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다 이겼지만 국정 교과서는 반드시 진다
[기자수첩] 적극적 지지세력이 없는 싸움… “90%가 좌파”, 없던 적도 만들어 고립 자초
‘이런 의제가 또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정부여당이 추진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직접 진두지휘하고, TF까지 만들어 여론전과 홍보전에 앞장서고 있는데도 여론은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다.
국정화 방침을 발표하기 전에만 해도 여론은 팽팽했다. 리얼미터의 10월 2일자 여론조사는 찬성과 반대가 42대 42였다. 이러한 여론은 며칠 지나지 않아 반대쪽으로 기울었다. 정부여당은 계속 국정화를 밀어붙이지만 반대여론은 더욱 굳어져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지지율이 확고하고 야당은 내부 다툼으로 정신없던 상황에서 정부여당은 자신감을 갖고 밀어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여론이 뒤집혔다. 뭐가 문제였던 걸까.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이 정책을 밀어붙이는 방식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첫째, 이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개혁대상’, 즉 물리쳐야할 대상을 설정한다. 둘째, 이 ‘개혁대상’이 포섭하지 못한 세력을 포섭한다. 셋째, 이 포섭을 개혁대상을 물리치는 동력으로 활용한다. 개혁도 하고 지지층도 넓히는 일석이조의 전략이다.
‘노동개혁’이 대표적인 사례다. 정부여당은 한국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개혁대상으로 정규직노동조합을 설정했다. 최경환 부총리가 말한 ‘정규직 과보호론’이 대표적이다. 그러면서 ‘노동개혁은 청년일자리’라는 도식을 만들어내 한국의 노동조합 운동이 포섭하지 못한 청년 비정규직 계층에 손을 내민다. 그리고 이들의 지지를 동력삼아 노조를 공격한다.
공무원연금개혁도 비슷한 방식을 취했다. 공무원들이 받는 연금이 나라 곳간에 해가 된다고 설정한 뒤 공무원사회를 개혁대상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이 개혁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공무원이 받는 연금이 과도하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의 공무원에 대한 불신과 반감을 동력으로 삼았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견고해보였던 공무원연금에 손을 댄 ‘개혁의 기수’가 된다.
즉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노조 등의 집단을 적으로 상정한 뒤 노조가 포섭하지 못한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을 사용한다. 즉 상대를 고립시키고, 자신의 지지층은 넓힌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이 추진하는 대부분의 정책에는 지지층을 확장할 수 있거나 그 정책으로 이해관계를 보는 집단이 있다. 새정치연합의 한 관계자는 새누리당이 이민정책과 고용허가제 제도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고 “농민층의 지지를 확대하는 데에는 이민정책만큼 좋은 게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는 모습은 새누리당이 그간 보여준 모습과 매우 달랐다. 지지층을 넓히기는커녕 고립을 자초했다. “역사학자 90%가 좌파” “기존 교과서는 모두 좌편향”됐다는 식의 논리가 대표적이다.
새누리당이 ‘좌파’라고 낙인찍은 90%의 역사학자 중 절반 이상은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을 지지하지 않았을까? ‘좌편향’됐다는 현행 교과서의 집필진 중 많은 수가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을 지지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지지율 40%가 넘는 새누리당이 스스로 10%를 자처하며 자신에 반대하지 않던 이들마저 ‘90%의 좌파’로 만들어버렸다.
궁지에 몰리자 새누리당은 “우리 아이들이 김일성 주체사상을 배우고 있다”는 플랜카드를 내걸었다. 대다수 교과서 집필진과 역사 교사들은 졸지에 김일성 주체사상 추종자가 되어버렸다. 이들 중에는 새누리당 지지자가 없었을까?
새누리당은 아마 국정교과서 이슈가 자신들이 ‘종북좌파’ 프레임을 설정하고 밀어붙이고 야당이 이에 반발하는 구도의, 5대 5 이슈가 될 것이라 예상했을 것이다. 여야가 팽팽히 맞서는 5대 5 이슈라면 충성 지지층이 높은 정부여당이 유리하다.
겉으로 보기엔 5대 5 이슈처럼 보이지만 국정교과서는 이해관계를 지닌 ‘강한 반대집단’이 있는 이슈다. 전국의 역사학자들이 모두 집필을 거부하고, 심지어 이명박 정부 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역임한 최광식 고려대 교수마저 집필 거부 선언을 했다. 교육부산하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8명도 공개적으로 반대의사를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반대를 물리치려면 지지층을 넓히는 ‘연대전략’을 썼어야하지만 새누리당은 오히려 “올바른 교과서를 반대하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이정현 최고위원)는 식의 발언도 서슴지 않으며 적을 늘려나갔다.
새누리당은 또한 ‘교과서’ 이슈의 독특한 특징을 고려하지 못했다. 민생이슈가 아니라 사람들이 큰 관심이 없을지 몰라도, 교과서는 모두가 잘 아는 보편적인 이슈다. 학창 시절 학교를 다녔다면 모두 교과서를 한 번쯤 읽어봤을 것이다. 학생을 자녀로 둔 부모세대도 교과서 이슈에 매우 민감하다.
이는 국정교과서가 ‘노동개혁=청년일자리’ 같은 방식의 막연한 구호로 지지층을 확장할 수 있는 이슈가 아니라는 뜻이다. 노동개혁의 결과는 예측하기 힘들고, 따라서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다소 막연한 이야기에도 확고한 반대의사가 없는 사람들은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국정교과서는 다르다. “김일성 주체사상을 무비판적으로 가르친다”는 플랜카드를 본 뒤 충격을 받은 30-40대 부모세대는 이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 금방 검증해볼 수 있다. 자녀에게 교과서를 가져와보라고 하면 그만이다. 현행 교과서를 보고 공부한 20대도 새누리당의 플랜카드가 사실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다.
새누리당은 지난 27일 오전 ‘청년들에게 듣는다. 편향교육이 이뤄지는 위험한 교실’이라는 제목의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한 청년은 “102030 세대가 오염된 세대라고 생각해요. 이미 사고회로가 한 방향으로 형성된 이 세대는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고 김 대표는 “우리가 심히 우려했던, 중고교 교육과정이 왜곡된 역사의식을 심어주고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이 문제(교과서 국정화)를 꼭 관철시켜야겠다”고 답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20대와 30대의 60% 가량이 국정화에 반대하는데도 국정화에 찬성하는 청년들만 불러 이야기를 듣는다.
여론을 수렴해야할 토론회와 세미나, 간담회 자리마저 자기네 편을 불러다 웃고 떠들며 박수치는 걸로 끝난다. 60년대 일본 전공투의
슬로건은 “연대를 구하되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였다. 지금 새누리당은 “연대도 구하지 않은 채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 새누리당이 국정화 여론전에서 실패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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