득)를 통해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토지+자유연구소 등을 중심으로 토지 불로소득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즉 증세에 대해서는 진보정당 외의 야권연대 세력들도 이미 깊은 고려를 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차별점은 ‘진정성’이다. 즉 “말로는 한나라당도 복지한다!”이다. 실제로 한나라당의 대선공약은 어떤 복지세력 못지않았다. 소득하위 70%까지의 무상보육은 물론 대학생 반값 등록금 공약까지 있었다. 민주당 역시 자신들이 내세운 복지공약을 실제로 할 생각이 있느냐는 반문이 나올 수 있다. 민주당은 현재 야당이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고, 이전 정권 때처럼 신자유주의 개혁을 계속 밀어 붙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성 싸움’은 진보정당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정동영은 지난 정권에서 신자유주의를 추진하고 정책적 실패를 통해 한나라당에게 정권을 넘겨준 것을 반성하는 반성문까지 썼는데(http://cdy21.tistory.com/598), 반성하고 다시 믿어달라는 사람들 앞에서 진정성을 계속 이야기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유권자들은 ‘실제로’ 집권 가능성과 능력 있다고 여겨지는 세력에게 표를 주는 경향이 강하고,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서는 ‘미워도 민주당’이 유일한 대안이 되는 이상, 이들을 용서(?)하고 연대하자는 ‘대의’를 거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진정성 문제를 ‘너희가 못했잖아!’에서 더 밀고 나가서, ‘왜 못했는지’를 묻게 되면, 진보정당과 민주당 사이의 차별점이 드러나게 된다. 진보신당의 ‘사회연대국가’를 예로 들어보자. 장석준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기획실장의 말에 따르면, 이 ‘사회연대국가’라는 말에 민주당 등 다른 복지국가 담론과 구별되는 진보신당의 복지국가 지향이 담겨 있다고 한다. 20세기 중반 복지국가 전성기에 복지국가를 구성한 요소 중에는 사회보험, 공공 의료, 공공 교육 외에 다른 중요한 것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완전고용’이다. 한 세대 전 자본주의 중심부에서는 대다수 경제활동인구에게 정규직 일자리를 제공했고 그 결과 대부분의 가정이 이 정규직 일자리를 통해 안정된 소득을 얻을 수 있었으며, 국가 복지 정책은 이러한 소득 확보 방식을 보조해 주는 구실을 했다. 그러나 한국은 임금노동자의 대다수가 비정규직으로 불안정 노동에 시달리고 있으며, 정규직 노동자들 역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장시간 노동도 불사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가 일부 소득 이전 정책을 쓴다 해도 삶의 질이 나아지기는 힘들다. 따라서 복지국가가 결국 파이의 성장만으로 이룰 수 없는 ‘삶의 질 향상’과 대다수 노동자 서민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한국의 경우 ‘불안정노동’을 해결하기 위한 노동 연대가 이루어져야 한다.3)

이 ‘노동연대’는 단순히 진정한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만은 아니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대자본과 보수 기득권 세력의 엄청난 저항과 반격이 예상된다. 정당, 언론, 민간연구소들이 합작하여 색깔론과 포퓰리즘, 경제성장론, 복지국가 실패론 등을 이용하여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엄청난 투쟁을 실시할 것이다. 정말로 복지국가를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복지국가를 지지하는 ‘세력’을 만들어야 한다. 이는 민주당이 집권여당 시절에 밀어붙인 신자유주의 개혁과도 연관된다.

 

