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총궐기를 ‘테러’하는 방법
‘시민 불편’을 ‘논술고사’로 구체화, 집회를 테러와 동일시…진화하는 이념공세 수법
서울 도심에서 10만 명이 넘게 모인 민중총궐기 집회가 열린 지 일주일이 다 되어가고 있다. ‘노동개악 반대’ ‘국정화 반대’ ‘쌀값 폭락 반대’ 등의 여러 가지 요구사안이 있었으나 이런 요구사항은 다 묻히고 ‘불법집회 vs 과잉진압’의 논란만 남았다. 나아가 정부여당은 이번 집회를 테러라 규정하며 대대적인 공안몰이에 나서고 있다.
지난 14일 서울에서 열린 민중총궐기에 앞서 민중총궐기 투쟁본부는 11개 영역 22개 요구를 발표했다. △쉬운 해고 평생 비정규직, 노동개악 중단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 모든 서민의 사회안전망 강화 등 일자리 노동분야와 밥쌀 수입 저지, TPP 반대, 쌀 및 농산물 적정 가격 보장 등 농업분야에서부터 역사왜곡 중단 역사교과서 국정화 계획 폐기 등 민주주의 분야까지 요구안은 매우 다양했다.
하지만 민중총궐기 이후 이러한 요구들은 사라졌다. 민중총궐기 이후 불법집회 vs 과잉진압 논란만 남았기 때문이다. 경찰은 광화문-종로-시청 일대를 차벽으로 봉쇄했고, 시위대는 그 안에 고립됐다. 차벽으로 행진을 막으니 시위대의 목표는 차벽을 뚫는 것이 됐다. 집회에서는 노동개악 반대 등의 구호 대신 경찰진압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경찰의 진압으로 농민 백남기씨가 병원에 실려 가면서 그 날 경찰 진압이 정당했냐는 논란이 더욱 부각됐다.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은 집회의 구호 대신 시위대의 폭력성, 폭력적인 상황이 벌어진 원인 대신에 현상만을 부각시키기에 바빴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16일부터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했다. 김무성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들의 의도가 나라를 마비시키겠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국민들은 공권력이 불법무도한 세력들에게 유린되는 무능하고 나약한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다”고 비난했다.
초재선 의원들도 앞 다투어 막말을 쏟아냈다. 16일 새누리당 초재선 모임 아침소리 회의에서 이완영 의원은 “선진국에서는 폴리스라인을 넘으면 경찰이 그냥 패버린다. 미국 경찰들이 총을 쏴서 시민들이 죽는 데 10건 중 80~90%는 정당하다고 한다”고 말해 큰 논란을 일으켰다. 하태경 의원은 “불탄 차량이 50대가 있는데 원형을 보존해서 광장에 전시하자. 폭도들의 만행이 어땠는지 직접 국민들이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며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했고 이노근 의원은 “소위 말하는 유사범죄단체로 보인다”라며 시위대를 싸잡아 범죄자 취급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의 신문 보도 모니터 보고서에 따르면, 보수언론은 ‘쇠파이프’ ‘벽돌’ ‘사다리’ ‘새총’ 등의 무기 든 모습을 강조했다. “버스 차벽을 밧줄로 끌어당겨 무너뜨리고 쇠파이프와 사다리로 경찰 버스를 때려 부수는 등 공권력을 마음껏 조롱했다” “시위대가 철제 새총으로 경찰을 향해 공업용 볼트를 쏘고, 보도블록을 깨 만든 돌로 경찰을 공격하는가 하면 철제 사다리와 쇠파이프 등으로 경찰 버스를 깨부수는 모습”(조선일보)
동아일보 역시 “치밀하게 준비된 폭력성을 드러내며”, “시위대가 미리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 폭력시위 도구가 등장”, “시위대는 기다렸다는 듯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공권력을 대놓고 공격했다”는 표현을 써가며 폭력성을 부각시켰다.
불법집회라는 점과 함께 늘 등장하던 ‘시민 불편’ 프레임도 같이 등장했다. 동아일보는 “폭력 시위 뒤 서울 도심은 쓰레기로 몸살을 앓았다”며 교통 통제로 인한 관광업계 피해를 보도했고, 조선일보는 “시위가 끝나고 서울시의회에서 세종대로 네거리로 이어지는 도로엔 소주병과 만두, 김밥 포장지와 물병 등 쓰레기가 널려 있었다”며 시위 일대를 술판으로 묘사했다.
‘집회로 시민들이 피해를 본다’는 프레임은 더욱 더 구체적으로 진화했다. 해당 집회가 예정된 날 논술고사가 있었는데, 학부모와 학생들이 집회 때문에 불편을 겪었을 것이란 주장이다.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12일 “우리 소중한 학생들의 앞날을 가로막는 정치집회는 즉각 중단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새누리당은 공식 페이스북에 이 같은 내용을 게시했다.
