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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킹도 합병도 아무데나 ‘국익’ 타령

해킹도 합병도 아무데나 ‘국익’ 타령

[뉴스분석] 해킹 의혹제기하면 국익에 어긋나?… 특정 집단의 요구를 전체 국민의 이해관계로 포장

감히 반박하기 어려운 몇 가지 단어들이 있다. ‘국익’도 그런 단어 중 하나다. 최근 언론의 정치사회면과 경제면에 국익이라는 단어가 동시에 등장했다. 국정원 해킹과 삼성물산-제일모직의 합병. 두 사건 모두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됐다.

국정원이 이탈리아 해킹업체 ‘해킹팀’으로부터 스파이웨어 프로그램을 구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정원이 이를 국내 반정부 인사나 민간인사찰에 이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혹 대한 국정원의 태도는 일관됐다. 해킹 프로그램 구입은 ‘국익’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국정원은 지난 17일 보도자료를 내고 “국정원은 ‘국민의 국정원’이다. 여당의 국정원도, 야당의 국정원도 아니다.”며 “국정원이 왜 무엇 때문에 우리 국민을 사찰하겠나.”라고 반문했다. 국정원은 또한 “우리의 안보현실은 엄혹하기 그지없다. 국정원은 그런 안보현실을 다루는 제1의 방위선”이라며 “그런 소중한 업무를 수행하는 국정원을 근거 없는 의혹으로 매도하는 무책임한 논란은 우리 안보를 약화시키는 자해행위”이라고 비판했다.

국정원은 해킹을 국익을 위한 행동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이에 대한 의혹제기 자체를 국익을 부정하는 행위로 만들었다. 여당도 이를 거들며 야당의 의혹제기를 비난했다. 

“야당도 국익과 국가안보를 위해서 더 이상의 불필요한 정쟁몰이는 멈추길 바란다”(7월 16일 신의진 새누리당 대변인)
“야당은 국익과 국가안보를 위해서 당리당략적 정쟁을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7월 16일 김정훈 새누리당 정책위의장)
“새정치연합은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정치공세를 지양하고 진정 국민과 국익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주기 바란다”(7월 17일 김영우 새누리당 수석대변인)

그러나 국정원이 국내사찰을 했다는 의혹을 ‘정쟁’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국정원은 해킹팀에게 카카오톡, 라인, 바이버 등 국내에서 사용되는 메신저들과 국내용 안드로이드 폰의 해킹 여부를 문의했다. 게다가 떡볶이맛집, 금천구 벚꽃축제 등의 내용이 담긴 네이버 블로그 포스팅을 피싱 URL로 이용했다. 

게다가 재미 과학자인 안수명 박사에게 ‘서울대 공과대학 동창회 명단’과 미디어오늘 기자를 사칭한 이메일까지 보내 그의 컴퓨터에 스파이웨어까지 심으려 한 정황도 드러났다. 게다가 새정치민주연합 국민정보지키기위원회 진상조사소위원장인 신경민 의원이 19일 배포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해킹팀이 해킹을 시도한 국내 IP 주소 중 KBS와 KT, 다음카카오 등 방송사와 통신사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련기사 : <국정원이 국회에서 한 여섯 가지 거짓말>

이처럼 국내사찰용이라는 의혹과 정황은 늘어만 가는데 국정원은 제대로 된 해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국정원과 여당은 의혹제기 자체가 국익을 해치는 행동이라는 식으로 대응한다. 

정당한 문제제기가 ‘국익을 해치는 행위’로 포장되는 경우는 또 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삼성과 몇몇 언론이 보여준 ‘국익 프레임’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두고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반대 의사를 표명하자, 언론은 이 사안을 ‘투기자본이 국내기업의 경영권 위협’으로 규정했다.

지난 7일 중앙일보 이철호 논설위원은 칼럼에서 “엘리엇 같은 악질 투기꾼들에게 꼼짝 없이 당하는 걸 보면 솔직히 겁도 난다.”는 자산 3조원대 한 오너의 말을 전하며 “엘리엇은 지금 삼성을 넘어 한국 전체를 물어뜯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권혁세 전 금융감독원 원장은 같은 날 한겨레 칼럼에서 “엘리엇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경우 앞으로 한국 대표 기업에 대한 헤지펀드의 공격이 더 빈번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강조했다. 

그 외에도 언론은 “먹튀 투기자본에 국내 기업 희생양 안 된다”(7월 1일 아시아투데이) “한국 대기업, 헤지펀드 막을 막강 방패 없다”(8일 중앙일보) “삼성-엘리엇 전면전 속 금감원 ‘강건너 불구경’”(매일경제 9일자) 등의 기사를 내보내며 삼성과 엘리엇의 대결을 ‘국익’ 프레임으로 치환시켰다. 조선일보는 9일부터 ‘투기자본에 흔들리는 한국’ 기획 시리즈를 내보냈다.

이러한 언론들은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자들이 삼성 편을 들어야 한다며 노골적으로 압박하기도 했다. 삼성물산의 합병 관련 홈페이지에는 거대한 태극기가 걸렸다. 이에 엘리엇이 2002년 월드컵 당시 상암경기장 앞에서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은 폴 싱어 회장 사진을 공개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물론 엘리엇은 투기자본이다. 하지만 합병 과정이 공정하지 않았다는, 주주로서 할 수 있는 문제제기를 ‘국익 프레임’에 맞춰 투기자본의 침략 정도로 규정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관련기사 ① : <살려야 한다… 국민연금이 삼성물산을>

관련기사 ② : <합병이 국익? 언론의 억지 이면, 최대 광고주 삼성의 영향력>

나아가 삼성이 두 회사를 합병한 이유는 이재용 체제로의 승계과정을 위한 디딤돌이라고 보는 게 맞다. 이러한 맥락 대신 ‘합병=국익’이라는 단순한 도식이 사용됐다. 조선일보가 합병 결정 다음 날 사설에서 “‘주식회사 대한민국’이 총동원돼 삼성의 후계 체제 안정을 도와준 셈”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는 20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우리는 흔히 ‘국익’이라는 단어를 ‘국가를 구성하는 개개인들의 이해관계의 총합’이라는 뜻이 아니라, ‘국가를 위하여’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자’는 식의 ‘수사’로 사용한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국익’을 수사적으로 사용할 경우의 문제점은 특정 집단 혹은 특정세력의 이해관계를 감춘 채 이들의 이해관계가 마치 국민 전체의 이해관계인 것처럼 묘사하는 효과를 지닌다는 것이다. 노 교수는 “삼성물산 합병만 하더라도 삼성물산 주주이냐 제일모직 주주냐에 따라 이해관계가 다르지 않나. 근데 ‘국익’이라는 논의 하에 이런 세세한 이해관계는 사라진다”고 밝혔다.

국정원이 구입한 해킹프로그램이 반정부 인사를 감시하는 데 사용됐다면 이는 국가나 국민이 아니라 정권의 이해관계에 복무한 것이다. 삼성이 합병을 주도한 이유는 국가로부터 투기자본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이재용 체제로의 전환, 즉 삼성 승계과정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누구를 위한 국익인가’라고 되물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