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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가 반대해? 이사회만 동의하면 강행

노조가 반대해? 이사회만 동의하면 강행

법 위의 취업규칙, 쉬운 해고는 이미 시작… 취업규칙변경 절차 무력화, 공기업 임금피크제 도입이 신호탄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온 국민의 관심이 쏠려 있는 가운데 정부·여당은 노동개악 드라이브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국정화 확정고시 다음날인 지난 4일 새누리당은 ‘5대 노동개혁 입법 토론회’를 열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이 자리에서 “노동개혁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주장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교과서가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가 될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 “집필되지도 않은 교과서를 두고 더 이상 왜곡은 없어야한다”고 했다. 하지만 노동개악에 대해서는 그렇게 반박할 수 없다. 이미 노동개악의 미래가 사회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조 동의 건너뛰고 서면 이사회로 결의

최근 서울대병원이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 없이 임금피크제 도입을 결정한 것이 대표 사례다. 서울대병원은 지난달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기 위한 취업규칙 변경을 시도했고, 동의를 받기 위해 직원을 대상으로 온라인 투표를 실시했다. 투표는 지난달 20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됐다.

취업규칙 변경의 핵심은 간호사와 방사선사, 사무직, 기능직 등 서울대병원의 노동자 6045명에게 임금피크제를 적용하는 것이다. 59세에 임금이 20%, 60세에 30% 깎이는 구조다. 노조는 사측이 투표를 강요했다고 말한다.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서울대병원분회(서울대병원노조)는 지난달 29일 기자회견에서 “휴일에 쉬고 있는 직원 개인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해 임금피크제 투표를 강요하고, 투표하라는 문자를 7일 동안 24통씩 보내며 근무 중에도 환자를 대하는 부서로 전화를 걸어 검사를 지연시키는 등 의료사고 위험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그 러나 정작 투표율은 저조했다. 6045명 중 3177명만 투표에 참석해(투표율 52.56%) 이 중 1728명만 찬성했다. 찬성률이 전체 노동자의 28.59%에 그쳤다. 그렇게 임금피크제 도입은 무산되는 듯 했다. 하지만 서울대병원은 과반수 동의를 얻지 못한 임금피크제를 지난달 29일 이사회 안건으로 올려 통과시켰다. 

서울대병원의 주장은 “임금피크제는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이 아니다”는 것이다. 정년이 2년 연장된 상황에서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20~30% 임금이 깎이는 것은 손해가 아니라는 설명이다. 현재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취업규칙을 바꾸려면 노동자 과반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불리한 방향이 아니니 괜찮다는 논리다. 

노조 측은 “불이익이 아니라면 투표를 부치지 않았어야 한다”면서 “노동조합과 교섭도 하지 않고 강제로 투표를 강행해놓고 부결되니 이제 와서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은 궤변”이라고 반박했다. 노조는 이사회의 취업규칙 도입 의결이 무효라며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오병희 서울대병원장을 고발했다.

서울대병원 외에도 임금피크제로 인한 충돌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경북대병원은 지난달 30일 정년 전 1년 간 직전년도 임금의 72%를 지불하는 임금피크제 안을 마련하고 직원 54.6%의 동의를 거쳐 취업규칙을 변경했다. 하지만 경북대병원 노조는 관리자가 서명 여부를 감시하고 직원을 퇴근시키지 않고 부서장이 따로 불러 서명을 강요하는 등 취업규칙 변경 과정에서 불법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전남대병원은 서면 이사회를 통해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려다 노조의 반발로 성공하지 못했다. ‘취업규칙을 바꾸고자 할 때는 조합과 협의해야한다. 불이익하게 변경할 때는 조합의 동의를 얻어야한다’는 단체협약을 위반했다는 것이 노조의 주장이다.

이들 병원 외에도 강원대병원, 서울대치과병원, 강릉원주대치과병원, 분당서울대병원, 제주대병원, 부산대치과병원 등에서 임금피크제가 통과됐다. 부산대병원, 전북대병원, 경상대병원은 서면 이사회를 통해 취업규칙을 변경했고, 충북대병원, 전남대병원, 충남대병원에서도 도입을 시도하고 있다. 

