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시행령 정치’, 국회는 안중에도 없다
모법 위배하는 시행령으로 지지층 결집·여론통제… 끌려가지만 새누리당도 '부글부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두고 여전히 반대여론이 높지만 박근혜 정부는 정부의 확정고시 발표 이후 민생으로 돌아가자고 외친다. 이처럼 박근혜 대통령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사안들을 입법이 아닌 시행령으로 밀어붙이는 ‘시행령 정치’를 반복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3일 역사교과서 국정화 확정고시를 발표했다. 지난달 12일 정부가 국정화를 행정 예고한 이후 반대여론이 급증했고 역사학계의 대대적인 집필거부 선언과 새누리당 내부의 반대 목소리가 이어졌음에도 강행한 것이다.
20일 간의 여론수렴기간도 요식행위였다. 정부는 여론수렴기간 중에 예정된 시기보다 이틀 앞당겨 확정고시를 발표하겠다고 밝혔고, 행정예고기간동안 32만 건이 넘는 반대의견이 들어왔으나(찬성의견의 2배) 정부는 수용하지 않았다. 아예 의견을 받을 팩스를 꺼놨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런 독주가 가능했던 이유는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입법사안이 아니라 시행령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교과용도서의 사용’에 대해 규정하는 초중등교육법 제29조 2항은 “교과용도서의 범위·저작·검정·인정·발행·공급·선정 및 가격사정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고 규정했다. 해당 대통령령의 내용은 “국정도서는 교육부장관이 정하여 고시하는 교과목의 교과용 도서로 한다”(제4조)는 것이다. 교육부장관이 고시하면 끝이란 뜻이다.
정부가 국정화 확정고시를 발표한 3일 국무회의에서는 ‘신문법 시행령 개정안’이 통과됐다. 지난 8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입법예고한 이 신문법 시행령 개정안은 인터넷신문등록제 강화를 골자로 한다. 취재 및 편집 인력이 5명 이상인 인터넷 언론사만 인터넷 언론으로 등록할 수 있고, 1년 유예기간을 두고 소급적용이 된다. 국무회의 통과로 이제 박근혜 대통령의 재가 절차만 남았다.
언론계 일각에서는 사실상의 언론통폐합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언론진흥재단이 2014년 1776개 인터넷언론을 조사한 결과 1~4인을 고용한 인터넷신문사는 38.6%에 달했다. 신문법 시행령 개정안에 따르면 3분의 1 이상이 폐간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인터넷기자협회에 따르면 최대 85%의 인터넷 언론사가 사라진다. 신문법 시행령 개정안은 이해관계자들이 많고, 반대도 많은 사안이었지만 ‘정부의 통보->시행령 개정’이라는 간단한 절차만 거쳐 확정됐다.
행정자치부가 추진 중인 ‘지방교부세법 시행령 개정안’도 논란거리다. 지방자치단체가 복지 관련 사업을 신설하거나 변경할 때 중앙부처와 협의하지 않거나 협의‧조정결과를 따르지 않을 경우 지출된 금액 내에서 지방교부금을 삭감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예컨대 이재명 성남시장이 중앙부처와 협의하지 않고 청년수당으로 10억 원을 지출했다면 중앙부처가 성남시에 주는 지방교부금을 10억 원 깎아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상 중앙정부가 지방자치를 억압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 지난 10일 오전 국무회의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 사진=청와대 | ||
이처럼 박근혜 정부는 입법사항이 아닌 시행령을 활용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시행령 정치’를 한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박근혜 정부는 보수층을 결집시켰고 친박의 친위체제를 구축했다. 신문법 시행령 개정안을 통한 ‘인터넷 언론사 통폐합’은 온라인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주류언론, 그리고 주류언론의 주장을 인터넷 공간에 유통시키려는 정부여당의 의도에 맞아떨어지는 여론통제 조치다.
지방교부세법 시행령은 야당 지방자치단체장에 대한 견제수단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19~29세 저소득층 취업준비생 3000명을 선정해 최장 6개월간 매달 50만원씩을 주는 청년수당을, 이재명 성남시장은 성남에 3년 이상 거주한 19~24세 청년에게 연간 100만원을 수당으로 주는 청년수당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1일 박 대통령 주재로 열린 사회보장위원회 회의에서 몇몇 위원들은 이러한 청년수당 정책에 대해 “선심성 정책을 남발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박근혜 정부가 시행령을 이용해 야당 지자체장들이 내놓은 복지정책에 제동을 건 셈이다. 이를 아는 새정치민주연합은 ‘복지후퇴 저지 특별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재명 시장을 공동위원장에 임명했다. 이 시장은 1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지방교부세 시행령 개정안에 대해 “지방정부의 복지정책 방해에 중앙부처가 총출동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돌이켜보면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까지 불러온 국회법 개정안도 시행령에 관한 내용이었다. 정부는 지난 5월 29일 본회의에서 시행령 등 행정입법이 모법의 취지나 내용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될 경우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가 정부에 수정이나 변경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청와대는 ‘삼권분립 위배’라고 반발했고 정의화 국회의장이 강제성을 약화시키는 수정안을 만들어 정부에 이송했으나 박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박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며 “정부를 도와줄 수 있는 여당에서도 국회법 개정안으로 행정업무마저 마비시키는 것은 국가의 위기를 자초하는 것”이라며 유승민 원내대표를 겨냥해 비난했다. 결국 유승민 원내대표는 스스로 물러났다.
당시 여야가 공무원연금개혁안과 함께 국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이유는 정부가 5월 6일 통과시킨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중 모법인 세월호특별법에 위배되는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신문법 시행령 개정안’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 신문법에 위배되고, ‘지방교부세법 시행령 개정안’은 지방자치를 보장하는 지방자치법을 위배한다는 논란을 낳고 있다.
결국 박 대통령이 강제조항도 없는 국회법 개정안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유승민 원내대표까지 찍어내기 한 이유를 두고 ‘시행령 정치’를 방해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런 시행령 정치를 두고 ‘법 위의 정치를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최영일 시사평론가는 13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시행령도 국회의 검토를 받아야한다는 문구 하나를 못 받아들여서 여당 원내대표까지 적으로 몰았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사실 박근혜 정부의 업무추진 매커니즘이 시행령에 숨어 있기 때문”이라며 “법이 명료하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은 하위법인 시행령이 규정한다는 법의 맹점을 적극 활용하는 현란한 테크닉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 평론가는 이어 “야당이 국회에서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행정부의 시행령을 철저히 검증해 공격 포인트를 잡아야한다”고 강조했다.
이재명 성남시장 역시 지난 6일 자신의 SNS에 남긴 글에서 “대통령이 법률에 위반되는 명령을 할 수 있는 것은 긴급조치가 필요한 국가비상사태에 한한다. 그런데 박근혜정부에서는 법률에 어긋나는 시행령(대통령령)이 일상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며 “국가비상사태도 아닌데 국회는 무시되고 상시적으로 대통령 맘대로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나라.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법'치주의가 무너지고, 대통령 시행령으로 지배되는 '영'치주의 시대가 되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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