▲ 새누리당 페이스북 게시물. | ||
하지만 민중총궐기 집회가 열리는 14일 열린 논술 및 면접의 입실시간은 대부분 오전이었다. 민중총궐기 집회는 오후에 열렸다. 투쟁본부는 “12개 대학 중 11개 대학은 광화문과 종로 등 민중총궐기가 진행되는 도심과는 거리가 있다”며 “그나마 집회 현장과 가까운 성균관대의 경우 수험생들의 입실에는 큰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보수언론도 가세했다. 조선일보는 민중총궐기 당일인 14일 기사에서 “대입 논술·면접고사를 치르는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알아서 교통 대책을 세우라고 요구한 셈”이라고 비난했다. 중앙일보는 15일 사설에서 “다행히 수험생들이 서둘러 대중교통을 이용한 덕분에 지각 사태는 없었지만 학부모들은 가슴을 졸여야 했다”고 밝혔다. “만추(晩秋)의 추억을 담으려 부슬비 속에 나들이에 나섰던 이들도 기분을 망쳤다”고까지 했다. 실제 피해도 없는데 학부모들이 가슴 졸이는 것과 나들이객 기분 때문에 집회 시위를 하지 말라는 논리다.
단골메뉴인 색깔론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민중총궐기 참가자들을 ‘전문시위꾼’으로 몰아붙이는 방식이다. 조선일보는 “그간 주요 반정부 시위에 단골로 가담해온 단체들”, “과거 통합진보당 해산 반대 범국민운동본부에도 가입해 활동한 단체”라는 표현을 썼다. 동아일보는 “이적단체” 혹은 “상습적으로 불법을 저지르는 좌파 단체”로 규정했다.
김종훈 새누리당 의원은 16일 아침소리 회의에서 “2008년 광우병 시위가 다시 등장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몇 명은 알아보겠더라”고 말했다. 김 의원은 2008년 한미 쇠고기 협상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이었다.
조선일보는 경찰의 물대포로 쓰러진 백남기씨가 운동권 출신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백씨가 “중앙대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 ‘복학생 왕고참’으로 불렸다”며 백씨의 이력을 줄줄이 나열했다.
색깔론도 진화했다. 이제 운동권, 북한이 아니라 IS와 연관시킨다. 13일 벌어진 파리의 도심 테러와 민중총궐기를 비교하는 방식이다. 서청원 최고위원은 16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사법당국이 이런 기본질서를 해치는 일부터 해결하지 못하면 전세계로 번지는 이슬람국가의 테러에도 이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김무성 대표는 19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전 세계가 복면 뒤에 숨은 IS척결 나선 것처럼 우리도 복면 뒤에 숨은 불법·폭력시위 척결해야 한다”며 IS와 시위대를 등치시켰다. 이 외에도 새누리당 의원들은 여러 차례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을 테러조직과 등치시키는 발언을 쏟아냈다. “폭동을 넘어 대한민국 국민을 향한 명백한 테러 범죄”(정갑윤 의원) “대한민국 경찰을 때리고 쇠파이프로 버스를 부수고 거리를 점령하려고 하는 테러분자들”(조원진 원내수석부대표)
음모론까지 등장했다. 백씨가 중상을 입은 원인이 경찰의 물대포가 아니라 시위대의 폭행이라는 주장이다. 김도읍 새누리당 의원은 19일 김수남 검찰총장 후보자 청문회에서 “동영상이 약간 모호하지만, 빨간 옷을 입은 한 사람이 쓰러져있는 농민에게 주먹질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영상이 찍혀있다”고 말했다.
▲ 일간베스트저장소 게시물. | ||
같은 당의 김진태 의원도 “지금 다쳐서 끌려가는 노인을 빨간 우비를 입은 청년이 어떻게 하는지 보라. 가서 확 몸으로 일단 덮친다”며 “백 노인이 우측 두개골 골정상을 입었다고 하는데 저기 다른 사람이 가서 구호조치를 하려고 하는데 굳이 가서 올라타는 모습이 보인다. 이게 상해의 원인이 됐다고 보여지는데 철저히 수사해보라”고 주장했다. 이는 극우사이트인 일간베스트저장소에서 제기된 주장이다.
관련 기사 : <일베 보고 질의하는 새누리당 의원?>
집회의 폭력성 부각, 색깔론 덧씌우기, 음모론 제기의 효과는 ‘물타기’다. 이미 민중총궐기의 구호 대신 폭력집회 vs 과잉진압으로 논란이 확산됐다. 경찰의 물대포 때문이라는 백씨의 중상 원인에 음모론을 제기하면서 백씨의 중상을 ‘논란거리’로 만든다. 여당 의원의 입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언론이 이를 받아쓰면서 자연스럽게 백씨 중상에 대한 경찰의 책임은 흐려진다.
20일 오전 당정은 새누리당이 발의한 ‘5대 노동개혁 법안’ 관련 당정협의를 가졌다. 같은 날 국사편찬위원회는 40명 안팎의
집필진을 확정짓는다. 정부여당은 노동개악과 국정화 반대 등의 목소리를 담은 민중총궐기를 지렛대 삼아 오히려 노동개악과 국정화
반대 등을 밀어붙일 공세를 취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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