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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적게 할수록 유리한 박근혜 침묵의 정치

말을 적게 할수록 유리한 박근혜 침묵의 정치
정치평론가인양 ‘유체이탈’ 화법… 조급함 드러내고 표현만 거칠어져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가 17-18대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에 대해 정보공개청구를 한 적이 있다. 그 중 단연 돋보인 인물이 있었다. 17-18대, 8년 동안 국회 본회의장에서 단 4번 밖에 발언하지 않은 의원. 이 의원은 본회의와 상임위원회를 통틀어 단 28번의 발언을 했다.

이 의원이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다. ‘말하는 직업’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치인은 쟁점에 대해 자기주장을 내세우며 언론의 주목을 받거나, 입장을 밝히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의원시절부터 예외였다. 언론은 말없는 박근혜 의원을 따라다니다 한 마디 해주면 대서특필하며 그의 의중을 해석했다. 가볍고 솔직한 언사로 언론의 질타를 받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정반대 유형의 정치인이었다.  

말하지 않는 대통령, 답답한 기자들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에겐 늘 ‘불통’ 논란이 따라다닌다. 박 대통령은 논란이 일면 한참 지나서야 한 마디 하는 방식의 ‘침묵 정치’를 반복했다. 2013년 초 본격화된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이 대표 사례다. 박 대통령은 2013년 10월 31일이 돼서야 “국민들께 정확히 밝히고 책임을 물을 것이 있다면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공방이 이어지던 몇 개월 동안 침묵하다 뒤늦게 입장을 밝힌 것이다.

기자회견 횟수만 봐도 알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취임 후 1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대국민담화나 수석비서관 회의 등을 통해 일방적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한 적은 여러 차례 있었으나 기자들과 질문을 주고받은 기자회견은 2014년 신년 기자회견, 2015년 신년 기자회견이 전부였다. 전임 대통령들이 했던 ‘국민과의 대화’ 같은 프로그램도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비교하면 박 대통령의 스타일이 잘 드러난다. 노 전 대통령은 국민과의 대화는 물론 대학교를 방문해 학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했고, 담화문, 성명서, 기자회견은 물론 ‘국민께 드리는 글’ 등 편지 형식까지 사용했다. 

노 전 대통령은 ‘검찰과의 대화’ 등 이해당사자나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과의 토론까지 펼쳤다. 2007년 노무현 정부 평가를 둘러싸고 진보논객들 간의 논쟁이 벌어지자 노 전 대통령은 손수 글을 써서 논쟁에 끼어들었다. 퇴임 후인 2008년 11월 노 전 대통령은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에 글을 올려 심상정 당시 진보신당 대표와 한미 FTA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반면 박 대통령은 질의응답을 주고받은 신년 기자회견마저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2014년 기자회견의 경우 사전에 질문할 언론사가 정해진 것은 물론 질문지까지 청와대에 미리 전해졌다. 대통령이 모두 발언에서 언급한 ‘소회’를 되묻거나 “퇴근 후 뭐하나”라는 한가한 질문을 던진 기자들은 비난을 받았다. 2015년 기자회견의 경우 이런 비판을 의식한 듯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려 했으나 박 대통령이 정윤회 문건 파동으로 제기된 인적쇄신 요구를 모두 거부하면서 ‘불통’이라는 비판은 더욱 거세졌다. 

청와대 출입기자들도 박 대통령과 청와대가 기자들과 접촉면이 적다고 느끼고 있다. 청와대를 출입하는 A기자는 8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청와대 참모들에게 질문을 하는데 이들이 재량권을 가지고 말 할 수 있는 부분이 매우 제한돼 있다.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해도 추가 답변을 하지 않는다”며 “취재가 어렵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물어보지 않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실제로 기자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직접 만날 기회는 거의 없다. 복수의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지난달 16일 남미 순방 당시 비행기 안에서도 대통령과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고, 기자회견이 필요할 것 같은 시기에도 기자들 앞에 나서지 않는다고 전했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 기자들과 자주 만나며 즉석에서 질문을 받았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노 전 대통령이 논쟁을 즐기는 스타일이었던 반면 박 대통령은 기자들과 대화를 주고받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대변인이나 홍보수석이 바뀌더라도 취재환경이 나아지길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분위기다. 상대적으로 보수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온 보수언론도 마찬가지다. A기자는 “보수언론에서도 최근 청와대발 기사가 잘 나오지 않고 있다”며 “청와대가 정보를 특정 언론에 미리 흘려서 여론을 파악하는 식의 행동도 잘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청와대를 출입했던 B기자는 “박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정책 아이디어를 미리 알렸다가 혹시나 정책이 수정되는 것을 ‘혼란’이라고 판단해 질타하는 분위기”라며 “완전히 결정된 정책만 통보하고 설명하는 것을 홍보라고 인식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즉 박 대통령의 캐릭터가 이전 정부들과 차이를 만들어냈다는 분석이다.

