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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 억지 논리에 “외신 기자들 우롱하나”

교육부 억지 논리에 “외신 기자들 우롱하나”
자료 제시 요청에 “‘동족상잔의 비극’, 남쪽에 책임있는 것처럼 표현”… 이미 반박된 자료 재탕

외신기자 브리핑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근거자료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해 망신을 당했던 교육부가 외신기자들에게 기존 교과서가 편향됐다는 근거자료를 발송했다. 그러나 이미 언론을 통해 반박된 내용을 되풀이하는 수준으로, 외신기자들은 “외신을 우롱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교육부와 국사편찬위원회는 지난 16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외신 기자들을 상대로 ‘역사 교과서 개발체제 개선 관련 브리핑’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교육부는 “현재 교과서가 편향돼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국정화를 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관련기사 : <외신기자들 “국정화는 자유민주주의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

김동원 교육부 학교정책실장은 “일부 교과서에서 6.25 전쟁의 책임이 남한에도 있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북한이 내세우는 ‘주체사상’의 선전 문구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외신기자들은 증거를 요구했다. 보도하려면 자료가 필요하니 어떤 출판사 어떤 교과서에 북한 주장을 그대로 인용한 내용이 있는지 말해달라는 것. 그러나 교육부와 국사편찬위원회는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지 못했고, 외신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지자 “저희들이 교과서를 준비하지 못했다.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한 외신기자는 자료를 메일로 보내달라고 요구했고 교육부는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외신기자들은 닷새 만인 21일 오후 근거자료를 메일로 받았다. 교육부는 외신기자들에게 보낸 자료에서 ‘미래엔’ 교과서 2011년 보급본을 ‘6.25 전쟁의 책임이 남한에도 있는 것처럼 기술’한 사례로 들었다. 미래엔 교과서 342쪽에는 역사학자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가 인용돼 있다.

   
▲ 교육부가 외신 기자들에게 보낸 자료 일부.
 

김성칠은 이 글에서 “남의 장단에 놀아서 동포끼리 서로 살육을 시작한 걸 생각하면 더욱 가슴이 어두워진다”고 말하는데, 미래엔 교과서는 이 글을 인용한 부분 아래에 ‘주제열기’라는 코너에서 “김성칠은 북한의 남침으로 일어난 6.25 전쟁은 ‘남의 장단에 놀아난 동포끼리의 살육’이라고 하면서 가슴 아파하였다. 동족상잔의 비극은 왜,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라고 묻는다.

6.25를 ‘동족상잔의 비극’이라고 말한 부분이 남한의 책임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억지에 가깝다. ‘주제열기’ 코너의 질문에도 분명 “북한의 남침으로 일어난”이라는 표현이 있다. 인용한 김성칠의 글에도 “인민 공화국에서의 끊임없는 남침의 기획과 선전은 이미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고 또 이미 실천을 통하여 분명히 되고 말았으니 더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라는 부분이 나온다.

이 사례는 언론 등을 통해 이미 반박된 것이다. 지난 16일 황교안 국무총리는 대정부질문에서 “어떤 교과서에 6.25 전쟁의 책임이 남북 모두에게 있다고 기술됐느냐”는 도종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질문에 “미래엔 교과서”라고 답했다. 그러자 도 의원은 해당 교과서에 ‘북이 전면 남침해왔다’고 기술된 부분을 보여주며 반박했다.

교육부는 또한 외신기자들에게 보낸 자료에서 2014년 천재교육 교과서, 2011년 지학사 교과서에 ‘김일성 주체사상’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제시하며 “북한이 내세우는 ‘주체사상’의 선전 문구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천재교육 교과서는 ‘김일성 전집’을 인용하고, 지학사 교과서는 김정일의 글을 그대로 인용했다는 것이다.

   
▲ 교육부가 외신 기자들에게 보낸 자료 일부.
 

그러나 두 개 교과서 모두 김일성 주체사상에 대해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지학사 교과서에는 “북한은 주체사상을 강화하여 김일성을 신적인 절대 권력자로 만들었다”고 나와 있다. 천재교육 교과서는 ‘김일성 전집’을 인용한 다음, “김일성의 권력독점 우상화” 등의 표현을 써서 김일성 주체사상을 비판했다.

관련 기사 : <김일성 주체사상’ 소개하는 게 뭐가 문제입니까>

결국 교육부는 ‘자료를 제시하라’는 외신기자들의 요구에 이미 한국 언론 등을 통해 반박된 자료들을 그대로 보낸 셈이다. 한 외신기자는 “외신기자들이 한국 언론도 안 보고 교과서에 대해 잘 모를 거라 생각하고 이런 자료를 보내는 것 같다. ‘우리가 자료를 보냈다’는 책임회피 목적 외에 무슨 의미가 있나”라며 “우롱 당하는 기분”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