정부출연 연구기관에서도 임금피크제 도입을 위한 취업규칙 변경이 이어지고 있다. 민주노총 공공연구노동조합 산하 해양과학기술원, 극지연구소,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와 전국과학기술연구전문노조 산하 출연 연구기관 등에서 임금피크제를 둘러싸고 노사 간 대립했다. 

공공기관들이 이처럼 노동자나 노조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서면 이사회 등의 편법을 사용해가며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는 이유는 정부가 임금피크제 도입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8월 대국민담화에서 “금년 중으로 전 공공기관의 임금피크제 도입을 완료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9월 기획재정부는 ‘공공기관 임금체계 개편 관련 경영혁신지침(안)’을 마련했다. 10월 말까지 임금피크제를 도입할 경우 총인건비 인상률 전체를 인정하고 12월 말까지 도입 시 총인건비 인상률의 4분의 3만, 올해 도입하지 않을 경우 총인건비 2분의 1을 상한으로 적용한다는 내용이다. 정부가 공공기관의 돈줄을 쥐고 임금피크제 도입을 강요하는 상황이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4일 보도자료를 내고 출연연구원, 병원을 제외한 287개 공공기관이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고 발표했다. 11월3일 기준으로 313개 공공기관 중 91.7%인 287개가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는 내용으로 30개 공기업, 86개 준정부기관은 모두 도입을 완료했고 197개 기타공공기관은 20개 출연연구원, 4개 국립대학 병원(전남, 충북, 충남, 부산), 2개 기타기관(국방과학연구소, 대한법률구조공단)을 제외한 171개 기관이 도입을 완료했다고 밝혔다. 

기획재정부는 “일부 미도입 출연연과 국립대병원은 공공연구노조, 보건의료노조 등 상급단체에 교섭권을 위임하고 있다”며 “앞으로 주무부처 중심으로 미도입 기관 추진상황을 점검?독려해 전체 공공기관 도입이 완료되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공공기관의 임금피크제 도입이 정부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다는 뜻이다. 

서울대병원의 경우 임금피크제를 통과시킨 이사회에 기획재정부 차관과 교육부 차관, 보건복지부 차관이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는 9일 기자회견을 열어 “기획재정부, 교육부, 복지부가 이사로 참여하고 있는 서울대병원 이사회에서 직원 동의가 부결된 안을 통과 시킨 것은 정부 스스로 불법을 저질렀다는 것을 뻔히 증명한다”고 비판했다. 의료연대본부는 9일 교육부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 의료연대본부가 9일 교육부 앞에서 농성에 돌입한 모습. 사진=의료연대본부 제공
 

임금피크제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점은 정부가 앞장서서 노조나 노동자의 동의도 없이 노동자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취업규칙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갈등은 노동개악의 주요 내용인 ‘취업규칙 변경 요건 완화’가 어떻게 악용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미래이자 시발점이다. 

민주노총은 지난달 29일 성명에서 “대표적인 노동개악 조항인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이 어떻게 악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서울대병원의 사례는 노동개악의 실체를 밝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저성과자 해고, 이미 진행 중

취업규칙 변경의 부작용은 다른 지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저성과자 해고를 위한 취업규칙 변경이 이미 진행 중이다. 경북교육청은 지난 10월19일 기존 취업규칙을 없애고 ‘교육실무직원 관리규정’을 만든 뒤 이 규정이 취업규칙의 효력을 지닌다고 발표했다. 교육실무직원이란 학교에서 일하는 영양사, 조리사, 행정사 등 비정규직을 뜻한다.  

이 관리규정에는 근무성적을 5단계로 구별해 3회 연속 최하위 등급을 받은 경우 해고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사실상의 ‘저성과자 해고’제도다. 게다가 근무성적평정표에는 ‘직무소홀’ ‘직원 간 단합 저해’ ‘책임감’ ‘청렴성’ 등 주관적인 평가기준도 포함돼 있다. 조세화 민주노총 법률원 변호사는 “취업규칙과 동일한 내용을 다루는 관리규정은 취업규칙으로 봐야하고, 불이익 변경 역시 노동자 동의를 받아야한다. 경북교육청 사례는 위법한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이라고 설명했다. 저성과자 해고에 대한 정부 가이드라인이 나오기도 전에 공공기관에서 저성과자 해고를 도입한 셈이다. 