취재환경이 이명박 정부 때보다 나빠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A기자는 “최근 홍보수석 중 가장 힘 있었던 수석은 이동관 전 수석이었다”며 “현 정부에서는 홍보수석 역할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것 같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지도 않다”고 말했다. 

청와대 대변인과 홍보수석이 모두 언론인 출신이지만 소통이 강화되는 분위기는 아니다. B기자는 “이정현 홍보수석의 경우 그래도 박 대통령의 의중을 알았지만 민경욱 대변인, 김성우 홍보수석은 언론인 출신일 뿐 청와대 내부 사정도 잘 모르는 것 같다”며 “김 수석도 임명초기에 기자들과 접촉을 늘리겠다고 했는데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불통 덕에 잘못된 관행이 고쳐지기도 했다. 인사가 있기 전 무분별한 예상기사가 줄었다. 백그라운드 브리핑을 통해 참모들이 인사 관련 정보를 주고 기자들도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이를 이용해 추측 기사를 쏟아냈지만 소통이 없으니 근거 없이 누군지 맞추려는 시도를 하다 오보를 내는 경우가 줄어든 것이다. 기자들이 무기력해지면서 의도치 않게 벌어진 일이다.

박근혜의 ‘간결 화법’과 침묵의 정치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은 침묵 정치에 기인한다. 박근혜 의원은 침묵을 통해 정치를 한다. 박 대통령은 8년 동안 본회의장에서 단 4번 연설했는데, 이 중 세 번은 교섭단체 대표연설이었고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연설은 딱 한 번이었다. 그것이 ‘세종시 수정안’ 관련 연설이다. 침묵을 지키던 그가 입을 열자 이명박 대통령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말만 번지르르 하게 늘어놓는 정치인들보다 말 한 마디에 무게가 실린 그를 신뢰한다. 

박 대통령의 화법은 매우 간결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방에는 별일 없나”라고 물었다거나 유세 중 테러를 당한 뒤 “(다음 유세 장소인) 대전은요?”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2008년 총선에서 친박계가 소위 ‘공천 학살’을 당하자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대응했다. 한나라당 대표시절이던 2007년 1월 노무현 대통령이 개헌을 제안하자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비판했다. 이 말들은 ‘박근혜 어록’으로 회자된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 소장은 “박 대통령은 말할 때도 대답할 때도 짧게 끊어서 말하는 화법을 쓴다. 이런 화법의 강점은 메시지가 강하게 전달된다는 것”이라며 “임팩트가 강할뿐더러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말에 권위가 실린다”고 설명했다. 최 소장은 “과거 중국이나 유럽 황제들도 일부러 말을 적게 하고 나머지는 신하들이 알아서 하게 했다”며 “박 대통령의 화법이 리더십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덧붙였다.

이런 화법의 단점은 메시지를 던지는 데 유리하지만 소통에 불리하다는 것이다. 최 소장은 “이런 화법은 대통령이 된 이후 국민들과 교감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취약점을 드러낼 수 있다”며 “기자회견을 하거나 여야 대표들하고 회의하는 모습을 보면 박 대통령 본인이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던지고, 멈춰서 듣고, 다시 말하는 식이다. 대화가 이어지는 게 아니라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이 따로 논다”고 지적했다. 

최 소장은 “박 대통령에게 원래부터 이런 점이 부족했는데 취임 이후에도 전혀 보완이 안 되고 있다. 주변에 이런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연설문을 담당했던 강원국 전 청와대 비서관은 “간결한 화법은 한편으로 메시지를 명쾌하게 전달하는 장점이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효과도 있다”고 설명했다. 해석의 다양성을 남긴다는 것. 강 전 비서관은 “논란이 생기면 ‘그런 뜻이 아니다’고 하면 그만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배경과 맥락, 본인의 생각까지 넣어서 상세히 설명하다보니 하나하나 올무가 되고 꼬투리를 잡히곤 했다”고 말했다.