왜 진보적이고 개혁적이라는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노동자, 서민의 이익이 아니라 대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였는가?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선 전에 쌀 개방 안 한다고 했다가 당선되고 난 뒤 우루과이라운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구조조정 안 한다고 했다가 당선 이후 강력한 구조조정을 추진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열린 우리당은 부동산 분양원가 공개를 약속했다가 슬그머니 자신의 입장을 철회했다. 이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미쳐서 이런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그들의 지지기반은 원래 중산층 이상이었고, 그들은 원래부터 그럴 운명이었다.”는 견해와 “그들이 개혁을 추진하고싶어도 자신들의 세력이 없고 기득권 관료와 이익집단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자신들의 주장이 옳은 것처럼 밀고 나갔기 때문에(노무현이 정책을 결정할 때 제일 많이 참조한 건 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였다!) 결국 그것이 옳다고 믿게 된 것이다.”라는 견해가 병존한다. 그러나 개혁적 대통령들이 왜 그들의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는 두 가지 견해에서 공통적으로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개혁은 대통령과 국회의원, 장관 몇 명 바뀐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보가 ‘집권’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진보의 집권과 정책을 지지할 ‘조직화된 세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면 집권한다 한들 실망만 안겨주고, 결국 정권을 다시 넘겨주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연대’는 불안정노동을 제거한다는 점 뿐 아니라 복지국가를 지지할 세력을 조직화한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복지국가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 중요한 것은, 정치세력들끼리 선거연합을 하여 선거에서 승리하고 집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집권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우군들의 세를 늘리고 조직화하는 데 있다. 복지국가의 맛을 본 시민들이 계속 복지국가를 지지해 줄 것이란 생각은 매우 안일하다. 한국의 기득권 세력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각주

1) 보편적 복지, 시혜적 복지, 사회 투자 국가를 구별하면 다음과 같다. 시혜적 복지란 신자유주의자들과 보수 세력도 주장하는 복지로, 복지를 경쟁에서 탈락한 이들을 구제하는 지원으로 여기는 것이다. 즉 경제와 복지를 구별하는 것이다. 반면에 보편적 복지는 복지를 기본권으로 파악한다. 가난한 아이들에게만 급식비를 지원하는 것이 전형적인 시혜적 복지(혹은 선별적 복지)이고, 그런 것과 관련 없이 밥 먹는 건 기본권이기 때문에 부자와 빈자를 가리지 않고 급식은 무상으로 제공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보편적 복지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역동적 복지국가란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등에서 제시한 일종의 비전으로, ‘신자유주의 모델’과 같은 ‘국가 발전방향’ 혹은 ‘국가 모델’이며 보편적 복지를 그 핵심내용으로 한다. 마지막으로 사회투자국가란 80년대 이후 자본주의의 수익성 위기로 전통적인 복지국가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자 영국 노동당이 복지국가를 소생시킬 제3의 길로 제시한 모델이다. 이 모델에서 복지란 수익을 낳고, 경제성장과 효율성에 기여할 때만 의미를 지닌다. 사회투자국가론은 교육 복지를 ‘인적 자원에 대한 투자’라는 명목으로 정당화하며, 결과의 평등보다는 기회의 평등에 초점을 맞춘다.
2) 여기서 사회당을 제외한 이유는 사회당의 복지정책에 대해 필자가 다소 무지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진보양당의 보편적 복지 국가와 사회당의 복지정책인, 공화주의에 바탕을 둔 ‘기본소득’론은 확실히 구별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론과 보편적 복지국가의 차이점과 유사점에 대해서는 바바라 베르그만,「스웨덴식 복지국가와 기본소득 : 무엇이 우선인가?」,『분배의 재구성』과 필자가 예전에 레디앙에 투고했던 글 “기본소득은 좌파적인가?”(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20285)를 참조하라.
3)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장석준, “노동연대로 완전고용 이루는 복지국가 지향”, 한겨레 참조

참고자료

남기업, “복지 논쟁의 핵심은 불로소득 환수!”, 프레시안, 2011.01.19.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10118181147&section=02)
박세열, “김용갑, 무상복지? 조선노동당 2중대”, 프레시안, 2011.01.18.(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10118095613&section=01)
박세열, “복지국가 단일정당 못 만들면 한나라당에 필패한다”, 프레시안, 2011.01.11.(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10110150717&Section=01)
송호균, “작은 차이 때문에 ‘MB 후예’의 재집권을 용인할 텐가?”, 프레시안, 2011.01.14.
(http://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10113093838&section=01)
여정민, “증세 없는 보편적 복지는 허구다.”, 프레시안, 2011.01.18.(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10113163823&section=01)
장석준, “노동연대로 완전고용 이루는 복지국가 지향”, 한겨레, 2010.09.26.(http://education.hani.com/arti/SERIES/255/440932.html)
정상근, “원조복지 구멍가게, 진보가 답답해?”, 레디앙, 2011.01.17.(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21288)


<한겨레 훅>에 기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