노사정합의 이후 저성과자해고가 부각되자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9월21일 노동부 확대점검회의에서 저성과자 해고는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라고 밝혔다. 이 장관은 “성과평가 결과에 의한 상대평가가 아니라, 객관적·투명한 기준에 따라 선정하는 절대평가의 개념”이라며 “현장에서도 불안이나 오해가 없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신문 등 경제신문들도 “저성과자 해고의 잡음을 줄이려면 절대평가를 도입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북교육청의 교육실무직원 관리규정 18조에는 “근무성적 평가는 5단계로 구분하여 평가하되 동일직종에 2인 이상의 피평정자가 있는 경우 반드시 점수를 차등 부여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근무성적 평가 결과는 재계약, 무기계약전환 등을 결정하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는 규정도 있다. 상대평가 방식을 도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고용노동부 광고.
 

9·13 노사정합의 전에도 노동현장에서는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으로 저성과자 해고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이어져왔다. 지난 5월 삼성전자서비스 천안센터는 비조합원 중심으로 서명을 받아 취업규칙을 변경했다. 업무성적이 월 하위 10% 미만으로 월 3회 연속 평가된 경우, 근무태도 불량으로 경고를 연속 2회 받은 경우, 고객에게 3회 이상 클레임을 받는 경우 해고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한 조합원이 이에 반발해 음독자살을 시도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노사는 취업규칙 변경을 철회하기로 합의했다.

지난 9월10일에는 은수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LG유플러스 서비스센터 연합회가 작성한 ‘서비스센터 운영개선 토의(안)’이라는 문건을 공개했다. 이 문건에는 분기평가 3회 이상 D등급을 받은 노동자를 해고하는 계획이 담겨있다. 

언론사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12월 한겨레21 보도에 따르면 MBC는 저성과자를 대상으로 짧게는 1년 만에 해고 절차를 마련하고 그 합법성을 따지기 위해 법무법인으로부터 유료법률 자문을 받았다. 

MBC는 화우로부터 8월12일, 8월18일엔 김앤장으로부터 ‘3R를 두 번 받으면 징계해고를 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답변을 받았는데, R등급은 MBC가 1년에 세 차례 실시하고 있는 역량?업적 평가에서 70점 이하를 받은 사원에게 주는 인사등급이다. MBC는 또한 3R을 받은 사원이 다시 3년 안에 3R을 받았을 때 징계해고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자문했으나 화우와 김앤장은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는 부정적인 답변을 내놨다.

한겨레21은 “MBC는 8월 중 김앤장과 화우로부터 받은 답변서를 토대로, ‘장기 저성과자 해고 절차를 운영할 예정’이라며 9월에 이에 대한 검토를 다시 요구한다”며 “6개월마다 하는 업적평가에서 R등급을 한 번 받을 때마다 교육발령을 낸 뒤, 세 번 받으면 곧바로 징계를 검토하는 방안”을 MBC의 ‘해고 시나리오’라고 소개했다. 

법 개정도 없이 만들어질 노동현장의 관행들

이런 사례들은 노동계가 우려하던 상황이 현실화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환노위 소속 은수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저성과자 해고, 취업규칙 변경 완화 등 법 개정이 필요 없는 두 가지 행정지침을 노동개악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으며 “법 개정도 없이 지침을 통해 노동현장의 관행을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근로기준법에 취업규칙이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바뀔 경우 노조나 노동자 과반의 동의를 얻어야함에도 ‘불이익한 내용이 아니다’며 동의 없이 밀어붙인다. 정부는 여기에 더해 “사회통념상의 합리성”이라는 불분명한 기준을 따르면 노조나 노동자 과반 동의가 없어도 취업규칙을 노동자에 불리하게 변경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노동현장에서 취업규칙 변경을 통한 불법적인 저성과자 해고의 시도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는 저성과자 해고를 인정하는 ‘일반해고 가이드라인’을 밀어붙이고 있다. 노동개악의 미래는 이미 바로 앞에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