네 탓이오 네 탓이오, 유체이탈 화법으로 위기관리

침묵의 정치는 ‘유체이탈 화법’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을 아끼기 때문에 정치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대선 기간 때 박 대통령은 동생 박지만씨의 비리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박 대통령은 “동생이 아니라면 아닌 거겠죠”라고 대꾸했다. 박 대통령이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로웠던 이유다. 민간인 불법사찰 논란이 일자 박 대통령은 “나도 사찰 당했다”고 대응했다. 

박 대통령은 2012년 12월 16일 열린 대선후보 TV토론에서 비슷한 태도를 취했다. 문재인 후보가 “이명박 정부가 오랜 성과를 까먹었다. 그 때 박 후보는 무엇을 했나”고 묻자 박근혜 후보는 “그래서 내가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것 아닌가”라고 답했다. 문 후보가 반값등록금과 원전 수명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도 박 후보는 “대통령이 되면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유체이탈 화법은 이어졌다. 성완종 리스트에 연루돼 이완구 전 총리가 물러나자 박 대통령은 “안타깝고, 총리의 고뇌를 느낀다”는 입장을 밝혔다. 인사권자로서의 사과는 없었다. 2013년 5월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논란이 일었을 때도 인사권자인 박 대통령은 사과하지 않았다. 이남기 당시 홍보수석이 사과를 했고, 비판이 커지자 허태열 당시 비서실장이 사과했다. 

논란이 이어지자 그제야 박 대통령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직접 사과했다. 그러나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관련 수석들도 모두 책임져야 할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다음날인 4월 17일 실종자 가족들을 찾아 “여러분들과 얘기한 게 지켜지지 않으면 여기 있는 사람 다 책임지고 물러나야 된다”고 말했다. 책임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34일 만에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눈물을 보이며 “사고에 대처하지 못한 최종 책임은 대통령인 저에게 있다”고 책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후에 내놓은 대책은 유체이탈의 연속이었다. ‘적폐해소’의 대상은 공무원 사회였고, ‘해체’ 대상은 해경이었다.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유가족의 단식농성이 이어지자 “여야가 합의할 사안”이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이 터졌을 때도 “찌라시에 나라가 흔들리다니 부끄러운 일”이라고 남 탓을 했다. 

유체이탈 화법이 이어지다 보니 누리꾼들은 박 대통령을 두고 ‘대통령이 아니라 정치평론가’라고 조롱하곤 한다. 강원국 전 비서관은 “박 대통령의 말에는 자신이 빠져 있다. 대통령은 책임지는 자리인데 박 대통령은 책임을 묻는 자리인 줄 아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암 덩어리·쳐부술 원수, 내용 없으니 표현만 거칠어져

이런 박 대통령에게 한 가지 화법이 추가됐다.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인상적이면서 자극적인 표현을 쓰는 것이다. 규제개혁을 강조하는 자리에서 이런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진돗개는 한 번 물면 살점이 완전 뜯겨나갈 때까지 안 놓는다. 진돗개 정신으로 해야 한다”,“규제는 쳐부술 원수이자 암 덩어리”, “규제를 한꺼번에 단두대에 올려 처리”.  

이런 화법을 두고 별다른 내용이 없으니 표현만 자극적으로 변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 대통령은 2014년 신년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을 외쳤으나 남북관계에는 변화가 없다. 뉴스타파가 2014년과 2015년 기자회견을 비교한 결과도 비슷했다. 박 대통령은 두 번의 기자회견에서 잠재성장률 4%, 고용률 70%, 국민소득 4만 달러라는 목표를 그대로 반복 주장했다. 17개 창조개혁 혁신센터 설치,

친환경 에너지타운, 유라시아 철도, ICT 융합 등 내세운 정책도 똑같았다. 강원국 전 비서관은 “자극적인 용어를 자주 쓰는 것은 조급함의 표현이다. 자극적인 언사는 더 큰 자극을 불러온다. 다음에는 더 센 걸 써야 먹히기 때문”이라며 “결국 그러다 메시지 자체가 설득력을 잃게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